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17주일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당신 백성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십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내가 지금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굶주린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됩니다. 내가 그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내 것을 나누어 굶주린 형제자매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말씀에 굶주린 이들에게 말씀을 요리해서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 옆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

갈릴래아 호수는 “티베리아 호수와 갈릴래아 호수로”라고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지방의 중요한 도시는 26년에 건설되고 티베리오 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 호수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보통 갈릴래아 호수라고 불리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군중들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능력이 있음이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시나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이 본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자신들이 틀리게 생각한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었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2.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자 산에 오르십니다. 산에 오르시어 아래에 있는 군중들에게 가르치심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당신 사랑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①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려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말로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을 하십니다. 당신께 몰려온 백성들의 배고픔까지도 염려하십니다. “알아서 하게 하라.”해도 아무런 책임은 없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②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실지 마음먹으시고 필립보에게 말씀해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먹이실 계획을 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외딴 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무슨 재주로 그들을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출발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당신의 양떼로 보고 계시고, 제자들은 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과 기쁨의 거리는 너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가끔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일이 주어질 때는 반드시 해결 할 수 있는 방법도 주어지고, 누군가는 도와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는 필립보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200명의 노동자가 받을 하루의 임금을 말합니다. 하루 품삯을 5만원씩만 잡아도 천만 원이 됩니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빼고도 5천명이나 되니 천만 원 어치 빵을 산다 하더라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주머니 사정으로 보면 그것은 막대한 돈이었을 것입니다.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전대나 다른 어떤 것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신데, 제자들이 관리하는 돈이라야 얼마가 되겠습니까?

 

④ 안드레아 사도의 절망

제자들 중에서 안드레아 사도가 군중의 실상을 알기 위해 수소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먹을 것 가지고 계신 분 계세요?”그러나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이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은 양도 아니고 가난뱅이의 음식인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것은 호수 기슭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가끔은 이런 말을 공동체 안에서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데 나만 관심 가져서 뭐합니까? 나 하나 가지고 공동체가 변하겠습니까? 그냥 포기하고 맙시다. 하지만 나머지의 일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실 공간을 내가 미리 막아서는 안 됩니다.

 

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 앉히십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 수는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된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나 여인들을 합한다면 그 수는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⑥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원하는 대로 주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오천 명 앞에서 어린아이가 내 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군중들에게 나눠 주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원하는 대로”입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식사라 할지라도 그것에 감사를 드린다면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들은 가정 안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여 밥과 반찬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는 가정에서 “이것만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집”과“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서 식사를 하는 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가정에서는 분명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식탁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에 웃음이 흘러나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조촐한 밥상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넘쳐나고 있기에 풍요로운 밥상이 됩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웃음조차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⑦ 남은 조각을 모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가 배불리 먹은 다음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모두 모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6,12)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귀하게 여겨야 하고, 나를 통해서 그 은총이 버려져서도 안 됩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은총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은총을 얼마나 감사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을까요? 내가 언제나 당연하게 먹는 식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그것을 남기거나 소홀히 취급한다면, 그래서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⑧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찬 빵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남은 것들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밥을 참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보통 잔치가 끝나면 밥이 남아서 그것을 처리하느라고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남자만도 오천 명이었는데 딱 열 두 광주리만 남게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열두 광주리일까요? 제자들이 열두 명 이었고, 열 두 제자들이 하나씩 광주리를 들고 그 광주리에서 빵과 물고기를 꺼내서 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광주리에서 “꺼내도, 꺼내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광주리는 넣어도 넣어도 넘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 그 남은 음식은 광주리 안으로 들어갔는데 12광주리에 가득 차게 됩니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만드는 광주리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제자들이 기쁨에 차서 꺼내도, 꺼내도 채워져 있는 광주리에서 빵과 물고기를 나눠 주는 장면이…, 그것을 받아먹고 있는 군중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얼마나 놀랐을까요?

 

3.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군중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6,14)하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를 구원시켜줄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4. 산으로 피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에게 대항하려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께서 거부하신다면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받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아님을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십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군중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처럼 유혹 앞에서 “냅다 튀던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단호하던지”입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는 “냅다 튀십시다.”그것이 바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군중들의 마음을 식혀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11-2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17주일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얼마가 필요하세요?

    어떤 수녀님이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한 거지를 만나게 됩니다. 거지는 낡은 상자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수녀님께 자선을 청했습니다. 수녀님은 걸음을 멈추고 그 거지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얼마가 필요하세요?”

    그러자 그 거지는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그러자 수녀님은 자신의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우리 서로 지갑을 열어서 서로에게 보여 줍시다. 저는 제가 가진 것을 형제님께 보여 드릴께요. 형제님은 저에게 형제님이 가진 것을 보여 주세요.”

    구걸을 하던 그 거지는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수녀님은 차분하게 그 거지와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형제님! 돈은 분명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랍니다. 저도 돈은 없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답니다. 구걸을 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고, 누군가가 형제님께 작은 돈을 건네주면 그것에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형제님의 모습을 보세요. 형제님은 지금 이 삶이 행복하십니까?”

     

    거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돈 주기 싫으면 그냥 가세요.”라고 말했겠지만 수녀님이 자신에게 진지하게 말을 건네니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녀님! 저는 이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사하지도 않고, 다른 것들을 찾아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저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내일도 이 자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물론 돈이 없으면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게 되고, 포기해야 될 것들도 많이 있답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데, 그 포기도 큰 기쁨을 준답니다. 물론 저희는 먹고 사는 문제는 고민하지 않기에 형제님께서 듣기에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도자들에게는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재물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답니다. 그 안에서도 큰 행복을 누리고 있답니다.”

    거지는 수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수녀님! 저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저의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아마 사람들은 제가 이곳에서 구걸하는 것이 못마땅하겠지요. 생각해보니 제가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구걸하여 번 돈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수녀님은 그 거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이 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거기를 청소해 보세요. 매일 이 거기를 청소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자선을 청해보세요. 그러면 형제님도 보람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그 행복을 나누었기에 형제님께 자선을 베풀겠지요. 그렇게 이 거리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세요. 그렇게 형제님의 생각이 바뀌게 되면 행동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더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요. 한 번 해 보세요.”

     

    그러자 그 거지는 수녀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저를 괴롭게 만드시는군요.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수녀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수녀님께서 얼마나 필요하냐고 말씀하실 때 많이 당황했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지에게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지는 그저 많으면 좋다고 생각을 하지요.”

     

    수녀님께서는 그 거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수녀원 들어오기 전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돈에 대해서 많은 집착을 했습니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싶었고, 더 좋은 것들을 가지고 싶었으며, 더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참된 행복을 주지는 않더군요. 참된 행복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불평하지 않은 데서 오더라구요. 제 지갑 보셨죠? 저보다 형제님이 더 많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저는 행복하답니다.”

     

    수녀님은 이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성당에도 형제자매님들이 많은 봉헌과 기부를 하고 계시답니다. 그런데 많이 가지신 분들보다는 적게 가지고 계신다 할지라도 기쁘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이 봉헌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기부하시더라구요. 돈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적게 있어도 행복이 넘쳐 오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서 별로 행복감이 없다고 해요. 이것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돈 보다는 보람 있는 곳에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봉사하는데 전념하게 되더라구요. 제 삶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리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반드시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더라구요. 물론 제 생각을 어리석게 보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

    풍요로움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결국 행복은 풍요로움에 전적으로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요로움에 집착하지 말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그리고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얼마가 있어야 행복할까?”

     

  2. 관리자 님의 말:

    관상(觀想 contemplatio, contemplation)2

    관상은 이에 도달하는 양식에 따라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는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관상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몰입하는 불교의 선()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합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과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염경기도(구송기도)와 묵상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바탕이 될 때,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서 깊이 있게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안에서 함께 할 때, 성령께서는 당신이 이끌고 싶은 대로 나를 기도의 깊이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은 모두 염경기도와 묵상기도를 하였지만 모두 관상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상은 완덕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완덕 자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완덕에 부르시는 하느님께서는 일반 신자들의 일상생활이나 활동수도회의 활동생활 가운데 관상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상의 본질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의 필요한 것입니다.

  3. 관리자 님의 말:

    빵의 기적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

    예수님께서 빵을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요한6,6)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실지 마음먹으시고 필립보에게 말씀해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먹이실 계획을 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외딴 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무슨 재주로 그들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출발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당신의 양떼로 보고 계시고, 제자들은 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과 기쁨의 거리는 너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200명의 노동자가 받을 하루의 임금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주머니 사정으로 보면 그것은 막대한 돈이었을 것입니다.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전대나 다른 어떤 것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신데, 제자들이 관리하는 돈이라야 얼마가 되겠습니까?

     

    제자들 중에서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 앉히십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 수는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된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요한6,10) 아이나 여인들을 합한다면 그 수는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요한6,11) 오천 명 앞에서 어린아이가 내 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군중들에게 나눠 주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원하는 대로인데,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어도 넘쳐났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오직 사랑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넘치도록 후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사랑에 의탁하고 감사하며 예수님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4. 관리자 님의 말: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시나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이 본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자신들이 틀리게 생각한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었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당신 백성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듯, 목자가 양들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듯, 그렇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굶주린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다 시 한번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는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오해합니다. “아이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내어 놓자 어른들도 내어 놓았기에 군중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의 나눔에 감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빵을 내어 놓아서 빵을 배불리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셨기에 사람들이 배 불리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이 먹어도 남는 음식으로 변한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내 것을 나누어 굶주린 형제자매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말씀에 굶주린 이들에게 말씀을 요리해서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눔에 형제자매들을 동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빵과 물고기가 어떤 역할을 할지 몰랐지만 그것을 내어 놓은 아이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볼 때, 나는 그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고, 나를 통해서 다른 이들도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께로 몰려오게 할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작은 기적들을 일으켜 봅시다. 그렇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5. 관리자 님의 말: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 말입니까?”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당신께 주어진 것에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줄 알고 있었기에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빵과 물고기를 통해서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실 수 있기에 감사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감사기도에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을까요? 내 감사기도에는 기쁨이 담겨 있을까요?

    나는 매번 식사 후에는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한다고 기도하고 있는데, 가끔은 형식만 남아 있고,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감사하는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음에, 이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이 음식을 준비해 준 사람이 있음에, 이 음식으로 힘을 얻을 수 있음에, 그리고 이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셨음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기도가 바로 식사 후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배가 부르니 감사와 기쁨과 절실함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아야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1827년에 순교하신 복자 이경언 바오로는 이렇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눈을 뜨니 다리가 온통 헤어지고 사방에서 피가 흐르거나 혹은 상처 위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아! 나보다 신체가 더 튼튼하지도 못하셨을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높은 산 꼭대기까지 천 걸음이나 더 되는 곳을 걸어 가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교우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대 죄인에게는 이렇게 동정과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고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애들을 쓰는군요.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 말입니까?”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기도를 바치는 사람들, 그가 바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신앙인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 말입니까?”라는 고백을 통해서 순교자들의 마음 안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 마음은 기쁨은 없고, 당연함만이 자리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불편해지만 곧바로 불평하고 투덜거리게 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시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크신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참아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자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 말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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