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권 제 10장 또한 많은 시카리파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도망했고 거기서 어떤 위험을 당했으며 그로 인해 오니아스가 전에 세웠던 성전이 파괴당한 것에 대하여

 


제 10 장



 또한 많은 시카리파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도망했고 거기서 어떤 위험을 당했으며 그로 인해 오니아스가 전에 세웠던 성전이 파괴당한 것에 대하여



 1. 전 유대가 정복된 것에 관하여



 이렇게 하여 마사다 요새를 함락시킨 로마 지휘관 실바는 마사다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가이사랴(Caesarea)로 출발하였다. 유대인과 오랫동안 전쟁하여 전지역을 점령했으므로 유대 전지역에는 더 이상 싸워야 할 적군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같이 오래 계속 되었던 전쟁으로 인해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조차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전쟁의 여파로 혼란과 무질서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기 유대와의 전쟁이 종결된 후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몰살당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애굽으로 도주하는 시카리파의 운명]



 왜냐하면 유대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용케 도망에 성공할 수 있었던 시카리파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이러한 도피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또 다시 반란하려는 음모를 꾸미며 자신들을 맞아준 많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로마군이 유대인들 보다 더 나을 것도 없으며, 하느님을 유대인들의 유일신으로 경외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시카리파사람들은 일부 유대인 유력인사들이 반대하자 그들을 살해하였다. 시카리파는 다른 나머지 유대인들에게는 반역을 일으킬 것을 계속 권유하며 압력을 가했다. 시카리파의 이러한 무모한 열정을 보고 원로 의회(the coundcil of elders)의[㈜ 아구스도 시대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일한 eqnavrch\”(총독)는 몇 명의 a[rconte\”(행정관들)가 주재하는 gerousvia(장로들의 의회)에 대해 대체되었음을 Philo(\’In Flaccum\’ 10,§74( Cohn)로부터 알 수 있다. Schurer, \’G.J.V.\’ iii.41.] 지도자들은 시카리파의 처사를 그대로 간과한다면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대인들의 총회를 소집하였다. 원로 의회 지도자들은전 유대인들에게 시카리파의 미친 행동들을 지적하면서 유대인들이 당하는 모든 문제와 어려움은 바로 시카리파의 책임임을 증명해 주었다. 원로 의회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카리파는 로마군에게 발각되면 즉시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도피 생활도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자신들이 받아야 될 재난과, 죄와는 아무 관계 없는 우리 유대인들을 관련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시카리파 때문에 함께 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시카리파 사람들을 로마군에게 넘겨 주어서 그들과 화평한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원로 의원들의 이러한 충고를 듣고 유대인들은 그들이 심각한위험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맹렬하게 시카리파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체포하였다. 이렇게 하여순식간에 600명의 시카리파가 체포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애굽에서 깊숙이 들어간 더베(Thebes)로 도망친 시카리파들도 얼마 못돼 모두 붙잡혔으며 알렉산드리아로 압송되어졌다. 그런데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체포된 시카리파가 보여준 무서운 끈기였다. 이것은 필사적인 광기가 낳은 아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카리파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가이사를 주(主)라고 인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시카리파는 가이사를 주(主)로 인정하라는 단 한가지 요구에 응하지 않고 온갖 형태의 고문과 몸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단 한 사람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가이사를 주로 시인하려는 흉내 조차도 내지 않았다. 모든 시카리파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온갖 압박 가운데에서도 의기양양 하였으며 갖가지 고문과 불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끈기있게 버텨냈으며, 그들의 영혼은 이러한 고통과 고문속에서 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는 이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철부지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아이들가운데 단 한명도 가이사를 주로 시인하게 만들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육체적으로 연약한 데도 이렇게까지 강인한 용기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애굽에 있는 오니아스(Onias)의 유대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하여



 한편 그 당시 루푸스(Lupus)라는[㈜ 확인되지 않음 : 루틸리우스 루푸스(M.Rutilius Lupus :같은 가계로 추측된다)는 주후 116년에 트라얀(Trajan)의 통치시 후기유대 전쟁발발 때 애굽의 로마 총독이었다.] 사람이 알렉산드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가이사에게 이같은 소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가이사는 유대인들의 계속적인 반란의 음모를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라 보고를 받자, 유대인들이 다시 힘을 모아 반역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하여 루푸스에게 오니아스(Onias)라고 부르는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 이 성전은 요세푸스 저서에 종종 언급된다 : 전쟁. 1권. 서문, 9(23), 고대. 12권. 10:1(389)이하, 13권. 3:1(62)이하, 10:4(285), 20권. 10:3(236)이하.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는 (고대. 13권. 3:2(70)) 텔 엘 예후디예(Tell-디 Yehudiyy도)로 규정되었다. 이곳은 델타(Delta)지역의 서쪽 끝에 있던 멤피스(Memphis)의 남동쪽에 있으며 발굴로 인해 유대인 성전의 유물들이 드러났다(Flinders Petrie, \’Hyksos and Israelite cities\’;사19:19에 대해 G.B.Gray가 인용한 것임).]을 파괴하라고 지시하였다.



[성전의 기원]



 오니아스는 애굽에 있는 지역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 아래서오니아스라 명명하게 되었고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예루살렘에있던 대제사장들 가운데 한 명인 시몬(Simon)의 아들인 오니아스(Onias)가, 수리아(Syria)왕 안티오쿠스(Antiohus)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유대인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을 당시에 안티오쿠스를 피해 알렉산드리아로 왔었다. 이에 톨레미(Ptolemy)는[㈜ 톨레미 필로메토르(Ptolemy Philometor), 주전. 182-146년.] 안티오쿠스를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극진히 맞아 주었다. 오니아스는 톨레미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준다면 유대국을 그의 지지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였다. 톨레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에 오니아스는 애굽의 한 지역에 성전을 세워서 그의 조상들의 풍습에 따라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오니아스는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에 대항하여 더욱더 사력을 다해 싸울것이며 톨레미에 대해서는 더욱 더 호감있게 대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아울러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준 것에 대해 톨레미의 지지세력이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3. 오니아스가 세운 성전과 요새



 톨레미는 이 말을 듣자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는 지역에있는 멤피스(Memphis)에서 180퍼얼롱 떨어진 한 장소를 오니아스에게 주었다. 오니아스는 이 장소에 커다란 돌로 된 높이 60규빗의 성전과 요새를 세웠다. 그런데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는 달랐으며[㈜ 여기서 요세푸스는 오니아스(Onias)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 닮았다고 하는 그의 이전의 진술을 수정하였다. 전쟁. 1권. 1:1(33) (고대. 12권. 9:7(388), 13권. 3:1(63), 20권. 10:3(236)). 추측컨대 아이슬러(Dr. Eisler)가 제안한 것처럼 성전 파괴에 관하여 황제(the Emperor)와 총독 루푸스(Lupus)와 파울리누스(Paulinus)사이에 편지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 이런 편지왕래로부터 요세푸스는 여기에 주어진 자세한 내용을 알았다. 전쟁사 7권 끝은 후기 부록인 것으로 보인다.] 망대와 닮은 모습의 성전이었다. 그러나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촛대(Lampstnad)의[㈜ 예루살렘 등대 또는 \”촛대\”의 설명에 관해서는 전쟁. 7권. 5;5(148)를 보라.] 모양만 제외하고는 다른 것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것과 비슷한 물건들을 만들어 성전을 장식하였다. 촛대의 경우, 오니아스는 등대(stand)를 만드는 대신금으로 등을 하나 만들어 금사슬에 매달게 해서 밝은 빛이 비취게 하였다. 성전의 경계 부분은 구운 벽돌로 성벽을 만들어 완전히 에워싸게 하였으며 성전 문은 돌로 만들었다. 게다가 톨레미는 오니아스에게 광대한 땅을 할당해 주어서 제사장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하고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에 풍부하게 공급하기위한 수입의 근원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런데 오니아스는 이모든 것들을 순수한 동기에 의해 하지 않았으며 그의 목적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경쟁을 하려는 것이었다. 오니아스는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를 쫓아낸 것에 대해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오니아스는 이곳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많은 유대인들을 이곳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었던 것이다.게다가 600년[㈜ 이사야 예언의 기간은 실제로 약 주전 740-700이었다.] 전에 이사야(Esaias)라는 자가 한 유대인이 애굽에 이러한 성전을 건축할 것을 미리 예언한 바가 있었다.[㈜ 사19:18 이하와 그리고 특별히 구절은(부분적으로 고대. 13권. 3:1(68)에 인용) \”그날에 애굽의 땅 가운데서 야훼에게 향한 제단이 있을 것이다\” 이 본문은 이사야안에 후에 삽입된 것으로 현대 비평가들은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오니아스가 건축한 성전의 기원이다.



4. 루푸스와 파울리누스가 성전 보물을 탈취함



 알렉산드리아의 총독 루푸스(Lupus)는 가이사의 편지를 받고 성전으로 가서 봉헌된 헌물들의 일부를 빼낸 후에 성전 건물을 폐쇄하였다. 그후 오래지 않아 루푸스가 죽고 파울리누스(Paulinus)가 그의 후임으로 오게 되었다[주후 73년].

 파울리누스는 성전에 있던 보물들을 완전히 탈취했으며 제사장들에게 성전안에 있는 모든 물품들을 가져오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또한 그는 성전에 제사드리러 이곳으로 접근하는 것 조차 금했으며, 성문을 닫고 도저히 접근을하지 못하게 하여, 그곳에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성전이 건축되어서부터 폐쇄될 때 까지의 기간은 343년간 이었다.[㈜ 이 수치는 추측컨대 잘못된 것이다 ; 243년간, 즉 약 주전 170년-주후73년은 아주 근접하게 바른 것이다. 아이슬러 (Dr.Eisler)는 곧 출간 예정인 책에서 본문에 있는 수치에 대하여 재간있게 설명하였다. \”요세푸스는 년수 계산에서 흔히 실수를 많이 했다. 요세푸스는 오니아스(Onias)의 성전이…343(=7x7x7)년 동안 혹은 일곱 희년동안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했다. 이 신비한 숫자는 요세푸스가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와 예루살렘에 있던 두 개의 유대성전 파괴를(유일신 경배의)신명기적 율법에 대한 불경건한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았다. 다니엘의 70년 주간에 대한 것과 유사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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