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삼위로 현존하시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성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백성들은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성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이고, 그 삶은 기도하는 삶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영광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립니다. 성령안에서 살아갈 때, 온전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드러내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나에게 성부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의 삶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고, 사랑으로 주님과 결합된 삶이며, 이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입니다.
1.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셨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단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 단죄는 하느님의 심판인데,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단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 육적인 삶이 아니라 그 삶을 벗어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낌없이 내어 주셨기에 이것을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없는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갚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에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성령의 이끄심대로 의로운 삶으로 주님께 사랑을 갚아 드려야 합니다. 또한 이 삶(육적인 삶을 버리는 삶,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는 삶)이 나를 멸망에서 구원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 줍니다.
2. 자녀를 사랑하시는 성부 하느님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지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고개를 숙일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이들은 옛 삶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들은 육신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아빠!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부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빠! 아버지!”는 기쁨에 넘치는 자녀의 외침입니다. 또한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자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외치는 탄원과 탄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을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나를 이끄시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3. 구원에로 이끄시는 성령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계명을 지킴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결코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볼 수 있고,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생명과 평화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들의 영광과 희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의 요구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결코 하느님을 등지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 하느님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시니 나는 믿을 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 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 명이 역시 하루 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성인께서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 라고 물으시자, 어린이들은
“저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 담으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인께서 웃으시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 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열한 제자라는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빠진 한명은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도 함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음을 잘못 먹으면 나 또한 유다처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곳은 산에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유혹을 받으셨지만 권력과 부를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마태4,8). 산은 불의를 부추기는 유혹을 이기고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 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내가 있는 곳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한 가지 숙제를 받게 됩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예수님은 하늘(신적인 영역)과 땅(인간적인 영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가끔은 “예수님께서 과연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을까? 그런 능력이 있으신 분인가?” 의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남용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당부하십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합니다. 당신 사명을 계속 수행하라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이제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제 모든 민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 또한 그렇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신앙을 공식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또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를 포함하고 계신다.” 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한 하느님을 이루신다.” 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써는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초자연적 계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친교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또한 영광송을 바칠 때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문들도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받으소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면서 유다교 신자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다교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세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보기에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①성부 하느님 :
이 세상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어 보살펴 주십니다. 인자하신 아버지로서 우리를 사랑 해주십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성부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② 성자 하느님 :
인간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 이신 지 가르쳐주셨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셨으며 참다운 인간의 길 을 가르치셨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희생 제사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체험했습니다.
③ 성령 하느님 :
인간에게 공기와 물 같은 역할 하시는 분이십니다. 물, 공기가 없으면, 인간이 생명을 잃게 되듯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생기를 잃고 결국 죽게 됩니다. 세례 성사 때 우리는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써 나는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지 알게 되고, 또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성령께서는 또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가르치셨고 어떻게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 일러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에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말씀이고, 든든한 말씀입니다. 언제나 함께 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더불어 사랑과 정의의 계획에 몸 바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니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들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전하고 지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명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을 나는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정의를 이웃에게 실천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만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한분이신 하느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하느님과 등진 사람들을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고, 당신과 일치시키는 역사입니다.
성부께서는 인류 구원의 영원한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를 지상에 파견하시어 인류를 구원하게 하셨고, 성령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성화시켜 이 영원한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의하여 모인 백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미사 시작 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험에서 그 사건의 계시를 절정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서 성령을 체험하면서 성령을 하느님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즉 계시를 통하여 삼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①성부 하느님 :
구약의 백성들은 성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유다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성부 하느님을 목자요 아버지요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체험했습니다.
② 성자 하느님 :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을 위해 몸소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해 몸소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셨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오, 구원자이심을 체험했습니다.
③ 성령 하느님 :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셨고, 승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을 이끄시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게 해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며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는 우리를 이끄시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게“(로마 8,15)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시며 한없는 은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렇게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을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께서 세 분이 아니시라 한 분이심을, 사랑으로 하나 되신 분이심을 고백했는데,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는 것을 희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두 눈으로 뵙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기쁨에 넘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위격으로는 세 위가 계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 하느님은 세 분의 하느님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내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시니 우리는 믿을 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 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면서 유다교 신자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다교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세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보기에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계시하셨고, 그 계시를 받아들였기에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 명이 역시 하루 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성인께서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 라고 물으시자, 어린이들은
“저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 담으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인께서 웃으시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 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바닷가에서 돌아와 다섯 시간 동안 삼위일체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자, 저는 지금까지 인간의 말을 총동원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의 하느님이라는 삼위일체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이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현존하신다.” 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한 하느님을 이루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써는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초자연적 계시 진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창조된 사물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어느 것도 이 신비를 적당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라고 불리고, 직장에서는 사장님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는 “여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아버지요, 사장이요, 여보”이지만 나는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프면 사장님도 아프고, 여보인 나도 아픕니다. 그래서 이 비유로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초는 몸통과 심지와 촛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내어줌을 통해서 하나가 되어 빛을 발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를 사랑으로 내어주는 관계,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초의 몸통과 심지는 분리가 가능합니다. 이것도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클로버로 삼위일체를 표현합니다. 클로버 잎이 보통 세 개이니 세 개가 모여서 하나의 클로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격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하느님을 엉뚱한 분으로, 머리 셋 달린 괴물로 오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의 신비로서, 계시로서 알려지는 진리입니다. 계시를 떠나서는 인식이 불가능한 진리이기에 나의 이성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남김없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삼위일체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믿고 고백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또한 영광송을 바칠 때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문들도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받으소서.” 믿음을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할머니의 삼위일체
판공을 맞이하여 공소를 방문하신 본당신부님이 할머니에게 교리를 질문을 하였습니다. “할머니!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
“당연히 한 분이시지유.”
신부님은 “역시 신앙생활 오래 하셔서 대답하시는 것이 다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또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러면 한분이신 하느님은 몇 위가 계십니까? ”
할머니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개의 위격이지유.”
“아니! 왜 두 개의 위격이지요?”
“헤헤! 그건 아주 쉽구먼유. 제가 어릴 때 성당 벽에 걸려 있던 성화를 봤걸랑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표현한 그림이었지유. 수염 달린 할아버지(성부)와 아주 젊은 청년의 예수님(성자)과 비둘기(성령)가 그려져 있었구먼유.”
“그럼 세 개의 위격이지요.”
“어휴! 신부님은 아직 젊어서 잘 모르시는 것 같구먼유. 아직 신부님은 젊어서 모르시겠지만 내가 어릴 때 봤던 그 수염 달린 할아버지(성부)는 벌써 돌아가셨을꺼유. 내가 지금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말유.” “……”
삼위일체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삼위로 현존하시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성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백성들은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성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이고, 그 삶은 기도하는 삶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영광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립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온전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드러내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나에게 성부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의 삶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고, 사랑으로 주님과 결합된 삶이며, 이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결합되어 살아갑시다. 우리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삼위일체 대축일의 의미
삼위일체 대축일은 믿을 교리로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 현존하신다는 삼위일체를 특별히 기념하는 날로 성령강림 대축일 후 첫 번째 주일에 지켜집니다. 4세기경 삼위일체 이단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교회의 반박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유일하신 하느님은 3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생명이 이 삼위에서 전개됩니다. 성부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자기와 본질이 같은 영원의 ‘말씀‘이신 성자를 낳고 이 2위에서 창조되지 아니한 영원한 사랑이신 성령이 발생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의 일체성(一體性)은 알 수 있으나 3개의 하느님의 위격의 차이는 파악할 수 없으며 다만 신앙으로써만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를 인정할 뿐입니다. 바로 이 삼위일체의 신앙이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게 합니다. 무한하신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나, 고독하신 목석과 같은 분이 아니시며, 받아들이고 내어주시는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하신 위격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사랑이 넘쳐 그 사랑을 피조물에게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실천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