제 5 장
성전에 대한 설명
1. 성전에 대한 묘사
내가 말한[㈜ 전쟁. 5권. 4 : 1(138)이하.] 성전은[㈜ 헤롯 성전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와 비교할 때 주후 150년경에 기록된 미도트(Middot(h)라고 표제가 붙은 미쉬나(Mishna)에 관한 논문에서 두 번째 부분에 기록이 나온다. 두 개의 이야기에는 특기할 만한 부분들이 많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점에 있어서 미도트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충하고 있지만 정보를 간접적으로 그에게 전한 미도트의 저자는 단순한 고물 수집가의 정확성을 엄격히 고려하지 않고 기록했다. 에스겔(Ezekiel)과 같이, 그는 미래의 이상적인 성전상(聖殿像)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개의 이야기 중 그 성전을 보았던 요세푸스의 이야기는 보다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요세푸스, 미도트,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 사이에서의 불일치는 논문(미쉬나에 관한 논문-역자주)의 가장 최근판의 견해인 ?헤롯 성전의 정확한 상은 오늘날 더 이상 그려질 수 없다.\’ 라고 언급될 정도로 크다.?O. Holzmann, \’Die Mischna, Middot\'(미쉬나, 미도트)(Giessen, 1913), p.4와 특히 \’논문 미도트와 요세푸스\'(Der Traktat Middot und Josephus) p.15-44를 보라.]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꼭대기의 평평한 지역은 성지와 제단으로는 근본적으로 적합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주위의 땅이 가파르고 울퉁불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의 건축자인 솔로몬왕은 동쪽에 성벽을 세우고 안쪽에 회랑 하나를 건축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성전을 지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토성을 쌓으면서, 꼭대기가 넓은 평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북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나서 성전 전체만큼 넓은 지역을 넓혔다.[㈜ 미도트(Middoth) ii : 1에 따르면 그 성전 언덕은 500규빗 평방이었다(숫자는 스겔 42:16-20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3면의 성벽을 바닥부터 쌓아올려[㈜ 위의 절 전쟁. 2권. 5 : 1(185)에서 언급된 것처럼, 솔로몬(Solomon)은 이미 동쪽 측면에 성벽을 축조하였다.] 언덕을 둘러 쌌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고 큰 작업이었다. (그 작업은 오래 걸렸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재산들을 다 썼으며 세계 각지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물(獻物)로 충당하였다.) 유대인들은 원래 성전터의윗쪽을 뜰로 만들고 아랫쪽을 성전 경내로 만들었다. 기초(foundation)가 가장 낮은 성전 경내는 300규빗이나 깊은 곳에서 성벽을 쌓아올려 넓혀진 곳이다. 어떤 곳은 이보다 더 깊은곳에서 기초를 쌓아 올린 곳도 있었다. 그러나 기초석의 전체 깊이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시내의 좁은 길목을 평평하게 하려고 계곡의 상당한 부분을 메꾸었기 때문이다. 이성벽 기초석은 34규빗에 달하는 돌이 사용되었다. 아낌없는 투자와 백성들의 열정이 이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작업을 하게했으며, 보기에 끝이 없는 이런 작업을 인내를 통해서 이룩한 것이다.
2. 회랑과 바깥뜰
이와같은 기초부분에 잘 어울리게 상부구조도 잘 지어졌다. 전부 2줄로 되어 있는 회랑들은 높이가 25규빗이나 되는 기둥들로 받쳐져 있었는데 각 기둥은 흰 대리석 하나로 되어있고, 천장을 백향목으로 치장하였다. 이 기둥들은 자연적인 품위는 물론이고 반들반들하고 정교하게 접합되어 어떤 그림이나 조각으로장식하지 않고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회랑들의 너비는30규빗이며, 둘레는 안토니아 망대를 포함하여 6퍼얼롱이었다.밖에 있는 뜰(open court)은 가지각색의 돌들이 전체에 깔려 있어 아주 알록달록하다.
[두번째 뜰은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다]
안토니아 망대를 지나 성전의 2번째 뜰로 들어가면 두 번째 뜰이 3규빗 높이로[㈜ 약4,5피트:미도트에 나오는, \’10뼘\’은 약2,5피트에 해당된다.] 돌 분리벽이[㈜ 히브리어 소렉(soreg), 미도트 ii : 3 상반부.] 둘려 있으며, 멋진 솜씨로 만들어졌음을 보게 된다. 두 번 째 뜰 입구에 같은 간격으로 석판(石板)이 세워져 있었는데, 어떤 것은 헬라어로, 어떤 것은 라틴어로\’이방인들은 거룩한 곳(holy place)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정결의율례를 알리는 경고문이었다.[㈜ 이 석판들 중 하나는 1871년 M.Clermont-Canneau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다.] 성전의 두 번째 울타리를 친 곳을거룩한 곳이라고 불렀다. 이 성전의 두 번째 뜰은 첫 번째 뜰에서14계단을 올라가면 다다른다. 특히 이 지역은 정사각형으로 되어있으며 계단으로 인해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두 번째 뜰 밖에서 보는 벽의 높이는 40규빗이 되며 안쪽에서의 높이는 단지 25규빗이다. 두 번째 뜰은 높은 곳에 있고 일부는 언덕에 가려있기 때문에[㈜ 혹은(사본들에는) \”솟아오른 대지위에 세워져 있는 계단\”.]안쪽에서는 전체가 다 보이지 않는다. 14개의 계단 넘어계단과 벽사이에 10규빗의 평평한 공간이 있었다.[㈜ 위에 단(壇)있는 계단은 건물의 세측면으로 뻗어있다 : 서쪽 끝에는 계단이 없다(전쟁.5권. 1:5 (38)). 미도트 ii:3하반부에서는 단(壇)의 넓이가 10규빗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요세푸스의 14+5대신에 12계단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과 다른 불일치를 볼 때 요세푸스가 보다 진정한 저자임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다시 5개로 된 다른 계단들이 문까지 이르른다. 이 문들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4개씩 8개가 있으며, 동쪽에는 필수적으로 두 개의 문이 있다.[㈜ 즉 성전과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뜰과 비교해서. 두 개의 문은 내부 뜰로 들어가는 주요입구인 여인의 뜰(the Women;s Court)과는 별도로 동쪽과 서쪽 성벽의 중심부에 있었다.]
[여인의 뜰]
왜냐하면 동쪽에는 여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특별한 장소가있기 때문에 벽이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두 번째 문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이 문은 첫 번째 문과 반대로 나 있었다. 남쪽과 북쪽에는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여인의 뜰로 들어오는 문이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다른 문을 통해서 들어 올 수 없었고,단지 이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여인의 뜰은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이거나 타국에서 온 방문객들이거나 유대여성일 경우예배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서쪽 끝에는 성문이 없었고, 벽으로 되어 있었다. 성문들 사이에 지은 회랑들은 보물을 쌓아두는방[㈜ 보물창고는 전체 내부 뜰의 벽을 따라 있었고, 성전의 재산을 보관하는데 이용되었다(Smith, \’Jerusalem\’, ii:510주. Hastings, \’D.B.\’ iv:714a);보물창고는 기탁한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견고한 방이 있었을 것이다. 전쟁.6권. 5:2(282), 참).고대.19권. 6:1(294)에 나오는 \’보물\’. 한편 신약 성경(막 12:41, 등)에 나오는 \”보물\”은 여인의 뜰이 있던 구제와 봉헌을 위한 13개의 나팔 형태의 그릇을 의미한다.] 정면에 있는[㈜ 혹은 \’~로부터 내부를 향하는.\’] 벽 안쪽에 있었으며, 아주 아름답고 큰 기둥들로 받쳐져 있었다. 이 회랑들은 한겹으로 되어 있었으나 규모만 작을 뿐 다른 점은 아래뜰에 있는 회랑 못지않았다.
3. [성전문에 대하여]
성전문들[㈜ 10개의 문은 전쟁.5권. 5:2(198)에 나온다.] 가운데 9개는 완전히 금과 은으로 덮혀있으며, 문설주나 상인방(上引枋)도 역시 금과 은으로 덮혀 있었다. 그러나 성소의 바깥 쪽에 있는 문 하나는 고린도상 청동으로 되어져 있었으나 금과 은으로 도금된 문보다 훨씬 아름다왔다.[㈜ 미도트에 나오는 \”니카노르의 문\”(the gate of Nicanor)은 \’고린도 식의 문\’이었다.(ii:3; 모든 문들은 니카노르의 문을 제외하고는 금박이었다), 행3:2,10의 미문(美門)일 것이다. 요세푸스의 문장이 난해하지만 그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고린도식의 문이 여인들의 뜰의 서쪽 성벽에 있지 않고 동쪽 성벽에 있었음이 확실한 것 같다. 고린도의 청동은 유명하다.] 각 문에는 2개의 문짝이 있었고, 각 문짝들은 높이 30규빗, 너비 15규빗이었다. 입구 안쪽으로 양 면에 작은 탑같은 방들이[㈜ 혹은 \’성문 방들\'(gate-rooms)] 들어선현관이 있었으며, 각 방들은 길이와 너비가 30규빗이었고, 높이는 40규빗 이상이었고, 둘레가 12규빗인 2개의 기둥이 받치고있었다. 다른 문들의 크기는 모두 비슷했으나, 성소에 있는 문맞은 편 동쪽에 있는 여인의 뜰 쪽으로 나있는[㈜ 즉,여인들의 뜰의 서쪽 끝에서 성전에 이르는 동쪽 입구를 만듦.] 고린도 양식으로 된 문은[㈜ 즉,(고린도식 문)의 서쪽.] 훨씬 넓다. 높이가 50규빗으로 40개의 문짝을 갖춘화려한 장식으로 된 문이며, 커다란 금 은의 보석들이 박힌 그런문이었다. 9개의 문들은 티베리우스(Tiberius)아버지인 알렉산더(Alexander)가[㈜ 알렉산드리아의 군대장관이며 철학자 필로(Philo)의 형제이다. 고대.18권. 8:1,(259);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는 로마군대에서 참모 장교였다. 전쟁.2권. 11:6(220), 5권. 1:6(45).] 보석을 박은 것이다. 15개의 계단은 여인의뜰에서 더 큰 문 즉 고린도산 청동문까지 이어져 있었고, 이 계단들은 다른 문들에 있는 5개로 된 각 계단보다 계단높이가 낮았다.[㈜ 전쟁. 5권. 5:2(198).]
4. [성전 본당에 대하여]
성스러운 건물 그 자체인 성전본당(holy temple)은 가운데 위치해 있었고, 12개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정면은[㈜ 커다란 입구나 현관으로 여기면 된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800규빗이었다.[㈜ 미도트(Middoth) iv : 6, 네로시대에 아그립바(Agrippa)왕은 높이가 120규빗에 달하게 준비를 갖추었지만 그 공사는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전쟁.5권. 1:5(36)이하. 참). 고대.15권. 11:3(391).] 그러나 건물 뒤는 40규빗 더 좁았다. 왜냐하면 정면에는 각각 옆으로 20규빗 어깨모양으로 더 퍼졌기 때문이다.[㈜ 미도트. iv : 7c; \”성전은 사자와 같이 뒤쪽이 좁고 앞쪽이 넓다\”] 첫 번째 문은 높이 70규빗, 너비 25규빗이며 문짝이 달리지 않은 문으로 하늘의 빈 공간을 상징하는의미에서 문짝이 없었다. 전체 정면은 금으로 덮혀 있었고, 정문을 지나면 첫 번째로 보이는 것은 전체가 금으로 반짝이는 안쪽문의 둘레와 그 웅장함을 볼 수 있다. 성전본당은 2개의 방으로나누어져 있는데,[㈜ divstego\”은 문맥에서 볼 때 \’한바닥에 두 개의 방이 있는\’을 의미한다. 즉 성소와 지성소(至聖所)이다. 전쟁.211에 나오는(다음 각주d)것 같이 \’이충에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방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 보인다. 이 방은 길이가 50규빗, 너비가 20규빗, 높이가 90규빗에 달하는 방이었다. 성전 안쪽으로 열린 문은 앞서 언급했듯이[㈜ 전쟁.5권. 5:4(208).] 완전히 금으로 도금되어졌고, 그 주위의 벽전체도 역시 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문 위에는 금으로 된 포도가[㈜ 참).고대.15권. 11:3(395)타키투스(Tacitus), \’박물학\’. v:5은 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vitis aurea temple reperta)그리고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Father Liver(박쿠<Bacchus>)의 숭배자들이라고 추론하였음을 암시한다.] 사람 키만큼 큰 포도송이들에 달려 있었다.[㈜ 사본에서 추가하기를 \’성전은 이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깥보다 안쪽이 낮게 보인다.\’ 이러한 부적절한 삽입구가 문장에 들어가 있으며, 이전에 사용되었던 divstego\”와는 다른 의미를 주며, 그 건물의 내부에 대하여 너무 이론 언급을 하고 있다. 이것에 관한 묘사는 전쟁.5권. 5:5(215)에서만 기술하고 있다. 두 개의 층에 관한 언급은 전쟁.5권. 5:5(221)에 있다. 그절을 전쟁. 5권. 5:4(209)의 개시어에 대한 설명으로 취했다. 저자 자신 혹은 sunergov\”(동역자)가 수정했을 것이다 ; 이는 본문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문짝 앞에는 바벨론 산 융단(Babylonian tapestry)으로 된 같은 길이의 베일이 쳐있었는데, 희고 푸르고 가늘고 섬세한 베실과 주홍색과 자주색실로 짠융단으로 놀랄 정도의 훌륭한 직조기술로 되어 있었다. 갖가지 색깔의 실로 짠 것은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그것은 우주를 형상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색은 불을 상징하고, 가늘고 섬세한 베실은 땅을, 푸른색은 하늘을 그리고 자주색은 바다를 상징한 것이다. 이 두가지가 색깔로 대조가 되며, 가는 베실과자주색 실은 그 출처에서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가는 베실과 자주색 실은 각각 땅과 바다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상징한다. 이 바벨론산 융단 위에 황도대(黃道帶 : 12궁(宮)일람도(Zodiac))의 상징물을 제외한 하늘의 온갖 파노라마가 그려져 있었다.
5. [성소에 대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의 커다란 마루가 있다. 이 마루는 높이와 길이가 각각 60규빗이며, 너비가 20규빗이다. 그런데 60규빗의 길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40규빗까지이며 3개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들어있는 곳이다. 즉 촛대(lampstand)와 진설병 상(table), 분향단(altat ofIncense)의 3가지 물품들이 있었다. 7개의 등잔(촛대에 7가지등잔이 달여 있었다)은 7개의 혹성을 나타냈다. 진설병 상위에 놓인 12개의 진설병은 12궁과 일년의 순환을 의미했다. 분향단은 바다와 육지, 사막에서 사람들이 각처에서 가져 온 13개의 향들이[㈜ 탈무드(Talmud)(성서백과<Encycl. Bibl>. ii:2167에서 인용된 것처럼)과 동일함. 출30:34에 기록된 4가지 요소(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향품)에 랍비 시대에는 9가지 요소를 더 첨가하는데, 연기를 수직적으로 오르게 하는 성질을 가진 물질로 즉 몰약, 계피, 감송향, 사프란, 육두구, 육계, 소금, 그리고 향료 식물이다. 7가지 요소의 방향제는 쥬빌리(Jebilees). 16:24에 나온다. 참).집회서(Ecclus.)24:15.] 분향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필로(Philo)에게 있어서 모세의 4가지 방향 성분은 4가지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Quis rer. div. heres\’, 197(40). 요세푸스는 그밖의 모든 곳에서 성막과 제사장 의복에 관하여 유사한 우주선 해석(전쟁.5권. 5:7(231))을 하고 있다.]
[지성소]
가장 안쪽은 20규빗으로 바깥 부분과 같은 방식으로 휘장이드리워져 있었다. 이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은 지성소(Hdy of Holy)[㈜ 이것에 대한 히브리 명칭은 debir(\’제일 뒤쪽의 성소\’)혹은 지성소였다.]라 불리는 곳으로 누구나 들어가거나, 침입하거나,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제사장들의 방]
성전본당 아래 쪽 주위에는 3층으로 된 많은 방들이 있었는데방들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이 방들은 출입구가 양쪽으로나 있었다. 성의 위쪽 부분에는 이런 방들이 없었다. 위쪽 부분은 아래쪽 부분보다 더 좁았으나 높이는 40규빗이 더 높았다.40규빗에 60규빗되는 마루를 합치면 전체의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6. [성전 외부에 대하여]
성전의 외부는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사면이 거대한 금판으로 덮어져 있었다. 태양이 뜨면 반짝반짝 멋지게 반사를 하고 있어 눈부셔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이 멀리서 보면 그성전 외부는 마치 눈덮힌 산과 같았다. 왜냐하면 금으로 덮혀 있지 않은 부분은 모두 완전히 흰색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꼭대기에는 뾰족한 금 못이[㈜ 미도트 iv:6에서는 높이가 1규빗인 허수아비(scare-crow)를 언급하고 있다.] 박혀 있었는데 이것은 새들이지붕에 앉아서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엄청난 길이의 이러한 블록(block)은 예외적이었음에 틀립없다;고대,15권. 11:3(392)에서는 블록의 치수를 25규빗(길이)x8규빗(높이)x12규빗(넓이)으로 언급하고 있다. 참). 제자들의 외침인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니이까!\’ 막13:1] 성전 건축에 사용된 돌은 길이가 45규빗, 높이가 5규빗, 너비가 6규빗이되는 것들도 있었다.
[번제단]
성전 앞에는 높이 15규빗, 너비와 길이는 5규빗 정도의 제단이 있었는데, 모양이 6면체였고, 각 귀퉁이에 뿔같은 돌출부분이 있었다.[㈜ 미도트 iii : la에서도 제단을 모퉁이에 뿔나팔이 있는 광장(square)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바닥은 32평방 규빗이고, 가장 높은 부분이 24 평방 규빗이며, 그리고 높이는 8 규빗이다 ; 이것은 오래되고 보다 작은 제단에 해방되는 치수이다.] 그리고 제단은 남쪽으로 아주 완만한 경사길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미도트 iii : 3b(치수를 증가함).] 이 제단은 전혀 철연장이 사용되지 않았고, 철로 쳐서 만들 수도 없는 구조물이었다.[㈜ 미도트 iii : 4a, b(어떤 철로된 도구도 이것을 다듬는데 사용되지 않았다)에는 기이한 설명 즉 \”왜냐하면 철은 인간의 날들을 짧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으며, 제단은 인간의 날들을 길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성전 본당과 제단 둘레에는 낮은 돌로 된 분리벽(parapet)이 있었는데,[㈜ 미도트. ii : 7b에 언급되었음.] 높이가 1규빗 남짓 되었고, 제사장과 일반인들을 구분하는 벽으로우아했다. 유대인들은 임질(gonorrhoea)이나 문둥병(Leprosy)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도시 밖으로 내쫓아 버렸으며, 월경 중인여성들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월경이 끝났을 때에도 앞에서 언급한 경계지역은 지나갈 수 없었다.[㈜ 전쟁.5권. 5:2(199).] 남자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안 뜰을 들어갈 수 없었고, 제사장도 완전히 정결예식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들어갈 수 없었다.[㈜ 참). 아피.2권 8(108)이하.]
7. [제사장에 대하여]
제사장의 계보이지만 어떤 신체적인 결함으로 제사장의 직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은 분리벽 안에서는 결함이 없는 제사장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들의 분깃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평상복을 입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는 제사장만이 성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몸에 결함이 없는 제사장들은 가는 세마포옷을 입고, 제단과 성전 본당에 갈 수 있었으며, 제사 의식을 존중했기 때문에 술은 많이 마시는 것은 자제했다. 왜냐하면 술 때문에 혹시 제사장 직무수행을 할 때 어떤 규례를 어겨 죄를 짓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예복]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이 같이 임무수행을 했는데, 매번 그런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새달(월삭,(月朔)과 전체 유대백성들이 지키던 국경일이나 명절 때에만 함께 임무수행을 했다. 대제사장은 임무수행을 할 때,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덮은 고의(袴衣,breeche)를[㈜ \”세마포 고의\”(Line breeches), 출23:42.]입었다.[㈜ 출28장에 근거한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 의복의 완전한 묘사는 고대.3권. 7:5-11(151-178)에 있다. 집회서 45:7-12를 참고하라.] 고의는 세마포로 된 내의이며, 그 위에 발까지 닿는 푸른 의복을[㈜ \”푸른색의 예복 받침 겉옷\”, 출28:31-35, 고대. 3권. 7:7,8(159-161).]입었고, 그 옷은 솔기없는 통으로 되어 있고, 장식술이 있었다. 장식술에는 금종과 석류무늬의 장식(Pomegranates)이 번갈아가며 달려 있었는데, 종은 천둥을 상징하는 것이고, 석류무늬 장식은 번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의 옷은 가슴에는 수놓인 흉배(sash)를[㈜ \”자수업자(刺繡業者)의 작품인 허리띠\”, 출 28:39. 고대.3권. 7:4(159).] 붙였는데, 이 가슴장식은 금색, 자주색, 주홍색, 가는 베실과 푸른 색의 알록달록한 색으로 만들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쟁.5권. 5:4(212)이하.] 성전본당에 있던 융단휘장과 같은 색이었다. 대제사장의 에봇(ephod)도 같은 재료를 혼합해서 만든 것으로 특히 금색이 많이 더 들어갔다.[㈜ 출 28:6이하, 고대.3권. 7:5(162)이하 본문과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에봇을 번역한 헬라어 Epomis는 어깨끈으로 붙여진 여자 웃옷의 상부를 의미하는 \’망또\’이다.] 에봇은 형태상으로는 보통 갑옷과 같았고, 2개의 금 단추로 단단히 동여매었고,[㈜ 즉 \’어깨에\’.] 아주 크고 아름다운 붉은 줄무늬 마노(瑪瑙, sar-donyx)를[㈜ 고대.3권. 7:5(165). 출28:9에서 언급된 보석은 확실치 않으며, 영역 성경 R.V.에서는 \’마노\'(onyx)로 난외주에는 \’녹주석\'(beryl)으로 되어있으며, 70인역에서는 \’에머랄드\’이다.] 박았으며, 그 위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즉, 정면에.] 다른 면에는 12개의 보석들이 박혀 있었는데,[㈜ 출 28:17-20, 고대.3권. 7:5(168).] 각각 3개씩 4줄로 되어 있었다. 즉 홍보석(sardius)[㈜ 고대.3권. 7:5(168). \”붉은 줄무늬 있는 마노\”.], 황옥(topaz), 녹주옥(emerald)이 한 줄을 이루었고, 석류석(carbuncle), 벽옥(jas-per), 남보석(sapphire)이 또 한 줄을 이루었고, 백마노(aga-te), 자수정(amethyst), 호박(jacinth)이 한 줄을 이루었으며,호마노(onyx), 녹보석(beryl) 귀강석(chrysolite)이[㈜ 고대. 3권. 7:5(168).] 한 줄을 이루었다. 이 보석 각각 하나하나 위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제사장의 모자는 가는 베로 된 머리장식이 있었는데,[㈜ \”세마포 관\” 혹은 (영역 성경 R.V. 난외주) \’비단으로 된 터어번,\’ 출 28:37, 39 ; 머리 장식물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컵과 같은 꽃으로 비교된 고대. 3권. 7:6(172-178)에 있다.] 그것은 금으로 된 관을 푸른 색으로 둘러가면서 장식한 모자로 4개의 자음으로 거룩한 글자(sacred letters)가 쓰여져 있다.[㈜ 즉, 4자(字語) YHVH. 이것이 비문이라는 것과 출 28:36에 나오는 구절이 \’야훼께 성결\'(Holy<of Holiness>to the Lord)이 아니라, \’성스러운 이름 야훼(Jahve)\’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 연구지(Journal of Theol. Studies), xxvi : 72, 180에 있는 J.E.Hogg과 F.C.Burkitt의 아론(Aron)의 머리 장식물에 관한 두편의 원고에 나타나 있다. 요세푸스가 4개의 모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첫 번째 모음과 세 번째 모음은 용법상 자음이지만 아마도 \’본래 모음\’이었을 것이다(게세니우스<Gesenius>, 히브리어 문법<Heb. Grammar>, 코울리<Cowley 편집, pp.26,45). 그는 아마 헬라어 형태 (\’ )를 생각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이런 복장은 대제사장이 평상시 입는 옷이 아니라, 단지 지성소(inner most sanctuary)에 들어갈 때만 착용했던 복장이다. 즉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 혼자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 입던 차림새인데, 그날이 바로 유대인의 규례에 따라 금식을 하는 날이다.[㈜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 ; 레위기 16장.] 예루살렘과 성전 및 관습과 율법에 대해서는 후에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 요세푸스가 저작하기로 예정했던 것이 확실한 \’관습과 원인에 관하여\’ <On Customs and Causes>는 고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8. [헤롯이 만든 안토니아 망대에 대하여]
안토니아 망대는 서쪽과 북쪽 회랑과 성전의 첫 번 째 뜰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었다. 안토니아 망대는 50규빗 높이의 바위 위에 세워졌으며, 사방이 가파른 절벽이었다. 이것은 헤롯왕이 만든것으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축조된 오랜 성(城,ba\’ri\” ) 의 터 위에 세워졌음. 고대. 18권. 4:3(91). 참).15권. 11:4(403),전쟁.1권 3:3(75). 마르크 안토니(Mark Antony)의 이름을 따라 명명됨. 전쟁.1권. 21:1(401) : 행 21:34 나오는 성(개역성경에서는 영문<營門>으로 되어있음-역자주)이다.] 헤롯의 타고난 위엄이 나타나고 있다.[㈜ 같은 구절이 전쟁.1권(408)(가이사랴<Caesarea>)의)에도 나온다.] 바위가 바닥에서부터 부드러운 판석(板石)으로 덮혀져 있는데, 이것은 장식용일 뿐 아니라 그 위로 올라 오거나 내려가는 자들을 미끄러지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건물 정면에는 3규빗 높이의 벽이 하나 있으며, 이 벽 뒤에 안토니아 망대는 높이 40규빗의 장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망대의 안은 그 웅대함이나 설비에 있어 궁전과 비슷했으며, 회랑과 목욕탕, 여러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넓은 안뜰을 포함한 각종 목적과 용도에 맞은 많은 방들이 있었다. 따라서 모든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이 망대는 마치 하나의 시를 형성하는 듯했고, 그 장엄함에 있어서는 궁전과같았다.[㈜ 전쟁.1권(421) (헤로디온<Herodion>의)을 참고.] 건물전체의 전반적인 외관은 망대의 형태였으나, 모퉁이에 4개의 다른 망대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 중 3개의 망대들은 높이 50규빗이며, 반면 남동쪽 모퉁이에는 높이가 70규빗이나 되는 망대가 있다. 그래서 안토니아 망대는 성전의 전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성전의 회랑들이 만나는 지점에 안토니아 망대와 양쪽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성 바울(Paul)이 체포되었을 때, 유대인들에게 한 연설문에서, 행 21:40] 그곳이 로마수비대의 통로였다. 왜냐하면 로마군 보병대가 그곳에 계속해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유대인의 명절 때 백성을 감시하고 반역의 움직임을 억압하기 위해 회랑 주위에 무장을 하고 지키고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예루살렘의 요새라 한다면 안토니아 망대는 성전을 지키는 요새이며, 이 안토니아 망대의 점령가들은 성전과 예루살렘과 안토니아 망대의 모든 경비를 맡았다. 게다가 상부도시는 그 나름대로의 요새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헤롯의 궁(Herod\’s palace)이다.[㈜ 위의 절에서 서술됨. 전쟁. 5권. 4:4(176)이하를 참고.] 벳세다(Bezetha) 언덕은 앞서언급했듯이[㈜ 전쟁.5권. 4:2(149).] 안토니아 망대와 떨어져 있었다.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벳세다 언덕에 새로운 도시(new town)의 일부가 세워져 있으며, 북쪽에는 성전을 관망하는데 유일한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전과 성벽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은 후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 정도의 언급으로 충분할 것 같다.[㈜ 전쟁. 5권. 5:7(237)의 각주를 보라.]

제 5 장
성전에 대한 설명
1. 성전에 대한 묘사
내가 말한[㈜ 전쟁. 5권. 4 : 1(138)이하.] 성전은[㈜ 헤롯 성전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와 비교할 때 주후 150년경에 기록된 미도트(Middot(h)라고 표제가 붙은 미쉬나(Mishna)에 관한 논문에서 두 번째 부분에 기록이 나온다. 두 개의 이야기에는 특기할 만한 부분들이 많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점에 있어서 미도트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충하고 있지만 정보를 간접적으로 그에게 전한 미도트의 저자는 단순한 고물 수집가의 정확성을 엄격히 고려하지 않고 기록했다. 에스겔(Ezekiel)과 같이, 그는 미래의 이상적인 성전상(聖殿像)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개의 이야기 중 그 성전을 보았던 요세푸스의 이야기는 보다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요세푸스, 미도트,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 사이에서의 불일치는 논문(미쉬나에 관한 논문-역자주)의 가장 최근판의 견해인 ?헤롯 성전의 정확한 상은 오늘날 더 이상 그려질 수 없다.’ 라고 언급될 정도로 크다.?O. Holzmann, ‘Die Mischna, Middot'(미쉬나, 미도트)(Giessen, 1913), p.4와 특히 ‘논문 미도트와 요세푸스'(Der Traktat Middot und Josephus) p.15-44를 보라.]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꼭대기의 평평한 지역은 성지와 제단으로는 근본적으로 적합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주위의 땅이 가파르고 울퉁불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의 건축자인 솔로몬왕은 동쪽에 성벽을 세우고 안쪽에 회랑 하나를 건축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성전을 지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토성을 쌓으면서, 꼭대기가 넓은 평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북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나서 성전 전체만큼 넓은 지역을 넓혔다.[㈜ 미도트(Middoth) ii : 1에 따르면 그 성전 언덕은 500규빗 평방이었다(숫자는 스겔 42:16-20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3면의 성벽을 바닥부터 쌓아올려[㈜ 위의 절 전쟁. 2권. 5 : 1(185)에서 언급된 것처럼, 솔로몬(Solomon)은 이미 동쪽 측면에 성벽을 축조하였다.] 언덕을 둘러 쌌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고 큰 작업이었다. (그 작업은 오래 걸렸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재산들을 다 썼으며 세계 각지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물(獻物)로 충당하였다.) 유대인들은 원래 성전터의윗쪽을 뜰로 만들고 아랫쪽을 성전 경내로 만들었다. 기초(foundation)가 가장 낮은 성전 경내는 300규빗이나 깊은 곳에서 성벽을 쌓아올려 넓혀진 곳이다. 어떤 곳은 이보다 더 깊은곳에서 기초를 쌓아 올린 곳도 있었다. 그러나 기초석의 전체 깊이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시내의 좁은 길목을 평평하게 하려고 계곡의 상당한 부분을 메꾸었기 때문이다. 이성벽 기초석은 34규빗에 달하는 돌이 사용되었다. 아낌없는 투자와 백성들의 열정이 이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작업을 하게했으며, 보기에 끝이 없는 이런 작업을 인내를 통해서 이룩한 것이다.
2. 회랑과 바깥뜰
이와같은 기초부분에 잘 어울리게 상부구조도 잘 지어졌다. 전부 2줄로 되어 있는 회랑들은 높이가 25규빗이나 되는 기둥들로 받쳐져 있었는데 각 기둥은 흰 대리석 하나로 되어있고, 천장을 백향목으로 치장하였다. 이 기둥들은 자연적인 품위는 물론이고 반들반들하고 정교하게 접합되어 어떤 그림이나 조각으로장식하지 않고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회랑들의 너비는30규빗이며, 둘레는 안토니아 망대를 포함하여 6퍼얼롱이었다.밖에 있는 뜰(open court)은 가지각색의 돌들이 전체에 깔려 있어 아주 알록달록하다.
[두번째 뜰은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다]
안토니아 망대를 지나 성전의 2번째 뜰로 들어가면 두 번째 뜰이 3규빗 높이로[㈜ 약4,5피트:미도트에 나오는, ’10뼘’은 약2,5피트에 해당된다.] 돌 분리벽이[㈜ 히브리어 소렉(soreg), 미도트 ii : 3 상반부.] 둘려 있으며, 멋진 솜씨로 만들어졌음을 보게 된다. 두 번 째 뜰 입구에 같은 간격으로 석판(石板)이 세워져 있었는데, 어떤 것은 헬라어로, 어떤 것은 라틴어로’이방인들은 거룩한 곳(holy place)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정결의율례를 알리는 경고문이었다.[㈜ 이 석판들 중 하나는 1871년 M.Clermont-Canneau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다.] 성전의 두 번째 울타리를 친 곳을거룩한 곳이라고 불렀다. 이 성전의 두 번째 뜰은 첫 번째 뜰에서14계단을 올라가면 다다른다. 특히 이 지역은 정사각형으로 되어있으며 계단으로 인해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두 번째 뜰 밖에서 보는 벽의 높이는 40규빗이 되며 안쪽에서의 높이는 단지 25규빗이다. 두 번째 뜰은 높은 곳에 있고 일부는 언덕에 가려있기 때문에[㈜ 혹은(사본들에는) “솟아오른 대지위에 세워져 있는 계단”.]안쪽에서는 전체가 다 보이지 않는다. 14개의 계단 넘어계단과 벽사이에 10규빗의 평평한 공간이 있었다.[㈜ 위에 단(壇)있는 계단은 건물의 세측면으로 뻗어있다 : 서쪽 끝에는 계단이 없다(전쟁.5권. 1:5 (38)). 미도트 ii:3하반부에서는 단(壇)의 넓이가 10규빗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요세푸스의 14+5대신에 12계단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과 다른 불일치를 볼 때 요세푸스가 보다 진정한 저자임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다시 5개로 된 다른 계단들이 문까지 이르른다. 이 문들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4개씩 8개가 있으며, 동쪽에는 필수적으로 두 개의 문이 있다.[㈜ 즉 성전과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뜰과 비교해서. 두 개의 문은 내부 뜰로 들어가는 주요입구인 여인의 뜰(the Women;s Court)과는 별도로 동쪽과 서쪽 성벽의 중심부에 있었다.]
[여인의 뜰]
왜냐하면 동쪽에는 여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특별한 장소가있기 때문에 벽이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두 번째 문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이 문은 첫 번째 문과 반대로 나 있었다. 남쪽과 북쪽에는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여인의 뜰로 들어오는 문이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다른 문을 통해서 들어 올 수 없었고,단지 이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여인의 뜰은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이거나 타국에서 온 방문객들이거나 유대여성일 경우예배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서쪽 끝에는 성문이 없었고, 벽으로 되어 있었다. 성문들 사이에 지은 회랑들은 보물을 쌓아두는방[㈜ 보물창고는 전체 내부 뜰의 벽을 따라 있었고, 성전의 재산을 보관하는데 이용되었다(Smith, ‘Jerusalem’, ii:510주. Hastings, ‘D.B.’ iv:714a);보물창고는 기탁한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견고한 방이 있었을 것이다. 전쟁.6권. 5:2(282), 참).고대.19권. 6:1(294)에 나오는 ‘보물’. 한편 신약 성경(막 12:41, 등)에 나오는 “보물”은 여인의 뜰이 있던 구제와 봉헌을 위한 13개의 나팔 형태의 그릇을 의미한다.] 정면에 있는[㈜ 혹은 ‘~로부터 내부를 향하는.’] 벽 안쪽에 있었으며, 아주 아름답고 큰 기둥들로 받쳐져 있었다. 이 회랑들은 한겹으로 되어 있었으나 규모만 작을 뿐 다른 점은 아래뜰에 있는 회랑 못지않았다.
3. [성전문에 대하여]
성전문들[㈜ 10개의 문은 전쟁.5권. 5:2(198)에 나온다.] 가운데 9개는 완전히 금과 은으로 덮혀있으며, 문설주나 상인방(上引枋)도 역시 금과 은으로 덮혀 있었다. 그러나 성소의 바깥 쪽에 있는 문 하나는 고린도상 청동으로 되어져 있었으나 금과 은으로 도금된 문보다 훨씬 아름다왔다.[㈜ 미도트에 나오는 “니카노르의 문”(the gate of Nicanor)은 ‘고린도 식의 문’이었다.(ii:3; 모든 문들은 니카노르의 문을 제외하고는 금박이었다), 행3:2,10의 미문(美門)일 것이다. 요세푸스의 문장이 난해하지만 그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고린도식의 문이 여인들의 뜰의 서쪽 성벽에 있지 않고 동쪽 성벽에 있었음이 확실한 것 같다. 고린도의 청동은 유명하다.] 각 문에는 2개의 문짝이 있었고, 각 문짝들은 높이 30규빗, 너비 15규빗이었다. 입구 안쪽으로 양 면에 작은 탑같은 방들이[㈜ 혹은 ‘성문 방들'(gate-rooms)] 들어선현관이 있었으며, 각 방들은 길이와 너비가 30규빗이었고, 높이는 40규빗 이상이었고, 둘레가 12규빗인 2개의 기둥이 받치고있었다. 다른 문들의 크기는 모두 비슷했으나, 성소에 있는 문맞은 편 동쪽에 있는 여인의 뜰 쪽으로 나있는[㈜ 즉,여인들의 뜰의 서쪽 끝에서 성전에 이르는 동쪽 입구를 만듦.] 고린도 양식으로 된 문은[㈜ 즉,(고린도식 문)의 서쪽.] 훨씬 넓다. 높이가 50규빗으로 40개의 문짝을 갖춘화려한 장식으로 된 문이며, 커다란 금 은의 보석들이 박힌 그런문이었다. 9개의 문들은 티베리우스(Tiberius)아버지인 알렉산더(Alexander)가[㈜ 알렉산드리아의 군대장관이며 철학자 필로(Philo)의 형제이다. 고대.18권. 8:1,(259);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는 로마군대에서 참모 장교였다. 전쟁.2권. 11:6(220), 5권. 1:6(45).] 보석을 박은 것이다. 15개의 계단은 여인의뜰에서 더 큰 문 즉 고린도산 청동문까지 이어져 있었고, 이 계단들은 다른 문들에 있는 5개로 된 각 계단보다 계단높이가 낮았다.[㈜ 전쟁. 5권. 5:2(198).]
4. [성전 본당에 대하여]
성스러운 건물 그 자체인 성전본당(holy temple)은 가운데 위치해 있었고, 12개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정면은[㈜ 커다란 입구나 현관으로 여기면 된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800규빗이었다.[㈜ 미도트(Middoth) iv : 6, 네로시대에 아그립바(Agrippa)왕은 높이가 120규빗에 달하게 준비를 갖추었지만 그 공사는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전쟁.5권. 1:5(36)이하. 참). 고대.15권. 11:3(391).] 그러나 건물 뒤는 40규빗 더 좁았다. 왜냐하면 정면에는 각각 옆으로 20규빗 어깨모양으로 더 퍼졌기 때문이다.[㈜ 미도트. iv : 7c; “성전은 사자와 같이 뒤쪽이 좁고 앞쪽이 넓다”] 첫 번째 문은 높이 70규빗, 너비 25규빗이며 문짝이 달리지 않은 문으로 하늘의 빈 공간을 상징하는의미에서 문짝이 없었다. 전체 정면은 금으로 덮혀 있었고, 정문을 지나면 첫 번째로 보이는 것은 전체가 금으로 반짝이는 안쪽문의 둘레와 그 웅장함을 볼 수 있다. 성전본당은 2개의 방으로나누어져 있는데,[㈜ divstego”은 문맥에서 볼 때 ‘한바닥에 두 개의 방이 있는’을 의미한다. 즉 성소와 지성소(至聖所)이다. 전쟁.211에 나오는(다음 각주d)것 같이 ‘이충에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방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 보인다. 이 방은 길이가 50규빗, 너비가 20규빗, 높이가 90규빗에 달하는 방이었다. 성전 안쪽으로 열린 문은 앞서 언급했듯이[㈜ 전쟁.5권. 5:4(208).] 완전히 금으로 도금되어졌고, 그 주위의 벽전체도 역시 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문 위에는 금으로 된 포도가[㈜ 참).고대.15권. 11:3(395)타키투스(Tacitus), ‘박물학’. v:5은 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vitis aurea temple reperta)그리고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Father Liver(박쿠)의 숭배자들이라고 추론하였음을 암시한다.] 사람 키만큼 큰 포도송이들에 달려 있었다.[㈜ 사본에서 추가하기를 ‘성전은 이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깥보다 안쪽이 낮게 보인다.’ 이러한 부적절한 삽입구가 문장에 들어가 있으며, 이전에 사용되었던 divstego”와는 다른 의미를 주며, 그 건물의 내부에 대하여 너무 이론 언급을 하고 있다. 이것에 관한 묘사는 전쟁.5권. 5:5(215)에서만 기술하고 있다. 두 개의 층에 관한 언급은 전쟁.5권. 5:5(221)에 있다. 그절을 전쟁. 5권. 5:4(209)의 개시어에 대한 설명으로 취했다. 저자 자신 혹은 sunergov”(동역자)가 수정했을 것이다 ; 이는 본문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문짝 앞에는 바벨론 산 융단(Babylonian tapestry)으로 된 같은 길이의 베일이 쳐있었는데, 희고 푸르고 가늘고 섬세한 베실과 주홍색과 자주색실로 짠융단으로 놀랄 정도의 훌륭한 직조기술로 되어 있었다. 갖가지 색깔의 실로 짠 것은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그것은 우주를 형상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색은 불을 상징하고, 가늘고 섬세한 베실은 땅을, 푸른색은 하늘을 그리고 자주색은 바다를 상징한 것이다. 이 두가지가 색깔로 대조가 되며, 가는 베실과자주색 실은 그 출처에서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가는 베실과 자주색 실은 각각 땅과 바다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상징한다. 이 바벨론산 융단 위에 황도대(黃道帶 : 12궁(宮)일람도(Zodiac))의 상징물을 제외한 하늘의 온갖 파노라마가 그려져 있었다.
5. [성소에 대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의 커다란 마루가 있다. 이 마루는 높이와 길이가 각각 60규빗이며, 너비가 20규빗이다. 그런데 60규빗의 길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40규빗까지이며 3개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들어있는 곳이다. 즉 촛대(lampstand)와 진설병 상(table), 분향단(altat ofIncense)의 3가지 물품들이 있었다. 7개의 등잔(촛대에 7가지등잔이 달여 있었다)은 7개의 혹성을 나타냈다. 진설병 상위에 놓인 12개의 진설병은 12궁과 일년의 순환을 의미했다. 분향단은 바다와 육지, 사막에서 사람들이 각처에서 가져 온 13개의 향들이[㈜ 탈무드(Talmud)(성서백과. ii:2167에서 인용된 것처럼)과 동일함. 출30:34에 기록된 4가지 요소(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향품)에 랍비 시대에는 9가지 요소를 더 첨가하는데, 연기를 수직적으로 오르게 하는 성질을 가진 물질로 즉 몰약, 계피, 감송향, 사프란, 육두구, 육계, 소금, 그리고 향료 식물이다. 7가지 요소의 방향제는 쥬빌리(Jebilees). 16:24에 나온다. 참).집회서(Ecclus.)24:15.] 분향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필로(Philo)에게 있어서 모세의 4가지 방향 성분은 4가지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Quis rer. div. heres’, 197(40). 요세푸스는 그밖의 모든 곳에서 성막과 제사장 의복에 관하여 유사한 우주선 해석(전쟁.5권. 5:7(231))을 하고 있다.]
[지성소]
가장 안쪽은 20규빗으로 바깥 부분과 같은 방식으로 휘장이드리워져 있었다. 이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은 지성소(Hdy of Holy)[㈜ 이것에 대한 히브리 명칭은 debir(‘제일 뒤쪽의 성소’)혹은 지성소였다.]라 불리는 곳으로 누구나 들어가거나, 침입하거나,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제사장들의 방]
성전본당 아래 쪽 주위에는 3층으로 된 많은 방들이 있었는데방들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이 방들은 출입구가 양쪽으로나 있었다. 성의 위쪽 부분에는 이런 방들이 없었다. 위쪽 부분은 아래쪽 부분보다 더 좁았으나 높이는 40규빗이 더 높았다.40규빗에 60규빗되는 마루를 합치면 전체의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6. [성전 외부에 대하여]
성전의 외부는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사면이 거대한 금판으로 덮어져 있었다. 태양이 뜨면 반짝반짝 멋지게 반사를 하고 있어 눈부셔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이 멀리서 보면 그성전 외부는 마치 눈덮힌 산과 같았다. 왜냐하면 금으로 덮혀 있지 않은 부분은 모두 완전히 흰색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꼭대기에는 뾰족한 금 못이[㈜ 미도트 iv:6에서는 높이가 1규빗인 허수아비(scare-crow)를 언급하고 있다.] 박혀 있었는데 이것은 새들이지붕에 앉아서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엄청난 길이의 이러한 블록(block)은 예외적이었음에 틀립없다;고대,15권. 11:3(392)에서는 블록의 치수를 25규빗(길이)x8규빗(높이)x12규빗(넓이)으로 언급하고 있다. 참). 제자들의 외침인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니이까!’ 막13:1] 성전 건축에 사용된 돌은 길이가 45규빗, 높이가 5규빗, 너비가 6규빗이되는 것들도 있었다.
[번제단]
성전 앞에는 높이 15규빗, 너비와 길이는 5규빗 정도의 제단이 있었는데, 모양이 6면체였고, 각 귀퉁이에 뿔같은 돌출부분이 있었다.[㈜ 미도트 iii : la에서도 제단을 모퉁이에 뿔나팔이 있는 광장(square)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바닥은 32평방 규빗이고, 가장 높은 부분이 24 평방 규빗이며, 그리고 높이는 8 규빗이다 ; 이것은 오래되고 보다 작은 제단에 해방되는 치수이다.] 그리고 제단은 남쪽으로 아주 완만한 경사길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미도트 iii : 3b(치수를 증가함).] 이 제단은 전혀 철연장이 사용되지 않았고, 철로 쳐서 만들 수도 없는 구조물이었다.[㈜ 미도트 iii : 4a, b(어떤 철로된 도구도 이것을 다듬는데 사용되지 않았다)에는 기이한 설명 즉 “왜냐하면 철은 인간의 날들을 짧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으며, 제단은 인간의 날들을 길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성전 본당과 제단 둘레에는 낮은 돌로 된 분리벽(parapet)이 있었는데,[㈜ 미도트. ii : 7b에 언급되었음.] 높이가 1규빗 남짓 되었고, 제사장과 일반인들을 구분하는 벽으로우아했다. 유대인들은 임질(gonorrhoea)이나 문둥병(Leprosy)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도시 밖으로 내쫓아 버렸으며, 월경 중인여성들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월경이 끝났을 때에도 앞에서 언급한 경계지역은 지나갈 수 없었다.[㈜ 전쟁.5권. 5:2(199).] 남자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안 뜰을 들어갈 수 없었고, 제사장도 완전히 정결예식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들어갈 수 없었다.[㈜ 참). 아피.2권 8(108)이하.]
7. [제사장에 대하여]
제사장의 계보이지만 어떤 신체적인 결함으로 제사장의 직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은 분리벽 안에서는 결함이 없는 제사장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들의 분깃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평상복을 입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는 제사장만이 성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몸에 결함이 없는 제사장들은 가는 세마포옷을 입고, 제단과 성전 본당에 갈 수 있었으며, 제사 의식을 존중했기 때문에 술은 많이 마시는 것은 자제했다. 왜냐하면 술 때문에 혹시 제사장 직무수행을 할 때 어떤 규례를 어겨 죄를 짓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예복]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이 같이 임무수행을 했는데, 매번 그런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새달(월삭,(月朔)과 전체 유대백성들이 지키던 국경일이나 명절 때에만 함께 임무수행을 했다. 대제사장은 임무수행을 할 때,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덮은 고의(袴衣,breeche)를[㈜ “세마포 고의”(Line breeches), 출23:42.]입었다.[㈜ 출28장에 근거한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 의복의 완전한 묘사는 고대.3권. 7:5-11(151-178)에 있다. 집회서 45:7-12를 참고하라.] 고의는 세마포로 된 내의이며, 그 위에 발까지 닿는 푸른 의복을[㈜ “푸른색의 예복 받침 겉옷”, 출28:31-35, 고대. 3권. 7:7,8(159-161).]입었고, 그 옷은 솔기없는 통으로 되어 있고, 장식술이 있었다. 장식술에는 금종과 석류무늬의 장식(Pomegranates)이 번갈아가며 달려 있었는데, 종은 천둥을 상징하는 것이고, 석류무늬 장식은 번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의 옷은 가슴에는 수놓인 흉배(sash)를[㈜ “자수업자(刺繡業者)의 작품인 허리띠”, 출 28:39. 고대.3권. 7:4(159).] 붙였는데, 이 가슴장식은 금색, 자주색, 주홍색, 가는 베실과 푸른 색의 알록달록한 색으로 만들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쟁.5권. 5:4(212)이하.] 성전본당에 있던 융단휘장과 같은 색이었다. 대제사장의 에봇(ephod)도 같은 재료를 혼합해서 만든 것으로 특히 금색이 많이 더 들어갔다.[㈜ 출 28:6이하, 고대.3권. 7:5(162)이하 본문과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에봇을 번역한 헬라어 Epomis는 어깨끈으로 붙여진 여자 웃옷의 상부를 의미하는 ‘망또’이다.] 에봇은 형태상으로는 보통 갑옷과 같았고, 2개의 금 단추로 단단히 동여매었고,[㈜ 즉 ‘어깨에’.] 아주 크고 아름다운 붉은 줄무늬 마노(瑪瑙, sar-donyx)를[㈜ 고대.3권. 7:5(165). 출28:9에서 언급된 보석은 확실치 않으며, 영역 성경 R.V.에서는 ‘마노'(onyx)로 난외주에는 ‘녹주석'(beryl)으로 되어있으며, 70인역에서는 ‘에머랄드’이다.] 박았으며, 그 위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즉, 정면에.] 다른 면에는 12개의 보석들이 박혀 있었는데,[㈜ 출 28:17-20, 고대.3권. 7:5(168).] 각각 3개씩 4줄로 되어 있었다. 즉 홍보석(sardius)[㈜ 고대.3권. 7:5(168). “붉은 줄무늬 있는 마노”.], 황옥(topaz), 녹주옥(emerald)이 한 줄을 이루었고, 석류석(carbuncle), 벽옥(jas-per), 남보석(sapphire)이 또 한 줄을 이루었고, 백마노(aga-te), 자수정(amethyst), 호박(jacinth)이 한 줄을 이루었으며,호마노(onyx), 녹보석(beryl) 귀강석(chrysolite)이[㈜ 고대. 3권. 7:5(168).] 한 줄을 이루었다. 이 보석 각각 하나하나 위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제사장의 모자는 가는 베로 된 머리장식이 있었는데,[㈜ “세마포 관” 혹은 (영역 성경 R.V. 난외주) ‘비단으로 된 터어번,’ 출 28:37, 39 ; 머리 장식물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컵과 같은 꽃으로 비교된 고대. 3권. 7:6(172-178)에 있다.] 그것은 금으로 된 관을 푸른 색으로 둘러가면서 장식한 모자로 4개의 자음으로 거룩한 글자(sacred letters)가 쓰여져 있다.[㈜ 즉, 4자(字語) YHVH. 이것이 비문이라는 것과 출 28:36에 나오는 구절이 ‘야훼께 성결'(Holyto the Lord)이 아니라, ‘성스러운 이름 야훼(Jahve)’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 연구지(Journal of Theol. Studies), xxvi : 72, 180에 있는 J.E.Hogg과 F.C.Burkitt의 아론(Aron)의 머리 장식물에 관한 두편의 원고에 나타나 있다. 요세푸스가 4개의 모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첫 번째 모음과 세 번째 모음은 용법상 자음이지만 아마도 ‘본래 모음’이었을 것이다(게세니우스, 히브리어 문법, 코울리 앞에서 설명한 이런 복장은 대제사장이 평상시 입는 옷이 아니라, 단지 지성소(inner most sanctuary)에 들어갈 때만 착용했던 복장이다. 즉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 혼자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 입던 차림새인데, 그날이 바로 유대인의 규례에 따라 금식을 하는 날이다.[㈜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 ; 레위기 16장.] 예루살렘과 성전 및 관습과 율법에 대해서는 후에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 요세푸스가 저작하기로 예정했던 것이 확실한 ‘관습과 원인에 관하여’ 는 고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8. [헤롯이 만든 안토니아 망대에 대하여]
안토니아 망대는 서쪽과 북쪽 회랑과 성전의 첫 번 째 뜰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었다. 안토니아 망대는 50규빗 높이의 바위 위에 세워졌으며, 사방이 가파른 절벽이었다. 이것은 헤롯왕이 만든것으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축조된 오랜 성(城,ba’ri” ) 의 터 위에 세워졌음. 고대. 18권. 4:3(91). 참).15권. 11:4(403),전쟁.1권 3:3(75). 마르크 안토니(Mark Antony)의 이름을 따라 명명됨. 전쟁.1권. 21:1(401) : 행 21:34 나오는 성(개역성경에서는 영문<營門>으로 되어있음-역자주)이다.] 헤롯의 타고난 위엄이 나타나고 있다.[㈜ 같은 구절이 전쟁.1권(408)(가이사랴)의)에도 나온다.] 바위가 바닥에서부터 부드러운 판석(板石)으로 덮혀져 있는데, 이것은 장식용일 뿐 아니라 그 위로 올라 오거나 내려가는 자들을 미끄러지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건물 정면에는 3규빗 높이의 벽이 하나 있으며, 이 벽 뒤에 안토니아 망대는 높이 40규빗의 장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망대의 안은 그 웅대함이나 설비에 있어 궁전과 비슷했으며, 회랑과 목욕탕, 여러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넓은 안뜰을 포함한 각종 목적과 용도에 맞은 많은 방들이 있었다. 따라서 모든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이 망대는 마치 하나의 시를 형성하는 듯했고, 그 장엄함에 있어서는 궁전과같았다.[㈜ 전쟁.1권(421) (헤로디온의)을 참고.] 건물전체의 전반적인 외관은 망대의 형태였으나, 모퉁이에 4개의 다른 망대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 중 3개의 망대들은 높이 50규빗이며, 반면 남동쪽 모퉁이에는 높이가 70규빗이나 되는 망대가 있다. 그래서 안토니아 망대는 성전의 전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성전의 회랑들이 만나는 지점에 안토니아 망대와 양쪽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성 바울(Paul)이 체포되었을 때, 유대인들에게 한 연설문에서, 행 21:40] 그곳이 로마수비대의 통로였다. 왜냐하면 로마군 보병대가 그곳에 계속해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유대인의 명절 때 백성을 감시하고 반역의 움직임을 억압하기 위해 회랑 주위에 무장을 하고 지키고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예루살렘의 요새라 한다면 안토니아 망대는 성전을 지키는 요새이며, 이 안토니아 망대의 점령가들은 성전과 예루살렘과 안토니아 망대의 모든 경비를 맡았다. 게다가 상부도시는 그 나름대로의 요새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헤롯의 궁(Herod’s palace)이다.[㈜ 위의 절에서 서술됨. 전쟁. 5권. 4:4(176)이하를 참고.] 벳세다(Bezetha) 언덕은 앞서언급했듯이[㈜ 전쟁.5권. 4:2(149).] 안토니아 망대와 떨어져 있었다.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벳세다 언덕에 새로운 도시(new town)의 일부가 세워져 있으며, 북쪽에는 성전을 관망하는데 유일한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전과 성벽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은 후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 정도의 언급으로 충분할 것 같다.[㈜ 전쟁. 5권. 5:7(237)의 각주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