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29주일; 출세와 섬김


출세와 섬김

1. 말씀읽기:마르10,35-45 출세와 섬김 (마태 20,20-28 ; 루카 22,25-27)

2. 말씀연구

섬기는 것 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고, 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없고, 섬김의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큰 청을 드립니다. 그들은 어째서 이런 청을 드리게 되었을까요? 버리지 못했기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섬기는 삶은 어떤 삶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주님의 섬김과 내어줌을 본받아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쁘게 해 줍시다.

 

2.1. 야고보와 요한의 청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10,35)하며 자신들을 청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왔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큰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부모님께 쉽게 청을 합니다. 또한 반드시 들어 주실 것임을 체험을 통해서 확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쉽게 청을 드리지 못합니다. 또 경험상 “분명 안 해 주실 거야.”하고 먼저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자녀에게 가능한 것은 해 주십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 없는 것이라든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면 거절하십니다. 거절도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36)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36)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놀라운 말씀을 드립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10,37)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열 두 옥좌를 약속하셨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광은 수난과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세 번 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예고에서는 베드로의 인간적 사랑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고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의 예고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될 것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예고에서는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자리에 대한 청”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시는데 그들은 영광의 옥좌에 앉을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청하는 이들

예수님의 마음은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수난과 죽음의 잔을,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피의 세례”를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르10,3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10,38)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은 수난의 잔이고,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셔서 고통과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③ 무엇인지도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야고보와 요한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마르10,39)하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모르고 있기에 당당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모르면 용감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던 이들이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성목요일의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모두가 도망을 쳤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막상 하려고 하면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고통이 따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당하게 수락”한다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주님께 맡기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순교자들도 그러셨습니다. 순교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들도 고통에 무너졌고, 자신이 없던 사람들은 주님의 은총을 청하며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썼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 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노력하겠습니다.”가 정답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게 될 것이다.”(마르10,39)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에서 맨 처음의 순교자가 되어 기원 44년 예루살렘에서 목 베임을 당했고(사도12,2),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었다가(묵시1,9; 사도4,3: 5,40-41) 에페소에서 죽을 때까지 고난의 사도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데 영광만을 바라본다면 십자가가 주어질 때, 그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기에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서 마신 잔을 마실 수 없고,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에 동참할 수 없게 됩니다.

 

④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르10,39) 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마르10,40)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정해진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미리 정해져 있다면 굳이 열심히 살아갈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정해진 이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주님을 증거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해진 이들 안에는 나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영광의 자리만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그것이 모두 허물어지고,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⑤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을 듣게 된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자리를 야고보와 요한이 탐냈기 때문입니다. 질투가 섞여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에 야고보와 요한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을 알고 있었더라면 결코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난의 길은 아무나 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들 모두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유혹, 명예를 얻고자 하는 유혹. 그리고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체험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되면 제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며, 더욱 충실하게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나도 질투 때문에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나 또한 사랑받고 있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 모두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2. 섬김

인간의 마음에는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버려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백성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10,42-43)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야 할 마음을 품고 있는 제자들을 이렇게 따뜻하게 가르치십니다. 명예를 얻고자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상대방을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면 안면몰수하는 것도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신앙인들만큼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삶이고, 그 삶이 나를 위한 삶입니다.

 

① 모든 이의 종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들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낮출 때 주님께서는 나를 들어 올려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10,44)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기억해 본다면 교회의 봉사자들과 지도자들이 어떤 모습 인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주인이 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늘 반성해야 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형제자매들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고, 비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배울 때 나는 비울 수 있고, 비울 때 비로소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섬기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는 삶이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② 섬기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삶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언제나 영광만을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는 말씀을 온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섬김을 받으러 오셨다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가장 힘센 왕궁의 외아들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셨기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몸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마르10,45) 하시는데, 몸값은 노예를 해방하기 위하여 치르는 돈을 말합니다. 어떤 이가 종으로 팔려갔다면 그를 사랑하는 이가 그 사람의 몸값을 내고 그를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왜냐하면 종으로 팔려간 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를 사랑하여 대신 몸값을 치루는 이를 속량자라고 하고, 그 사람의 몸값을 속량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죄의 종살이를 할 때,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으로 몸값을 치러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풀어주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셨고,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 전 생애는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을 섬기러 오셨음”이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③ 몸값을 치르러 오신 예수님

그런데 여기서 “모든 이들의 몸값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몸값”(마르10,45)이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왜 모든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는 빼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으로 몸값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죄의 노예로 살아가렵니다. 방해하지 마세요…”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나아간다면 주님의 고통이 보입니다. 그 고통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섬기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21-3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29주일; 출세와 섬김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섬긴다는 것

    섬기는 것 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고, 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없고, 섬김의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버려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백성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10,42-43)

    섬기는 삶은 비록 자신이 상대방 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해 줄 때 가능하게 됩니다.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리는 것이것을 요즘은 갑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질의 끝이 어디인지 우리는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현세에서의 끝도 알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명예를 얻고자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상대방을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면 안면몰수하는 것도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신앙인들만큼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삶이고, 그 삶이 나를 위한 삶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들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낮출 때 주님께서는 나를 들어 올려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10,44)

    종이 된다는 것은 형제자매들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고, 비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배울 때 나는 비울 수 있고, 비울 때 비로소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섬기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는 삶이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교황님께서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기억해 본다면 교회의 봉사자들과 지도자들이 어떤 모습 인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주인이 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늘 반성해야 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들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들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낮출 때 주님께서는 나를 들어 올려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10,44)

    종이 된다는 것은 형제자매들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삶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언제나 영광만을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섬김을 받으러 오셨다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가장 힘센 왕궁의 외아들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셨기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몸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마르10,45) 하시는데, 몸값은 노예를 해방하기 위하여 치르는 돈을 말합니다. 어떤 이가 종으로 팔려갔다면 그를 사랑하는 이가 그 사람의 몸값을 내고 그를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왜냐하면 종으로 팔려간 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를 사랑하여 대신 몸값을 치루는 이를 속량자라고 하고, 그 사람의 몸값을 속량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죄의 종살이를 할 때,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으로 몸값을 치러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풀어주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셨고,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 전 생애는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을 섬기러 오셨음이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이들의 몸값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몸값”(마르10,45)이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왜 모든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는 빼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으로 몸값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죄의 노예로 살아가렵니다. 방해하지 마세요…”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나아간다면 주님의 고통이 보입니다. 그 고통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섬기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3. 관리자 님의 말:

    야고보와 요한의 청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10,35)하며 자신들을 청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36)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놀라운 말씀을 드립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10,37)

    이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시는데 그들은 영광의 옥좌에 앉을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세 번 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예고에서는 베드로의 인간적 사랑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반대했습니다. 두 번째의 예고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될 것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예고에서는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자리에 대한 청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르10,38)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10,38)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은 수난의 잔이고,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셔서 고통과 죽음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 있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마르10,39)

    모르고 있기에 당당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모르면 용감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던 이들이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성목요일의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모두가 도망을 쳤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막상 하려고 하면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고통이 따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당하게 수락한다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게 될 것이다.”(마르10,3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에서 맨 처음의 순교자가 되어 기원 44년 예루살렘에서 목 베임을 당했고(사도12,2),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었다가 에페소에서 죽을 때까지 고난의 사도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데 영광만을 바라본다면 십자가가 주어질 때, 그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기에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서 마신 잔을 마실 수 없고,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에 동참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마르10,40)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정해진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미리 정해져 있다면 굳이 열심히 살아갈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정해진 이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주님을 증거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해진 이들 안에는 나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영광의 자리만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그것이 모두 허물어지고,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을 듣게 된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자리를 야고보와 요한이 탐냈기 때문입니다. 질투가 섞여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에 야고보와 요한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을 알고 있었더라면 결코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난의 길은 아무나 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들 모두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유혹, 명예를 얻고자 하는 유혹. 그리고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아직 믿음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되면 제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며, 더욱 충실하게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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