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들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말로, 부주의한 행동으로 수많은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5,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순절 첫 금요일에 요한은 유다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에 가서 미사도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도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말했습니다. “야! 네가 뭔데 성당 가자 말자 하냐? 내 마음이 움직여야 성당도 가는 것 아니겠어! 너나 잘해. 그리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신앙을 권면하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유다는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니 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요한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이루어진 금요 봉사자 교육에 참례해서 교육을 받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봉사자 교육도 받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에이~ 바보야! 집에서 따뜻한 아름 목에 누워서 TV를 보면 얼마나 좋니!”하면서 요한을 멸시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의 삶을 멸시한다면 그 신앙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그에게 준비된 것은 상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또 절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았더니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감사헌금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한에게 “이 멍청아! 그 돈 있으면 명품 가방도 살 수 있고, 제주도로 3박 4일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니!”라고 요한의 마음을 매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인뿐만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웃에 대한 외부적인 범죄, 곧 살인, 약탈, 상해, 구타 등을 금지했을 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등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율법은 당시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 백성들이 함께 살기 위하여 외적인 행위를 규제하며, 공동체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머지 것들은 각자의 양심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점차로 마비되어 가고 실정법이 금지하지 않으면 범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의 계명은 완성되었습니다.
“뭐~ 이런 것 쯤이야~”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죄들이 모여서 큰 죄를 이루고,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작은 선행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규정들을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지켜 나갈 때, 어느 순간 의로움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지키는 것을 떠나서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형식적으로 살아가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멸망을 확실하게 예약하는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그렇고, 정결례 규정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가장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지키고, 다른 이들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들이 참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지켜야 하는지, 그것을 지킴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은 무엇인지도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도 턱걸이라도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보다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소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범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벌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것을 범하는 것과, 또 그것을 범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모르는 사람이 실수로 범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단식과 금육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신앙생활을 격려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기도하기도 힘들뿐더러 단식과 금육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평일미사나 주일미사에 참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덕이 부족하다면 서로가 큰 소리를 내게 될 것이고,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작은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살아간다면, 그래서 결국 말만 하게 된다면 그도 안 지키게 되고, 남도 그 모습을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마음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덕을 실천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있어서 재산의 일부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들을 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 어떤 재물로도 사고 팔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성들은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당연하게 이혼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는데 간음, 풍기문란, 음식을 태우는 것, 계명을 어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따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무서워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아래에 있는 아내에게 이혼장을 던졌다고도 합니다.
모세는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마태5,31)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그 여성들이 다른 남성과 혼인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나름대로 여성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성들은 악용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금지하십니다. 이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5,32)라고 가르치십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동등한 존재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 둘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가 되었으면 결코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배우자에게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서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혼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둘을 한 몸으로 엮여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너무 쉽게 이혼하는 신앙인들,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배우자를 더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내가 어떻게 배우자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귀하게 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자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분노하거나 멸시, 매도하지 말라.
신앙인들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말로, 부주의한 행동으로 수많은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5,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순절 첫 금요일에 요한은 유다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에 가서 미사도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도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말했습니다. “야! 네가 뭔데 성당 가자 말자 하냐? 내 마음이 움직여야 성당도 가는 것 아니겠어! 너나 잘해. 그리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신앙을 권면하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유다는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니 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요한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이루어진 금요 봉사자 교육에 참례해서 교육을 받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봉사자 교육도 받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에이~ 바보야! 집에서 따뜻한 아름 목에 누워서 TV를 보면 얼마나 좋니!”하면서 요한을 멸시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의 삶을 멸시한다면 그 신앙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그에게 준비된 것은 상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또 절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았더니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감사헌금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한에게 “이 멍청아! 그 돈 있으면 명품 가방도 살 수 있고, 제주도로 3박 4일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니!”라고 요한의 마음을 매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인뿐만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웃에 대한 외부적인 범죄, 곧 살인, 약탈, 상해, 구타 등을 금지했을 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등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율법은 당시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 백성들이 함께 살기 위하여 외적인 행위를 규제하며, 공동체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머지 것들은 각자의 양심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점차로 마비되어 가고 실정법이 금지하지 않으면 범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의 계명은 완성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뭐~ 이런 것 쯤이야~”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죄들이 모여서 큰 죄를 이루고,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작은 선행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규정들을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지켜 나갈 때, 어느 순간 의로움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지키는 것을 떠나서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형식적으로 살아가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멸망을 확실하게 예약하는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그렇고, 정결례 규정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가장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지키고, 다른 이들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들이 참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지켜야 하는지, 그것을 지킴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은 무엇인지도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도 턱걸이라도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보다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소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범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벌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것을 범하는 것과, 또 그것을 범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모르는 사람이 실수로 범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단식과 금육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신앙생활을 격려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기도하기도 힘들뿐더러 단식과 금육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평일미사나 주일미사에 참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덕이 부족하다면 서로가 큰 소리를 내게 될 것이고,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작은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살아간다면, 그래서 결국 말만 하게 된다면 그도 안 지키게 되고, 남도 그 모습을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마음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덕을 실천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혼하지 말라
예수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있어서 재산의 일부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들을 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 어떤 재물로도 사고 팔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성들은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당연하게 이혼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는데 간음, 풍기문란, 음식을 태우는 것, 계명을 어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따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무서워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아래에 있는 아내에게 이혼장을 던졌다고도 합니다.
모세는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마태5,31)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그 여성들이 다른 남성과 혼인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나름대로 여성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성들은 악용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금지하십니다. 이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5,32)라고 가르치십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동등한 존재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 둘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가 되었으면 결코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배우자에게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서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혼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둘을 한 몸으로 엮여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너무 쉽게 이혼하는 신앙인들,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배우자를 더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내가 어떻게 배우자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귀하게 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자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