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행복
1. 말씀읽기: 마태오 5,1-12ㄱ
2.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행복이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있으며, 내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 안에 머물며,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분명 행복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멸망해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돌아봅시다.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고 가르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무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있고 없고를 뛰어넘어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하느님께 무엇인가 하나를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루의 양식을 봉헌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음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 만을 생각하는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눌 수 있고, 그런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② 슬퍼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고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고, 뉘우치는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위로해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남의 죄를 보고도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죄에서 돌아와 주님 안에서 살아 갈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줍니다. 힘들고 상처도 받겠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은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위로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은 근심 걱정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놓고 예수님께 위로를 청합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역경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희망을 바라보고, 인내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지는 상황들 속에서“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③ 온유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5,5)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들은 모두 검소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복수를 하거나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지도 않습니다.
행복한 이들은 “세상적인 것에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나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 눈에는 하느님만 보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오직 하느님께로만 향하는 이들은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옳은 일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시기에 그들은 흡족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손을 내밀고 도와줍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봉사를 하는 이들은 자신이 봉사할 수 있음을 기뻐합니다. 그의 작은 봉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쁨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고, 그 기쁨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봉사에 대해서 보상을 하려 하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봉사의 기쁨을 모르는 이들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뜻과 맞지 않으면 돌아서 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그 봉사를 통해서 결코 참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⑤ 자비로운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비는 예수님께서 늘 보여 주시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기를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이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자비를 베풀 때 그도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하느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이들은 결코 자비를 입지 못하고,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내가 단죄한 것을 내가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 내가 하지 말라고 했고, 불쾌하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배려해야 합니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합니다. 나만 편한 것은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 때, 공동체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시는 주님께서도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깨끗함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을 하면 금방 깨끗해 지는데, 마음이 더러워지면 끔방 깨끗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아 깨끗해지지만 나약한 의지는 그 더러움을 반복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믿음과 사랑을 드릴 때, 더러움을 멀리할 수 있고, 정결을 지킬 수 있으며,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창이 깨끗해 질 때, 그는 하느님의 웃는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만 보이고, 하느님 눈에는 그렇게 마음이 깨끗한 이들만 보인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더욱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볼 때, 내 눈에는 하느님의 영광과 자비와 사랑만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보고자 할까요?
⑦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지만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최고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즉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있기를” 이었습니다.
평화는 갈등이 없어야 찾아오는 것이고, 서로 만족해야 찾아오는 것이며, 외부의 위협이 없어야 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갈등이 없어야 찾아오는 것이라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화해를 시키며, 오해를 풀어주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어 주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만족해야 찾아오는 것이라면 서로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정서욕구가 충족이 될 때 공동체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고,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욕구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욕구도 충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만족할 때 찾아오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은 각자의 영적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육적인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적인 욕구가 충족이 될 때, 주님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양보하여 조화를 이룹니다. 기도하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며 형제자매들과 평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환경 안에서 공동체가 평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주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존재입니까?
⑧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고 말씀을 하십니다. 의로운 이들은 성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고, 박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 이들입니다. 초대교회안에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에 박해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했고, 신앙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믿는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신앙인들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고통과 죽임을 당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셨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거나, 다른 이들의 강요에 의해서 내가 가진 신앙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접을 때, 하느님 나라도 내게서 멀리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 하며 진리 편에 설 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은 의로운 이를 박해합니다. 진리편에 서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하지만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에 아무리 시련이 주어져도 편을 바꾸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의로운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5,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박해는 그저 박해일 뿐입니다. 그 박해가 내 신앙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됩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박해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인들이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에 오는 것들입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은 중상 모략을 말합니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바로 중상 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비록 모욕을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주어지면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을 청하는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용기와 힘을 주시며, 모욕과 중상모략을 이겨내어 주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기뻐하는 삶, 그 삶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우리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내 앞에 하느님의 나라가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얻고 있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③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는 어떤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기
②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기
③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오늘은 나의 것, 내일은 너의 것.
–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우리들–
교회는 11월에 연옥의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로 정했습니다. 교회전통에 의하면 “오늘은 나의 것, 내일은 너의 것”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덤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너도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터이니 너무 잘난 체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잘 살아라”는 뜻일 것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을 통한 11월을 보내면서 그들이 죄벌을 용서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하는 것은 그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 죄를 범하였는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속죄함은 당연한 일 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장점은 우리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 한 공동체임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구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하느님을 향해 살다가 은총 중에 죽은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조그마한 부족과 결점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중에 현재 있는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연히 이런 결점과 부족을 기워 갚아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것을 기워 갚고 정화하는 시기를 ‘연옥’이라고 합니다. 연옥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것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정화중에 있는 영혼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만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행을 하며 희생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빨리 석방되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하듯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현세를 사는 우리들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초세기부터 오랫동안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희망하고 권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치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위령성월을 맞아 먼저 가신 이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하고 희생을 드리는 우리가 되어 봅시다.
위령성월(慰靈聖月)
가톨릭 신자들은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감으로 보고 있기에 다른 이들보다도 죽음과 친숙한 편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합니다. 부모님의 기일에는 미사를 봉헌하며 행복과 광명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며, 상갓집에는 반드시 찾아가 연도를 바치며 영원한 행복을 빌어 줍니다. 또한 매 식사 후 기도를 바칠 때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하며 기도합니다. 또한 제일 많이 하는 기도인 묵주기도를 마치며 연옥 영혼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이처럼 가톨릭 신앙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로서 교회는 매년 11월을 위령 성월로 정하였습니다. 성월(聖月)이란 전례력과는 상관없이 특정한 달에 특정한 신심을 키위기 위해서 정해 놓은 한 달 동안의 특별 신심 기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성월에 일정한 신심 행위를 바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역대 교황님들이 특전을 줌으로써 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묘지를 방문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
1. 연옥
거룩하게 살다 간 성인은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보통 사람들이 세례 후에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으면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한 죄와 영벌은 사라지더라도 잠벌은 남게 되며, 이 잠벌은 보속을 통해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보속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치러야 할 보속이 있는데, 그 보속을 치르는 곳이 연옥입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짓기도 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거나 사죄 받지 못한 채 죽기도 합니다. 이때 그의 영혼은 하느님 나라에 바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죄를 씻는 정화의 장소가 요청되는데, 그곳이 바로 연옥입니다. 연옥 영혼들은 속죄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이러한 연옥 영혼을 기도와 자선 행위와 미사 봉헌 등을 통해서 도울 수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령 성월이 연옥 영혼을 위한 특별한 시기가 됩니다.
2. 위령의 날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서 모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은 11월 2일 위령의 날입니다. 이날은 추사이망 첨례(追思已亡 瞻禮)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추사이망이라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돕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날인 것입니다.
통상 11월 2일에 거행하며, 만약 11월 2일이 주일이라면 다음날로 옮겨서 거행합니다. 이날은 무엇보다도 아직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들이 빨리 정화되어 복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들을 위한 위령 미사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11월 1일(모든 성인의 날)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한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제의 성격이 강하다면, 그 다음날인 위령의 날은 연옥 영혼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기회를 주며, 특히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시기인 11월에 자리 잡음으로써 종말에 성취될 구원을 미리 묵상하게 하는 날이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위령 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베풀고 있습니다.
위령성월의 제정
구약의 마카베오 후서에 보면 전장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게 합니다(2마카 12,39-46참조). 유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3년경 독립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와 기도를 바칩니다. 전사한 이들의 옷에서 얌니아의 우상이 부적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속죄의 기도를 바친 것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본래적인 의미의 위령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그 날에 그가 주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으로 오네시포로라는 사람을 위해 위령 기도를(2티모1,18)하고 있습니다.
초세기부터 가톨릭 교회는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등 많은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로마 시대에 있었던 삼백년간의 박해 당시에 신자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던 지하 공동묘지(까따꼼바)의 비석에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많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죽은 이들이 속히 죄의 사함을 받아, 천국의 영원한 행복에 들게 해 달라는 것들입니다. 이때부터 이미 교회 전례에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삽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부 테르툴리아노(211년경)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죽은 이들의 매년 기념일에 드리는 기도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기도가 오랜 전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폴리토(170-236)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중에 사용되던 기도문을 소개하였고, 아르노비오(?-327)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임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한 평화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407)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위령 기도와 죽은 이를 위한 자선 행위 등은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한 공식 전례 축일을 제정한 것은 10세기 경에 이루어졌습니다. 중세 초기에 수도원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을 기억하던 관습에서 시작되었고, 이를 지역 교회가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위령의 날이 전례 안에 등장하였습니다.
11월이 위령성월이 된 것은 998년에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에 의해서입니다. 오딜로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11월 2일에 죽은 이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시간 전례를 노래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널리 퍼짐으로써 11월 한 달 동안 위령 기도가 많이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1월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로 정해졌습니다.
교황 비오 9세, 레오 13세, 그리고 비오 11세(1922-1939)가 위령 성월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특전을 베풀면서 위령 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이로써 11월은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자신의 죽음도 묵상해 보는 특별한 신심의 달이 되었습니다. 또한 11월은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시기에 해당되고, 계절도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시기이기에 죽음을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며,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 좋은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많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지만 오늘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보다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유다교의 계명에는 613개가 있었습니다. 248개는 명령이고 365개는 금령입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어떤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유대 종교는 점진적으로 하나의 율법 체계를 발전시켜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 즉 “시나이 산에서의 모세의 율법”을 자기네가 받았다는 것을 큰 긍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들의 전체 삶을 규정해 놓은 법으로서 잘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어떻게 하면 그 수많은 규정을 일상생활 속에서 잘 준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늘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율법학자도 그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쾌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29-30)
이 말씀은 신명기 6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이 매일 아침 외우던 중대한 기도의 시작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이들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심리학에서 지혜가 담긴 자리였습니다. 목숨을 다하고는 정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리적인 모든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에 이어서 둘째 계명도 가르쳐 주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루카12,31)
율법학자는 이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둘째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친구들, 동료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안과 이방인 그리고 유다인, 세리와 죄인 그리고 생활이 문란한 여인과 의인이라고 보여 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친구, 적 모두가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구별 없이, 종교, 지위, 남녀노소 등을 떠나 모든 이가 이웃이고, 우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필요한 경우 용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편협한 이웃 사랑은 참된 이웃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 규정을 십계명으로 환원하셨고, 십계명은 다시 이렇게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은 더더욱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기쁨이 따라오고 기쁨이 열매 맺으면 평화는 당연히 열매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열매 맺으면 이웃 사랑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 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좋을 때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더 나아가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내가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귀한 자녀가 됩시다.
첫째가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하느님의 귀한 자녀가 됩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12,34)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할 때야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의 경우는 분명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이것은 나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가족을 사랑하느냐? 이거 또한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질문을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루카12,32)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루카12,33)
율법학자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의식보다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른 율법학자들은 매일 하느님께 두 마리의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학자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고(예레미야7,21-23;호세아6,6),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각을 칭찬 하십니다. 이렇게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12,34)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였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말이 옳다면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모습, 내 모습이 옳지 않다면 인정하고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모습. 이런 모습을 율법학자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사람,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날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실천해 봅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