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23주일; 에파타(열려라)


열려라(에파타)

1. 말씀읽기: 마르코 7,31-37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2. 말씀연구

안 들리고, 말 못하는 사람 하나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당신께 자비를 청하는 이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에파타” 라고 말씀하시자 귀먹고 말 더듬던 이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도 안 들리고, 말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니 주님의 말씀이 안 들리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만 말하려 하니,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귀가 열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입이 열러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2.1. 갈릴래아 호수가로 돌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티로에서 잠시 사람들을 피해 제자들과 함께 쉬려 하셨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쉬지 못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자녀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티로를 떠나 갈릴래아 호수가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오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당신 백성들만을 생각하십니다. 나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나보다는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주님 자녀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2.2.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마르7,32).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만 하면 귀가 들리고 입이 열릴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비를 청할 때, 예수님께서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3.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① 병자에게 침을 바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마르7,33). 이것은 병자에게 “내가 너를 치료하려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신 행위입니다.

 

② 병자를 군중과 떼어 놓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군중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군중들이 믿음 없이 오직 기적만을 바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떼어 놓는 이유를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 속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고, 그들 속에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결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듣지 못하게 하는 상황 속에서 벗어나야 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무리 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들을 수 있고, 그래야 말할 수 있습니다.

 

③ \”열려라“라고 말씀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마르7,34) 하고 말씀하십니다. “열려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즉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④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예수님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을까요? 이것은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바라보시며 느끼시는 가슴 아픔과 애처로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보시기 좋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니시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거부하고, 죽음과 고통을 끌어당겨, 그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⑤ 말을 제대로 하게 된 병자

예수님께서 “에파타”(마르7,34)하니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겨라.” 하시니 세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 하시니 그 환자의 귀와 입이 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느님, 한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그래서 “아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느님으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제 옆에서 늘 제가 당신께로 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하여 입을 열어 주셨지만 내가 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 결국 나는 벙어리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⑥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르7,36)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는 군중들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그래서 “그 능력으로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시는 힘 있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적에만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습니다. 치유받은 반벙어리는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기뻤으니, 또한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기적 사실들이 알려 지면 알려질수록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경계심과 음모는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2.4.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보고 놀라는 군중들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라고 말하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35,5-6)는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니 놀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놀라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내 주변에서도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됩니다. 말 못하던 이들이 기쁘게 복음을 선포하고, 형제자매들에게 관심 없던 이들이 형제자매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보고 기쁘게 인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병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방문하여 위로하며, 비신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을 다른 이들을 통해서 힘을 얻어 하고 있는 것일 수 있고,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못했던 것을 나 때문에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나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삶의 자리에서 떠나, 듣게 하고 말하게 하는 자리로 옮겨갈 때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힘차게 외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하고 외칠 때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그저 나보다 조금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장애를 얻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면 어떤 시선을 받고 싶습니까?

 

③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 나도 벙어리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소경인 것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벙어리와 소경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은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①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 될 말을 구분하여 행동으로 옮기기

② 들어야 될 말과 듣지 말아야 될 말을 구분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③ 기도할 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시간을 많이 내어 놓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21-3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23주일; 에파타(열려라)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신 예수님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7,32).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만 하면 귀가 들리고 입이 열릴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비를 청할 때, 예수님께서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군중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군중들이 믿음 없이 오직 기적만을 바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에파타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마르7,33). 이것은 히브리인이 병이나 액땜에 잘 쓰던 관습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당신께서 나쁜 병을 치유하고자 한다는 것을 확신케 해 주십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침은 눈을 치료하는 약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병자에게 내가 너를 치료하려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신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마르7,34) 하고 말씀하십니다.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즉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생겨라.” 하시니 세상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 하시니 병자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느님, 한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그래서 아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느님으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한숨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을까요? 이것은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바라보시며 느끼시는 가슴 아픔과 애처로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분명 보시기 좋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니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거부하고, 죽음과 고통을 끌어당겨, 그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자녀가 대학에 입학해서 방을 얻어 주었습니다. 도배도 해 주고, 살림살이도 마련해 주고, 이불도 멋진 것으로 장만해 주었습니다. 한 달 후 엄마!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제가 꼭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해요?”라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가 봤더니 벽에는 온통 얼룩이 져 있고, 책꽂이에는 책이 하나도 없으며,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져 있었고,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이불은 담뱃불로 이곳저곳이 구멍이 났고,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쓰레기장에 온 것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한 숨만 나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부여해 주셨는데 자녀가 완전히 망가뜨리고 오히려 부모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면서 온갖 불평불만을 예수님께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한숨 밖에 안 나오실 것입니다.

     

    침묵을 요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르7,36)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는 군중들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그래서 그 능력으로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시는 힘 있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적에만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습니다. 치유 받은 반벙어리는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기뻤으니, 또한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기적 사실들이 알려 지면 알려질수록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경계심과 음모는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놀라는 군중들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라고 말하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35,5-6)는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니 놀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놀라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내 주변에서도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됩니다. 말 못하던 이들이 기쁘게 복음을 선포하고, 형제자매들에게 관심 없던 이들이 형제자매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보고 기쁘게 인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병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방문하여 위로하며, 비신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을 다른 이들을 통해서 힘을 얻어 하고 있는 것일 수 있고,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못했던 것을 나 때문에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나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삶의 자리에서 떠나, 듣게 하고 말하게 하는 자리로 옮겨갈 때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힘차게 외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하고 외칠 때입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순교자들의 열정(순교영성)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며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알고 있기에 삶의 첫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다보니 비움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섬김과 봉사와 나눔은 일상생활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예수님을 위해서라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박해시대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박해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을 순교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순교영성이란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모든 신앙과 신념과 모범적 삶 모두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포기하며 사는 삶,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순교영성이고 순교정신입니다. 순교자들의 열정은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 열정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독거노인들을 방문하여 위로해 주고, 어떤 이들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어떤 이들은 가정을 작은 교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양한 곳에서 작은 봉사를 통해서 그곳에 기쁨을 불어 넣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러한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신앙인들의 손에는 성경과 묵주가 떨어질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묵주를 손에서 내려놓는 순간 하느님께 대한 열정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영성생활은 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장한 순교자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두렵지만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삶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신앙인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하셨고, 이웃을 배려하였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이 끝까지 박해자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용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했기에 그 두려움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님께 의탁하는 것, 의탁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열정이고,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갑시다.

  3. 관리자 님의 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49년 부활대축일에 상해에서 마레스까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5월에 요동 지방으로 가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부주교인 베르뇌 장 신부 밑에서 7개월 동안 병자 방문, 성사 집행, 교리 교육 등의 활동으로 사목 실습을 하셨습니다. 184911월 말에 최양업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의 명령을 받고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중국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메스트르 신부님을 중국에 남겨두고 최양업 신부님만이 교우들과 함께 12월에 보초들이 세찬 바람과 혹독한 추위로 건물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한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은 최양업 신부님은 중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안 신부님을 문병하여 병자성사를 베풀고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님을 방문하여 귀국 인사를 드린 후에 전라도에서부터 12년 동안의 사목 활동에 착수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6개월 동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에 있는 교우촌을 순회하면서 예비자를 찾아 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베풀고 미사성제를 집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처음에 순회 방문 중에 외교인들의 고발을 받아 체포될 위험도 겪었으나 철종의 즉위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 방문 중에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특히 외교인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여교우들에게 집안 식구 모르게 성사를 베푸셨습니다. 또한 그는 주민들의 병고에 동정하여 간질, 각혈 부종 등의 원인이 나쁜 물에 있다고 판단하고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약과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로그레조아 신부님께 편지를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목활동에 헌신한 최 신부는 피로와 병고에 시달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활동 이외에도 번역과 저술에 종사하셨습니다. 당시 다블뤼 신부님을 도와 교회사 자료를 수집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에 보내어 후에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발간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신부님께서는 기도서인 성교 공과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신자들의 신심 강화와 교리 지식의 심화에 이바지하셨습니다. 아울러 페레올 주교님께서 증인들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기해박해 중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와 여기에 첨부하여 병오박해의 순교자에 대해 불어로 기록한 개정 증보판의 기해일기병오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오늘날 교회사 연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교우들의 교리 지식 함양과 신심생활 활성화를 위해 조선의 전통적 가사 문학인 사사조 가사체로 천주가사를 저술하셨습니다. 이는 특히 글을 모르는 이들과 어린이 그리고 부녀자들을 위해 저술된 것입니다.

    조국 사목을 위해 헌신한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활동 12년 만인 18616월에 급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죽음에 대해서 베르뇌 주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최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 직분을 준수하여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영혼 구원에 힘써 성공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서양 선교사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있습니다.” 최 양업 신부님께서는 주교님과 신부들의 기도 가운데 베론에 묻히셨습니다.

     

  4. 관리자 님의 말:

    열정

    그리스도인들의 열정은 어떻게 표현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고 있고, 하느님을 위해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칠 원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고, 순교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주님께 의탁하며 받아 들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순교하시기 전에 이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4-26)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버림을 통해서 충만을 얻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포기할 것들이 종종 생깁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인지, 미사에 참례할 것인지, 애덕을 실천할 것인지…, 그렇게 신앙을 선택하면 그 시간에는 다른 것은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포기함 없이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심지어는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것을 뛰어 넘어 순교하고자 하는 자신의 원의까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나는 순명으로 이렇게 얽매어 있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지금은 조선의 내 전교지방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천국의 빨마 가지 위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신앙생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신앙생활,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의 열정이었고, 내가 본받아야 할 순교영성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으로 채울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해야 만이 주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순교자

    순교자는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분으로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mart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내용을 보증한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며(사도10,41), 스테파노(사도 22,20)와 바오로(사도 22,15)에게 적용되었고, 묵시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증인이라 불리십니다(묵시 1,5; 3,14).

    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재판소에 끌려가서 말씀의 증언을 하고도 죽지 못한 자들을 증거자(confessores)라 부르고 피로써 증언을 낸 자들을 증인(martyres)이라 불러 양자를 구별하였습니다. 이는 죽음 자체가 지니는 특수한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를 처음으로 증인이라 부른 것은 폴리카르포주교의 순교전(165년경)에서였습니다. 여기서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곧 하느님의 아들의 그것임을 피 흘려 증거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편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순교자란 피 흘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심의 실재성을 입증한다고 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하는 가현주의자(假顯主義者)들의 주장을 논박하였습니다. 2세기 말엽 이레네오도 순교자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가현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교회 내 순교자들의 특수한 지위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순교자가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초인적 용기는 순교자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순교는 모든 죄를 없애주는 행위이므로 제2의 세례이며, 순교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므로 순교자는 죽은 후 바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완덕(完德)에 이른 자이며 이들로 인하여 역사상 그리스도 교인의 숫자가 놀랍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는 그리스도 교인의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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