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겸손한 삶”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성당 일에 간섭하기를 너무 좋아했고, 비신자들에게는 마치 자신이 성당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는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이 단체, 저 단체, 이 모임, 저 모임을 거치면서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은 가슴 조이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안아 주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그 모습이 안타까워 다양한 방법으로 그 자매에게 조언을 했지만, 그 조언이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이고, 다른 형제자매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바꾸지 못한 그녀가 바뀌게 된 것은 그녀의 남편 덕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비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형제가 성당에 나와서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 뒤에 있게 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하게 했고, 나서는 일이 아니라 뒤에서 따라주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그렇게 언제나 성당에서는 남편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마침내 그 자매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저것 간섭하는 일이 아니라 이것저것 말없이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자매는 신부님께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이 변화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도 아침을 먹으면서 성당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얼굴빛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성당 갔다가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갔더니 거실 전체가 거울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울에는 가슴을 찌르는 말을 큰 글씨로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과 살고 싶으면 매일 거울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언제나 그녀의 눈치를 보던 남편이 갑자기 변한 터라 그 자매도 놀랐습니다.

“나랑 살고 싶으면 매일 거울을 봐.”

그 자매도 “나랄 살고 싶으면 이 거울을 떼라.”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더 강하게 나왔습니다.

“당신 천당 가고 싶으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거야. 나도 바꿀 것이니까 당신도 삶의 방향을 바꿔.”


거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만 생각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아무것도 아니면서 잘난 체만 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사람의 모습이 거울 속에 있다. 바로 너다.”


결국 그 자매의 모습을 참다못한 남편이 그녀의 모습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기에 참고 살았지만, 공동체에게 잘못하는 자신의 배우자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아내가 따라서 할 수 있도록 몇 년을 노력한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만으로는 바뀌지 않기에, 몇 년이라는 시간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삶을 바꿨던 것입니다.


그 자매는 지금도 기도를 하면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을 감사하고, 그동안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보속을 오늘도 성실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보다 잘하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려 하고, 더 나아가 비난이나 비방까지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국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자기 자신마저 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을 대해야 합니다. 교만은 나의 부족함을 드러나게 하고, 이기심은 질투에 눈이 멀게 하며, 허영심은 멸망을 끌어당김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이들은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상처받아서 성당에 안 나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 내 모습을 알고, 내 모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1. 성지주일은 어떤 주일입니까?

①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호하고,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 놓으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한 날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② 성지주일에는 편백나무 가지로 성지가지를 만들어 예수님을 환호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그 가지를 축성하여 집에 가지고가 십자고상 뒤에 걸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재의 수요일 때 태워서 재를 내어 이마에 바르며 회개의 삶을 다짐합니다.

③ 성지주일은 부활을 준비하는 막바지 가장 중요한 성주간의 첫 머리로서, 성지주일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수난의 장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2. 성지가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① 성지가지는 보통 종려나무나 올리브나무의 가지로 승리를 상징합니다. 성지가지는 로마 박해 때의 많은 성인들을 상징하여 로마 지하묘지(카타콤바)내의 순교자들의 무덤을 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② 성지가지는 최후 심판을 묘사함에 있어서 최후 승리를 상징합니다(묵시7,9).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백성들은 승리와 존경의 표시로 겉옷을 길 위에 깔고 성기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③ 우리나라에서는 종려나무나 올리브나무가 없기 때문에 사철 푸른 나뭇가지로, 편백나무 가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사순시기, 사순시기(주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올바른 단식(마태6,16-18)

    구약성경에서 명한 단식일은 일 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의 날 뿐입니다(레위 23,26-32; 16,29). 그 밖에 온 나라에 불행이 닥치면(요나서 참조) 거국적으로 단식하는 수가 더러 있었습니다. 공적으로 단식하는 날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목욕하지도 화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단식은 열심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하는 단식을 의미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개인적으로 매주 두 차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는데, 단식을 하는 것이 자랑하거나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한다면 차라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6,16)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의 자세를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17-18)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유다인들 중에는 24시간 음식을 먹지 않고, 옷도 아무렇게나 걸치고, 면회나 인사까지도 사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수도 하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창백하고 슬픈 얼굴로 나는 오늘 단식중이유!”하고 광고하고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조작된 슬픈 듯한 얼굴과 허름한 옷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굳이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단식

    단식의 가장 큰 장점은 내 의지를 굳건하게 함으로써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단식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약한 의지는 자꾸 미루게 되고, 결국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단식을 통한 절제는 나의 의지를 키울 수 있고, 단식을 통해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며 주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식을 통해 절약한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서 주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내 의지를 키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게 하며, 내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단식을 해 왔습니다.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단식과 금육을 하고 그것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단식과 금육을 하면서 내가 체험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건강을 위한 단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건강을 위한 단식은 더 자주 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영적인 건강을 위한 단식과 내가 해야 할 영적인 단식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이 은혜로운 시간에 회개하며 자비를 청하는 나

    단식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요엘2,12-14)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면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청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용서해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이렇게 주님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고백하고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께서는 이 청원을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체험했기에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5,20-21)

     

    그러므로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받고 있는 나는 이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참된 자선과 참된 기도, 그리고 참된 단식을 통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구원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무딘 마음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야 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봉헌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기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은총의 사순시기를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날들로 만들어 봅시다. 참된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는 날들을 만들어 봅시다.

     

     

  3. 관리자 님의 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이 어린 나귀는 메시아가 나타나실 때 타셔야 할 것이므로 아무도 탄 적이 없어야 합니다. 나귀 주인은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라는 말씀에 기꺼이 어린 나귀를 내어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나귀 위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루카19,35).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입성은 힘과 권력으로 통치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희생의 봉사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습니다(루카19,37). 제자들의 기쁨은 지금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과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 군중들 사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본 모든 군중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나아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즈카르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즈카르야 예언서에 의하면 메시아는 올리브 산으로부터 그 도시에 들어가시리라고 기대되었기(즈카르야 14,4)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에 자기들이 목격한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자 군중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하며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들의 찬양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루카19,38)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임금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인간이 되셨고, 그 구원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니 인간 편에서 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루카19,38)라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메시아 왕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에 감사하며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환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성지가지를 들고 호산나! 저희를 구원하소서.”하며 외쳐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변하지 말고, 내 삶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손과 발에 큰 못을 박는 삶을 살아가지 말고, 성지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나의 임금님을 찬미 찬송합시다.

  4. 관리자 님의 말:

    타마르

    야곱의 아들 유다는 수아라는 이름을 지닌 가나안 사람의 딸을 만나 아내로 삼고, 에르, 오난, 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맏아들 에르에게 아내를 얻어주었는데 그 이름은 타마르였습니다. 대추야자나무를 뜻하는 타마르는 여자 이름으로도 성읍 이름으로도 쓰였습니다.

     

    그런데 에르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창세38,7) 그래서 유다가 오난에게 타마르를 맞아들여 형에게 자손을 일으켜 주라고 말했지만(수혼제, 시형제 혼인) 오난은 타마르와의 관계에서 아들을 낳아도 그 아들이 형의 아들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타마르가 임신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그도 죽게 하셨습니다.(창세38,9-10)

     

    당시에는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했습니다(참조: 신명25,5-6). 그런데 모세의 이 법은 두 형제가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에만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가족의 유산을 보존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참조: 신명25,5-10). 그리고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았습니다.

     

    두 아들이 죽자 유다는 타마르에게 내 아들 셀라가 클 때까지 너는 친정에 돌아가 과부로 살고 있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다는 막내 셀라가 제 형들처럼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마르는 친정으로 돌아가 살게 되었습니다.(창세38,11)

     

    이제 타마르는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많은 시간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타마르는 유다에게 잊혀졌습니다. 셀라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러주지 않자 타마르는 시아버지가 자기 양들의 털을 깎으러 팀나로 올라간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입고 있던 과부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몸을 가리고 신전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유혹하였습니다. 타마르가 얼굴을 너울로 가린 것은 그녀의 얼굴을 시아버지인 유다가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계획은 성공했고 유다는 타마르를 보고 신전창녀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타마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남편의 후사를 마련하겠다는 일념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녀가 자신의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주기로 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타마르는 유다에게 담보물을 원하는데 유다의 인장과 줄, 그리고 지팡이를 원했습니다. 계약을 체결할 때 찍는 인장은 손가락에 끼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줄로 매어 목에 거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팡이에도 그 주인의 특별한 표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셋은 후에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됩니다.

     

    유다는 친구 편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면서 담보물을 찾아오게 했으나 찾지 못합니다. 그곳에 신전 창녀는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는 가질테면 가지라지. 우리야 창피만 당하지 않으면 되니까. 보다시피 내가 이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냈는데, 자네가 그 여자를 찾지 못한 게 아닌가?”(창세38,23) 그렇게 유다는 신전창녀(타마르)와의 관계를 잊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타마르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타마르는 계략을 써서 남편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타마르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대의 며느리 타마르가 창녀 노릇을 했다네. 더군다나 창녀질을 하다 임신까지 했다네.”(창세38,24) 이 말을 전해들은 유다는 분노하여 화형에 처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화형은 드문 처형방식이기는 하였지만 고대 근동과 성경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레위21,9;예레29,22-23).

     

    끌려온 타마르는 자기의 시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저는 이 물건 임자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이 인장과 줄과 지팡이가 누구 것인지 살펴보십시오.”(창세38,25) 유다는 그것이 자기 것인지를 알아보고는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세38,26)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유다 자신보다 타마르가 의롭다는 것입니다. 타마르의 행동이 비록 모든 면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조의 후손이 끊이지 않도록 유다보다 더 정성과 힘을 쏟았다는 의미에서 유다보다 더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마르는 페레츠와 제라를 낳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은 족보에서 그것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마태1,3)

     

    타마르! 그녀의 이름의 뜻은 대추야자나무입니다. 대추야자나무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사막에서는 이 열매가 중요한 식량이고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아주 옛날부터 재배해왔으며 귀하게 여겨왔습니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서는 이 나무를 관상수로 심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주님수난 성지주일에(종려주일)에 이 나무의 잎을 사용했습니다.

     

    타마르는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고, 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더 나아가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타마르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남편의 후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완성해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대추야자나무를 뜻했는데, 우연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나뭇가지를 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였습니다. 타마르!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개척하였고, 그렇게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성주간

    성주간은 부활대축일 전의 한 주간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시작으로 수난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부활하시는 구세주에게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설정되었습니다. 성목요일 아침에는 주교님께서 자기의 사제단과 함께 미사를 공동집전 하면서 성유(聖油)를 축성하고, 저녁에는 만찬미사로 성삼일 전례를 시작합니다.

     

    성주간은 교회력에 있어 1년 중 가장 의미 깊은 주간입니다. 초세기에는 수난의 사건을 기념했기 때문에 수난주간”(passion week)으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에 있어 수난에 대한 관념은 항상 부활에 포함하고 있었기에 빠스카 주간”(paschal week)으로도 알려졌습니다. 밀라노 전례에서는, 이 기간 동안 기념되는 사건의 중대성을 암시하기 위해 권위 있는 주간”(authentic week)으로도 불려 졌고, 몇몇 지역에서는 성목요일에 죄수들이 사면(赦免)되었기 때문에 사면 주간”(the week of remission)으로도 불려졌습니다. 또한 동방교회 신자들은 구원의 주간”(the week of salvation)으로 불렀습니다. 이 주간에 교회는 예수님의 체포와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며, 모든 의식(儀式)은 슬픔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한 엄청난 사랑에 대한 기쁨을 드러냅니다.

     

    성주간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의 에서 보여지나 성주간의 기원은 고대 니체아 교회(ante Nicene)가 기념하던 파스카 축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파스카 축제는 금요일에서 시작하여 부활주일 아침에 끝나는 3일로써 기념되었습니다. 4세기에 성목요일이 추가되고, 1주일로 연장되어 5-6세기에는 비로소 성주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전례규정은 4세기에 열심한 순례자 에테리아(Etheria)가 서방교회에 전해 준 예루살렘에서의 전례형태를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중세에 와서 성지 행렬, 십자가 경배, 무덤 조배, 새 불과 파스카 초 의식 등의 전례가 도입되었습니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부활 전야제를 재조직하고, 1969년에 성주간 순서가 약간 다시 개혁되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부활 축제의 근본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부활성야 미사를 도입한 것입니다. 성주간의 각 날에는 고유한 전례가 있는데,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수난 성지주일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입성하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미사에 있어서 이러한 주님의 입성(入城)을 기념하는데, 중심 미사 전에는 행렬이나 혹은 성대한 입당식으로 또 다른 미사 전에는 간단한 입당식으로 이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행렬은 두 번 할 수 없지만 성대한 입당식은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는 미사 전에 두세 번 반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날 미사 중에는 긴 수난복음이 낭독되는데 복음 후에는 보통 때처럼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주간 월요일에는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예수님의 장례일을 준비하는 것임을 설명해 주시는 내용의 복음(요한 12,1-11)이 낭독됩니다.

    화요일에는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실 것과 베드로가 부인하리라는 것을 예고하시는 내용의 복음(요한 13,21-23; 36-38), 수요일에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키신 내용의 복음(마태 26,14-25)이 낭독되며 그 밖의 다른 특별한 의식이 거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에는 고유한 전례가 거행됩니다.

     

     

  6. 관리자 님의 말: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래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셨습니다(마르14,33-35).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14,37-38) 하시며 다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지만 상황이 변화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예수님께 힘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하여 수난을 향하여 당당히 나아갈 힘을 얻으셨습니다. 피곤과 두려움에 지쳐서 잠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마르14,39-42)라고 말씀하시며 당당히 수난을 맞이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하여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와 함께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유다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습니다. 유다가 와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루카22,48)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마르14,48-49)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으로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습니다(마르14,50-52). 이렇게 모든 제자들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아나는 제자들 중에는 나도 끼어있을 것입니다.

  7. 관리자 님의 말:

    조롱을 참아 받으신 예수님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이들은 이제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맞혀 보아라.” 하며 놀려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종들도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마르14,65).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사50,5-7)

     

    예수님께서는 조롱을 받으셨지만 그 조롱에 온전히 맡기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42,1-3).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것들이 예수님의 겸손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러 오셨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이셨기에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시며 수난의 잔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군사들에게도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총독 관저의 뜰 안으로 끌고 가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5,16-18). 그들은 임금님이 입으셔야 할 용포대신 자주색 옷을 입혔고, 왕관 대신 가시관을 씌워 드리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며 조롱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조롱당하는 임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사들은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습니다(마르15,19). 임금은 자신의 권위의 상징으로 왕홀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도 왕 앞에 나올 때는 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갈대로 홀을 만들어 임금이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척 하면서 그것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또한 신하들은 임금께 선물을 드리며 임금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는데 군사들은 주님 얼굴에 침을 뱉고 경배를 드리는 척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왕이라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겠습니까?

     

    군사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습니다(마르15,2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셨습니다.

     

    군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습니다.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마르15,26-27).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습니다(마르15,24-25).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마르15,29-30) 또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습니다(마르15,31-32).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조롱을 참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조롱을.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마르15,33-34).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습니다(마르15,37-39).

     

  8. 관리자 님의 말:

    주님수난 성지주일

    성지주일은 부활절 바로 전의 주일로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이날 교회는 성지 축성과 성지 행렬의 전례를 거행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백성들이 승리의 상징으로 종려나무 혹은 올리브나무 가지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바닥에 깔았던 일에서 연유합니다.

    원칙적으로 성지 축성과 분배는 성당 밖에서 행해지며 성지 행렬의 복음 낭독(루카 19:28-40) 후 향을 피우며 십자가를 앞세우고 성지를 손에 든 사제와 신자들이 행렬을 이루어 성당에 들어 가 미사는 개회식이 생략되고 본기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당 밖에서 행렬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성당 안에서 중심 미사 전에 성대한 입당식을 하며 그 외의 미사에는 간단한 입당식으로 기념합니다. 이 날 축성된 성지는 1년 동안 잘 보관하였다가 다음 해에 태워서 재의 수요일 예절에 사용됩니다.

     

    성지는 보통 십자가 뒤에 걸어 놓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호하던 사람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환호하며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승리의 삶을 살겠노라고 십자가 앞에서 다짐하기 위해 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무덤에 승리의 팔마 가지가 그려져 있듯,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통해 일상 삶 안에서 죄에서 승리하는 내 삶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기억하기 위해 걸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는 교우들에게도 이 성지가지를 꼭 전해 주어 다시금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해 주어야 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