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 제 4주일

3. 길 잃은 양들

우리는 냉담자라는 말을 듣기를 꺼려합니다. 냉담자라는 말 보다는 “쉬는 교우”, “방학 중” 이라는 말을 듣기를 선호합니다.

뻥튀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들이 “가족관계 알아보기”라는 숙제를 하면서 아버지에게 직업을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직업에 뭐라고 써?” 그러자 아버지는 “뻥튀기 장사”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창피하잖아.” 한참을 고민하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곡물 팽창업이라고 써라!”

또 다른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붕어빵을 팔았습니다. 그 아버지도 “붕어빵 장수를 붕어빵 장수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니?”라고 말했지만 그 아들도 창피하다며 쓰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산업이라고 써라.”

이것은 이러한 자영업자들을 무시하기 위한 유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가자고 만들어진 유머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쉬는 교우라는 말은 듣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쉬는 것이 아니라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냉담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먼저 목자(예수님)를 잃어버렸고, 양떼(교회)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란 풀밭(생명, 구원)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갈 힘을 잃었기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공동체와 함께 하지 못하기에 공동체를 떠난 것입니다.



3.1. 목자를 잃어버린 양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그런데 양이 어느 날, 그 목자보다 더 자신에게 잘해주는 목자(삯꾼, 도둑, 타종교 등)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자보다 자신을 더 잘 해 줄 것 같기에 자기 목자를 버리고 그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구원에 이르는 길, 생명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양은 목자를 잃어버리고,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양은 무엇이 옳은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어디에 이르는 길인지를 모르기에, 그리고 나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 모르기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한 자매가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다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열심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의 말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자매가 만난 이는 이단자였습니다. 그 이단자의 달콤한 말에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다가오기에 그가 늑대인지 호랑이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목숨을 빼앗길 때는 알게 됩니다. “아! 이놈이 늑대였구나!” 하지만 그 때는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공동체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세례 때 내가 믿음을 고백한 것 이외의 새로운 가르침이나 믿음은 결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낯선 타인이 접근하여 잘 해주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면, 무엇인가 나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계산을 하지 않으십니다. 공동체도 나에게 그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3.1. 목자를 떠난 양

① 탕자와 같은 양.

이 양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목자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에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노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길을 떠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참된 행복임을 모르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② 스스로 목자를 부정하는 양

이 양은 혼자서도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자신만 올바르게 살면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목자이시지만 믿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장애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나 사제들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참된 목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가끔은 “나는 성당에는 안 나가지만 열심히 살고 있고, 기도도 잘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성당 나오라고 하지 마라. 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마음만은 늘 성당에 있어!”라고 말하며 성당에 한 번도 안 나오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목자를 부정하는 양들은 결국 목자가 준비해 놓은 푸른 풀밭(구원, 생명)으로 가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③ 교만하고 어리석은 양

교만한 사람들은 공동체가 자신에게 사회적 지위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아서 떠나기도 합니다. “내가 사회적 지위도 있고 하니, 나에게 적어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청년들과 함께 미사 후에 술을 한잔 하시게 되었습니다. 청년회장이 신부님께 먼저 술을 한잔 따라 드리니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청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저 신부보다 나이가 많으니 나에게 먼저 술을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의 유형입니다.

어느 선생님은 영세 후 자신에게 “형제님! 형제님!”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한 생을 “선생님!”이라고 불리며 살았는데, 세례를 받은 후부터는 “형제님!”이라고 부르니 화가 났던 것입니다. “내가 뭐 아쉬워서 시간 내어서 성당 다니겠는가?”하면서 발길을 끊었습니다. 하지만“어디에 내어 놓아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④ 만사가 귀찮은 양

모든 것이 귀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날 이대로 그냥 내 버려두세요. 내가 불에 타던지 말든지, 사막에서 맹수에게 잡혀 먹히든지, 말든지, 배고파서 굶어 죽든지 말든지…,”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국 목자를 떠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메마른 사막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관심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습니다. 또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알고 있는 것 마저 잊어먹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착한 목자! 양을 사랑하는 목자, 양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 놓으시는 목자. 그 목자가 바로 착한 목자이시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착한 목자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푸른 풀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로지 참된 목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또한 이 착한 목자 주일을 교회는 성소주일로 지내며 젊은이들에게 성소의 꿈을 불어 넣어 주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여 자신의 삶을 불태우고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시다. 그리고 혼인성소나 다른 성소를 받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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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 4주일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과월절

    과월절은 유월절(逾越節) 또는 파스카 라고 하는데,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날짜는 유대력 니산월(1) 14일 저녁입니다. 이 파스카 축제는 성경에 명확하게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지침이 되는 날이며,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어 놓으신 몸과 피는 유월절 어린 양과 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유월절의 흠 없는 양이라는 것이 신학적으로 명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춘분 후 첫 보름달이 지난 주일을 부활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과월절이 오기 전 유대인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효모와 관련된 것을 모두 없앴습니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오랜 기간 내내 유일하게 먹었던 음식인 딱딱하고 효모가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며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무교병은 유월절 기간에 빵 대신에 먹는, 크래커 같이 생긴 효모가 없는 빵입니다.

    조상들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기리기 위해 유월절의 첫째 날과 둘째 날 밤에는 과월절 밤 축제(seder)를 엽니다. 과월절의 만찬은 적어도 열 명에서 스무 명까지 한 조가 되어 행하였고, 식사를 행하는 집주인이나 혹은 대표자가 그 주최자가 되었습니다. 알맞은 방을 마련하고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착한 목자와 삯꾼

    착한 목자! 양을 사랑하는 목자, 양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 놓으시는 목자. 그 목자가 바로 착한 목자이시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착한 목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착한 목자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푸른 풀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로지 참된 목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 착한 목자 주일을 교회는 성소주일로 지내며 젊은이들에게 성소의 꿈을 불어 넣어 주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여 자신의 삶을 불태우고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혼인성소나 다른 성소를 받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습니다. 목자와 삯꾼은 다릅니다. 목자와 약탈자도 다릅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사랑하고, 자기 양을 돌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줍니다. 파란 풀밭은 목자가 돌을 고르고, 물을 대고, 씨를 뿌려 일구어낸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풀밭으로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양들은 그곳에서 배불리 풀을 뜯습니다. 하지만 그 풀밭으로 가기 위해서는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또한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이나, 도둑들의 약탈에서 지켜주는 존재는 바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와는 달리 삯꾼은 양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요한10,12) 이렇듯 목자는 양떼를 사랑하고, 삯꾼은 양떼를 이용합니다. 어떤 시련이 주어질 때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당에서 봉사하시는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떼를 위해서 봉사한다면 양떼를 위하고, 양떼를 사랑해야지,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또 공동체 안에서 가끔은 이리들도 보입니다. 착한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잘되는 공동체를 흩어 버립니다. 그리고 착한 신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바싹 붙어 있어야 합니다.

     

    삯꾼은 양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요한10,13) 그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삯꾼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나는 공동체를 위해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관심이 없다면 빨리 포기해야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양떼를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지위나 사업 등의 번창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을 자신의 사업에 끌어들여 고객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레지오나 구역 전체를 망쳐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인들의 경우 상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사람들도 있고, 본인의 의지로 나왔지만 그곳에서 신앙을 잃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봉사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서 신자들이 더욱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나를 통해서 신앙을 잃어 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공동체 안에 있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옆에 있는 이들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대충 아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알고 있계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10,15)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기에 당신 양떼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5)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시고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니 감사하며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고,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나 사제들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이 자신들의 장애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양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목자를 알고 있습니다. 목자가 자신들을 풀밭으로 이끌고 위험에서 구해주는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목자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께 구원 사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온 열정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요한10,15) 그리고 그렇게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 관리자 님의 말: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양들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나를 알고 계시고,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착한양이나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이 참된 목자이신 당신을 믿고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10,16)

     

    또한 주님께서는 모든 양떼가 믿음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서로가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 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에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도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들 중의 하나가 바로 냉담자라는 말입니다. 냉담(冷淡)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대상이나 신념에 대해 열의가 없고 차가운 상태를 말합니다. 흥미나 관심이 없기에 처음의 마음이 거의 사라졌고, 그것을 향한 열정이 식어서 차가운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냉담이란 신앙생활에 흥미나 관심이 거의 없고, 주님을 향한 마음이 차갑게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냉담자라는 말을 듣기를 꺼려하다 보니, 냉담자라는 말 보다는 쉬는 교우”, “방학 중이라는 말을 듣기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쉬는 교우라는 말은 듣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쉬는 것이 아니라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냉담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듣기는 거북하겠지만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거부하고, 목자의 사랑을 거부하고 떠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부류의 양입니까? 목자를 사랑하는 양입니까?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양입니까? 아니면 듣는 척만 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양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양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은 믿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계명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이들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신앙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함께 주님 안에서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한 형제자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엽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주님 안에서 반겨 줍시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도록, 착한 목자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4. 관리자 님의 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양떼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양떼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떼만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였을 때, 외면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을 때, 청한 모든 사람은 자비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넘치시는 목자이십니다.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나는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기에 나는 그 사랑에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기에, 그 사랑에 사랑을 얹어서 받고 있기에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매 순간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결심한 것은 내 한 평생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나는 항상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을 지날 때라도 양들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사나운 짐승들을 쫓아 줄 뿐 아니라 밤에는 그 지팡이의 탁탁 거리를 소리를 들으면서 밤길을 갈 수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를 믿기에 밤에도 목자를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믿기에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기에 죽음이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주님 함께 계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시는 분이신데,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그 누구를 따라가겠습니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눈에는 나만 보이고, 내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목자를 따라가는 양인 나는 결국 파란 풀밭에서 목자와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성소(거룩한 부르심)

    성소(聖召)라는 말은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셨기에 거룩한 부르심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부르셨기에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불러 특별한 목적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을 풍성히 받게 하며, 당신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소명(召命)을 부여받은 이들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고, 당신의 구원사업에 초대하시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고, 예언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부르심은 그리스도교 안으로의 초대가 일차적이고,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구원의 영광스러운 계획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이들을 부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현세적 생활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부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하고,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의 공동체적 생활에 참여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또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선포한 메시지가 변질되지 않을 수 있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생활 속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깨닫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임무를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기에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서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행한 다음에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서로 하나 되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함께 공동체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섬기며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나는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고,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돌아봅시다. 나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으니 부르심 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신 분(착한 목자)의 음성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부르신 분(착한 목자)의 뒤를 졸졸 따라 봅시다. 내가 부르심을 받아서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맞갖게 살아가고 있는지, 하느님께 순명하기 위하여 나 자신의 욕심을 꺾을 줄 아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내 옆에 있는 사람 또한 부르심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은총의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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