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과부의 봉헌
1. 말씀읽기: 마르코 12,38-44
2. 말씀연구
가난한 과부의 봉헌은 언제 들어도 내 마음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봉헌을 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2.1.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① 경고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마르12,38-39)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로 백성들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하느님 백성이 지켜야 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23,2-3)고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들의 역할을 인정해 주셨지만 행실만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지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이는 입으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을 통하여 배우는 사람이 신앙을 잃을 수도 있고, 신앙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나의 행동을 보고 인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존경의 인사를 한다면 나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더욱 조심하며, 배려하고,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행사에서 자리의 중심은 그날 행사의 중심인물이 앉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어른이 자리의 중심에 앉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습니다. 자리 자체가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앉은 자리는 모두 권위 있는 자리가 됩니다. 또한 남을 존중해준다 해서 내가 결코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사람이 앉았던 자리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나 앉게 되는 것이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② 위선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이렇게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마르12,40) 당시 과부들은 힘없고 나약한 존재들을 대표했습니다. 재산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재산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부들이 재산관리를 제대로 못하니까 율법학자들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면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었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누가 “재산분배”에 관한 자문을 해 오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재물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신이 재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돌보지 않고 등쳐먹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지식과 힘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거래하고, 폭리를 취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인은 결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재물을 바라보게 될 때면 이런 율법학자들보다도 더욱 추잡한 일을 하며 뻔뻔하게 살아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우게 되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이 밝혀져서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고, 나를 보지 못하면 추잡한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아닌 척 하게 됩니다. 위선. 그것은 나에게 멀리 있는 단어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내 안에 있는 단어임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2,40)
2.2. 가난한 과부의 봉헌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헌금함이 있는 곳에는 나팔 모양으로 된 열세 개의 헌금궤가 있었습니다. 이 궤들은 율법 규정에 따른 봉헌물과 자발적으로 하는 봉헌물을 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얼마나 되며 또 무엇을 위한 헌금인지를 조사하는 당번사제에게 먼저 그 돈을 주었습니다.
사제: 어느 곳에 쓰일 헌금을 얼마나 내시겠습니까?
봉헌자: 사제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100만원!” “100만원”을 냅니다(거들먹.. 거들먹^*^)
그러면 사제는 액수를 검사한 다음 각각 정해진 목적에 따라 놓여 있는 합당한 궤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사제: 저 두 번째 헌금궤에 넣어 주시지요.
봉헌자: 에헴. 그러시지요.
(성당에서 이렇게 하면 봉헌금은 엄청 올라갈 것입니다. ^*^)
① 가난한 과부의 봉헌
한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마르12,42)을 넣었습니다. 그녀는 특별한 지향은 없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지극히 겸손하게 준비한 봉헌물(렙톤 2개)을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로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 돈은 그날 그녀의 생활비였고, 그것이 없다면 그녀는 굶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가난한 과부에게는 굶주림보다도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왜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바쳤을까요? 그녀가 삶을 포기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녀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치십니다.
②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칭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아셨고, 그 마음을 배우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12,43) 예수님께서는 금액을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습니다. 정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4)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을 보지 못한 다른 이들은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개를 넣는다고 말할 때 “어허! 겨우 동전 한 닢을 바치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차라리 바치지 말 것이지…,”하면서 이 과부를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굶는다 할지라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는 이 여인은 분명 복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봉헌을 해도 형식적으로 하는 이들이 꼭 말을 만듭니다. “그러면 내일 먹을 것도 생각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일 굶던 말든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두 바쳐야 한다는 것이냐? 집 팔고 땅 팔아서 다 바쳐야 하느냐? 그것이 사이비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비록 렙톤 두개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그녀의 사랑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큰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언제 들어도 부끄러운 이야기 입니다. 많이 번 사람들이 많이 낼 것 같지만, 많이 번 사람일수록 많이 낸 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번 사람들이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 봉헌을 하시는 분이나, 교무금 등을 내시는 모습을 보면 “안 내도 되는 사람”은 참 많은 것을 봉헌하고, “좀 더 내도 될 것 같은 사람”은 움켜쥐고 생색만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똑같습니다. 오늘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것을 나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온전히 버리지는 못하지만 조금 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어떤 마음으로 봉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봅시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내 신앙생활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기에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만을 바라보았기에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했기에 탐욕과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있을까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연도(煉禱)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위령기도를 우리는 보통 연도(煉禱)라고 합니다. 연도라는 말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쇠붙이가 불에 달구어 더욱 깨끗하고 단단한 쇠로 거듭나듯이 나의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허물이 깨끗이 씻어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비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신자가 죽으면 그를 위한 여러 가지 전례 행위들을 하였습니다. 박해 상황이었던 초대 교회에서는 죽음을 천상탄일이라는 뜻으로 “생일”이라고 부를 만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신앙에 충실하였으며, 죽은 이들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407)도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위령 기도와 주은 이를 위한 자선 행위 등은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은 이를 위한 위령 기도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관한 교리”와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인간의 활동에 관한 교리”를 잘 보여줍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모든 성인의 통공” 때문입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해서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성체성사를 통해 더욱 깊어지고 강해지며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사랑이라는 은총은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 머무르는 모든 이들에게 흘러넘친다. 다시 말해서 기도, 도움, 헌신, 호의 등과 같은 신자들의 나눔은 하느님 나라에 이미 다다른 사람들과 아직 연옥 단련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지상의 순례 중에 있는 사람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이 넘치는 살아 있는 단일 공동체 안에 머무른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성인의 통공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된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주인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며 살아 있는 우리들도 이 공동체의 동일한 구성원입니다. 즉 천상교회와 지상교회는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 안에서 죽음으로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 이들이 바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소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더욱 풍요롭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인간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이라는 측면 또한 위령 기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독단적인 의지로 마련하시지는 않으며, 피조물의 도움을 통해서 이룩하기를 원하고, 피조물의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 때 의인은 영복을 얻고, 죄인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죄를 씻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죽은 후에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 후에 범한 죄를 씻고 정화되기 위해서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살아있는 이들이 바치는 희생과 자선,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이들의 위령 기도는 죽은 이들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바치고 있는 연도는 시편 129편과 50편, 성인 호칭 기도 및 찬미 기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 고유의 가락에 맞춰서 노래로 바치고 있습니다. 연도의 음률을 제대로 익히고, 공동체가 함께 아름답고,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더욱 기쁘게 받아들여 주실 것입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누구나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고, 안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보여 주고 싶지만, 좋지 않은 모습은 안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보여질 때는 “그런 척” 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척, 너그러운 척, 용서하는 척…, 물론 그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로 백성들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하느님 백성이 지켜야 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23,2-3)고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들의 역할을 인정해 주셨지만 행실만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지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이는 입으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을 통하여 배우는 사람이 신앙을 잃을 수도 있고, 신앙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나의 행동을 보고 인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존경의 인사를 한다면 나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더욱 조심하며, 배려하고,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가르치는 이도 가르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가르침의 일차적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으로 가르치면 좋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임무를 부여받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이런 저런 좋은 가르침을 주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아버지도 막상 동료들과의 관계나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 가르침과 반대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옳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나쁜 일을 하는 아버지라 할지라도 자녀들에게는 “바르게 살아라. 의롭게 살아라.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라.”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버지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아버지도 그렇게 안 하시면서 저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들을 때는 “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있는 나 자신”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23,2-3)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이렇게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마르12,40)
당시 과부들은 힘없고 나약한 존재들을 대표했습니다. 재산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재산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부들이 재산관리를 제대로 못하니까 율법학자들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면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었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누가 “재산분배”에 관한 자문을 해 오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재물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신이 재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2,40)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모습과 내 모습을 비교해 보고,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다 듣고 계십니다. 내가 행동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의 잣대로 나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그대로 내 이웃에게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의롭게 칭찬받고 싶은 나는 의로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판단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기도하니 그만큼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보며 주님 안에서의 나의 모습을 먼저 생각하는 내가 되어 봅시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
가난한 과부의 봉헌은 언제 들어도 내 마음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봉헌을 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헌금함이 있는 곳에는 나팔 모양으로 된 열세 개의 헌금궤가 있었습니다. 이 궤들은 율법 규정에 따른 봉헌물과 자발적으로 하는 봉헌물을 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얼마나 되며 또 무엇을 위한 헌금인지를 조사하는 당번사제에게 먼저 그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제는 액수를 검사한 다음 각각 정해진 목적에 따라 놓여 있는 합당한 궤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마르12,42)을 넣었습니다. 그녀는 특별한 지향은 없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지극히 겸손하게 준비한 봉헌물(렙톤 2개)을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로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 돈은 그날 그녀의 생활비였고, 그것이 없다면 그녀는 굶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왜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바쳤을까요? 그녀가 삶을 포기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 가난한 과부에게는 굶주림보다도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행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녀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12,43) 예수님께서는 금액을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습니다. 정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언제 들어도 내 마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으로 봉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와 사렙타의 과부
아합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자 그는 그 이전의 어떤 임금보다 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이방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그 아내와 함께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을 박해하는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하였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이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던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엘리야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1열왕17,9)
엘리야는 사렙타로 갔습니다. 엘리야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불러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그런데 그 여인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17,12)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넉넉한 집안으로 피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피신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느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1열왕17,13-14)
이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믿었고, 믿는 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 자녀가 절망에 빠져 포기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렙타의 과부를 기억하면서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봉헌
봉헌은 일반적으로는 웃어른께 물건을 받들어 바치는 것을 지칭하나, 가톨릭에서는 미사 성제에서 제물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좀 더 엄격히 말하면, ‘봉헌‘이라는 용어에는 다음 두 가지 의미로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① ‘dedication’ : 성스러운 용도를 위하여 따로 준비해 두는 것. 즉 사람, 물건, 장소 등이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그것의 자연적인 용도나 세속적인 용도로부터 따로 떨어져서, 하느님을 존경하고 숭배하기 위해 또는 하느님에 대해 봉사하기 위해 특별히 바쳐지는 것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② ‘oblations’ : 미사 진행 중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위하여 바치는 일. 신자에 의한 봉납(奉納)의 행렬과 사제에 의한 봉헌의 기도에 의해서 표명되는데, 신자가 이 미사 때 바치는 그 밖의 선물도 ‘봉헌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들 선물은 특별한 기회에 상징적으로 바쳐지는 경우도 있고, 또는 실제적으로 성직자, 교회, 가난한 자를 위해서 바쳐지기도 합니다.
이 봉헌물은 고대 교회에선 빵과 포도주였으며, 교회가 스스로 이 축성 재료를 입수하게 되자, 성당유지에 필요한 천 종류나 초 등의 봉헌이 있게 되었고, 1100년께부터는 화폐의 봉헌도 보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무금은 교회유지를 위해 교우들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말하며 그 기원은 구약의 십일조(十一租)에서 유래합니다. 교무금은 개인이 아니라 가정을 단위로 해서 분량이 책정됩니다. 또한 교구는 소속본당에 교구납부금을 책정하고, 교구장은 이를 교회 유지와 교회 사업을 위해 사용합니다. 또한 교무금에 대한 의무는 열심자와 냉담자, 성사받는 자와 받지 않는 자의 구별 없이 모든 교우에게 부여된 의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