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3주일; 평신도 주일은 32주일로

“평신도 주일”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은 우리 평신도들이 자신의 사명을 더욱 잘 깨닫고 더욱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제정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깊이 있게 묵상하고, 삶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누구입니까?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 신앙인이 바로 “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 아드님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을 믿고 있기에 오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우리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가 바로 신앙인이며, 내 옆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는 형제자매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바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① 신앙인은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열정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만들고, 나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내 개인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먼저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는 다른 어느 나라와는 다르게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 놓는 것 까지 두려워하지 않았고,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으며,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깊은 산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 나누고, 격려하면서 성사생활에 열중했습니다. 그 열정의 결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열정을 이어받은 신앙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피로써 증거한 신앙을 이어받은 신앙인들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신앙의 선조들처럼 열정이 있는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열정으로 아침 저녁 기도를 바치고, 그 열정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그 열정으로 미사에는 참례합시다. 그 열정으로 애덕을 실천하고, 그 열정으로 신앙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② 신앙인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고, 그리고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태오 복음 18장 21절부터 19장 1절까지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의 말씀을 자주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사도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용서해 주어야 함을 말씀하시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종은 주인으로부터 많은 빚을 탕감 받았지만,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형제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많은 죄를 짓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결코 자비를 입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좀 더 사랑하면서 살아가고자 다짐해야 합니다. 물론 잘 안될 때가 더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인사하고, 기도해 주고, 먼저 말을 걸고, 아끼고 존경해 주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무슨 칭찬을 받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어울리려 한다면 하느님께로부터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내가 이렇게 저렇게 편을 가르거나, 다른 이들을 소외시키거나 상대방을 어렵게 한다면 하느님께로부터 상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꾸지람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위해주고, 아껴주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이들은 칭찬해 주고, 본받으려 노력합시다. 또한 미사가 끝나면 형제 자매들에게 관심을 갖고 인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③ 신앙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을 삶으로 표현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평신도 주일이 제정된 것은 한편으로는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이 교회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지만 그 중심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기쁜 일입니다. 세상살이에 시달리면서 수많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 고통당하고, 어떤 경우는 좌절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격려에 힘입어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삶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되어 봅시다. 그리고 오롯하게 주님께만 매달리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31-34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33주일; 평신도 주일은 32주일로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무화과나무의 교훈

    충청도 사투리 중에 시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절이라는 표현은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쓰는 표현으로 바보보다는 약한 표현입니다. 추운데 옷을 얇게 입고 나와서 덜덜 떠는 친구에게 에이 시절아! 옷 좀 두툼하게 입고 오지.”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시절은 상황파악을 잘 못하고, 때를 모르는 친구에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지금 처한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하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통해서 때를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마르13,28-29)

     

    신앙인들은 언제”, “어떻게종말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말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새로운 잎을 내는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계절의 흐름을 알 수 있듯이 신앙인들도 예수님의 재림의 사건이 문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건강의 청신호와 적신호가 있습니다. 건강의 청신호일 때는 문제가 없지만 적신호가 오면 즉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든지, 잠시 손발이 마비가 온다든지 하면 몸에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낫겠지하고 아무렇지도 않듯 일상생활을 하거나 심한 운동을 한다면 결국 불행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친구를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시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하고, 처방을 받으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지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느끼는 청신호와 적신호가 있습니다. “늘 시간이 주어지겠지! 내일 하면 되겠지하고 뒤로 미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일이 나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일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고, 준비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귀한 손님을 기다리면서 밖을 늘 살피는 사람처럼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삶, 언제든지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런 마음이 있고,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 내 신앙생활의 청신호입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깨어 기다리는 주님의 자녀들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이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벌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칭찬과 격려가 주어지는 시간이고, 큰 상이 주어지는 시간 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코12,24)

    예수님께서는 뭔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징조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은 이제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세상을 비추는 것은 해와 달과 별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세상을 비추시면 세상은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추임에 당황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을 청소하기 위해서 버릴 것과 필요한 것을 정리할 때 정신없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 이런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이 혼란은 혼란을 위한 혼란이 아니라 정리를 위한 혼란입니다. 방 청소가 끝난 평화로운 방을 생각해 본다면 청소는 평화롭고 깨끗한 방을 향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을 현혹시키던 존재들은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종종 일어나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나 거짓 예언자들, 사이비 종교들, 스스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이러한 징조 앞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 앞에서는 어떤 거짓도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거짓이 판을 치고, 그대로 끝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짓은 거짓이었을 뿐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상대방을 속였다 할지라도 진실 앞에서는, 그리고 올바른 판결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13,26)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언제 오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깨어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기다림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멋진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3. 관리자 님의 말:

    선택된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

    선택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 뜨거워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주님께로부터 선택받는 것이니 더더욱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예수님의 선택이지만 나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기에 예수님도 나를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당신께로 나아오도록 은총을 주셨기에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고, 예수님의 은총 안에서 그 선택에 대한 확신의 삶을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택은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때, 예수님께서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마르13,27)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이들) 천사들에 의하여 사방에서(온 세상에서) 모여들게 되어 성인들의 모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기도생활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25,31-36)

     

    그런데 이런 축복의 말씀을 들은 의인들은 당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마태25,37-39)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지는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런데 이때 내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내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니  자연스럽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니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28,19-20)

     

    그러므로 가족을 신앙으로 돌보고, 대자녀들을 지속적으로 신앙에로 이끌고 함께 기도하며, 삶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수행하면서 살아갈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기쁨으로 가득 찬 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고,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13,3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 날과 그 시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을 전할 사명은 부여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말을 더 잘 준비하기 보다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오신다는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고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을 선택하고, 언제나 주님께 선택받는 내가 되도록 확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은 언제나 주님을 향한 깨어있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성실하게 자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하며, 이웃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은 하느님 나라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 함께 선택된 이들의 삶을 힘차게 살아갑시다.

  4. 관리자 님의 말:

    구노의 아베 마리아와 앵베르 주교님, 그리고 다블뤼 주교님.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누구나 좋아하는 곡으로, 이 곡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BWV 846 중 전주곡 1번 다장조에 샤를 구노가 가락을 붙인 것입니다. 원곡을 구노 스스로가 발표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구노의 생전에 무수한 편곡과 가사가 붙은 곡이 출판되었습니다.

    1853년 구노의 장인 피에르 치머만이 구노의 연주를 바이올린(또는 첼로), 피아노와 하모늄을 위한 곡으로 편곡하여 S. 바흐의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1번에 의한 명상(Méditation sur le Premier Prélude de Piano de S. Bach)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이 곡은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시 생명의 책(Le livre de la vie)을 가사로 하여 출판되었습니다. 지금의 Ave Maria로 시작하는 라틴어 성모송이 가사로 붙게 된 것은 1859년에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곡은 구노(1818-1893)와는 연관이 없는 베르뇌 주교님(1796-1839) 또는 다블뤼 주교님(1818-1866)과 연관시켜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이 구노의 친구였고, 구노가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후에 로마에서 종교음악을 공부하고 있을 때, 다블뤼는 신부 서품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돼 순교하셨는데, 친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큰 슬픔에 잠겨, 다블뤼 주교님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곡이 아베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구노가 바흐의 수많은 곡 중에서 이곡을 택한 이유는, 바흐가 첫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은 후에 쓴 곡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바흐가 그랬듯 구노도 음악으로 그 큰 상실감을 간신히 견뎌낼 수 있었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구노의 아베마리아는 1859년에 나왔고, 다블뤼 주교님은 18663월에 순교하셨으니 그 연관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노와 다블뤼 주교님은 나이가 같고, 또 같은 신학교에서 생활한 것은 사실입니다. 구노는 1843년에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성당의 악장이었으나 1848년에 그곳을 떠나 음악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님은 1841년에 사제 서품을 받으셨으니 둘의 연관성은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리고 신자라면 누구나 순교 소식에 비통해 했겠지만 아베마리아는 1859년에 이미 완성된 곡이었고, 다블뤼 주교님의 순교는 1866년이니 연결고리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또한 구노가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과 절친이며, 주교님의 순교를 비통해 하며 아베마리아를 작곡하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앵베르 주교님은 1796323일 생으로 구노보다 나이가 많고, 1839921일 순교하셨기에 작곡 시기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곡이기에 순교자들의 순교를 슬퍼하면서 아베마리아와 연결 지으며 순교정신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노가 다블뤼 주교님이나 앵베르 주교님을 위해 아베마리아를 작곡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성사의 사효론(事效論 ex opere operato)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성덕이 출중해야 만이 성사가 유효할까요? 성사(聖事)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행위인 성사적 예절에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성사의 유효성이 성사 집전자의 성덕(聖德)이나 의도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역사상 이 문제가 처음으로 야기된 것은 256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주교였던 치프리아노와 당시의 로마 교황 스테파노와의 대립입니다. 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이단자들로부터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아 그 세례자가 정통교회에 귀의할 때는 재세례를 베풀었으나, 로마 교회에서는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이더라도 정당한 절차와 성삼(聖三)의 이름으로 베푼 성사는 유효하다고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교회는 반달족의 침입으로 멸망(5세기 초)되어 그 전통이 중단되었고 로마 교회의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 후 312년에 같은 문제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교회에서 도나투스 열교 사건을 통하여 재발되었습니다. 체칠리아노의 카르타고 주교 서품식을 공동 집전한 3명의 주교 가운데 과거에 배교한 적이 있는 펠릭스 주교가 끼어 있었는데, 체칠리아노를 반대하던 엄격주의자들은 그의 서품을 무효라 하면서 도나투스를 주교로 선출하여 이에 대립시킨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정통교회는 체칠리아노의 주교 서품을 유효하다고 인정함으로써 성사의 유효성은 집전자의 성덕과 무관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8세기 이래 성직자들의 생활이 불성실해지자 마침내 프랑스의 알비인과 스위스의 보인 등은 정화운동을 벌이면서 타락한 성직자가 집전한 성사는 은총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재위 : 1198-1216)는 독성 행위와 성사집전 행위를 구별지으면서 행위자(opus operans)의 행실이 깨끗하지 못할지라도 이행된 행위(opus operatum, 즉 그 자에 의하여 이행된 성사적 행위)는 깨끗하다(De Sacro Altaris Mysterio 3, 6)고 선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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