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15주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인들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앙인들은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그저 알고 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율법교사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방법과 참되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2.1.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가르침

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10,25)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줄 모르고 감히 예수님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율법교사는 그 은총에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분이신 줄을 모르고 있기에 “무엇을 해야”라고 여쭙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했으니 당연히 구원을 주십시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겸손하게 아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② 율법교사에게 되물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10,25)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10,26)하고 되물으십니다. 이렇게 되물으시는 이유는 그의 말로 그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당시 율법교사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의 규정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교사들은 613가지의 율법규정들을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규정들을 지키면서 내용보다는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들면 정결례 규정을 지키면서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라고 물으신 다음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다시 물으시는 것입니다.

 

③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루카10,27)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마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율법학자 하나가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그르쳐 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장엄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유다인들은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신명기6,5)을 상기하였으며,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④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던 율법교사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해 주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루카10,28ㄱ) 그리고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10,28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임을 명심하며,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율법교사를 대하시는 모습을 통해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노력하고 있다면 그 노력하는 모습을 보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행동이 옳다면 칭찬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칭찬하고 격려해 줄 때, 그 사람도 변화됨을 알아야 합니다.

 

⑤ 이어지는 교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9)

교만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로부터 너그러운 칭찬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을 들은 율법교사는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해졌어야 하는데, 다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9)

 

이 율법교사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9)라고 예수님께 질문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율법의 규정대로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유다인들에게 이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레위19,34). 자신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할례를 포함하여 율법을 준수하는 완전한 개종자들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대파의 사람들도 이 사랑의 계명의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다보니, 자신들의 형식적인 믿음과 사랑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믿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고, 이방인들에게는 사랑을 베풀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는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가르쳐주셨고,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① 강도를 만난 사람과 지나가는 사제와 레위인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들의 습격이 빈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들의 상황에 맞게 비유를 드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루카10,30)

 

이 사람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거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라는 직책으로 보아 이 불쌍한 부상자에게 당연히 동정을 가지고 돌보아 주어야 할 터인데 그는 못 본 체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사제와 함께 신명기에 있는 “너희는 동족의 나귀나 소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모른체 해도 안 된다. 반드시 동족을 도와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명22,4)고 한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나쳐 버립니다.

 

아마 이들은 이 사람이 반쯤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레위21,1). 아니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강도들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단지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일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들을 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데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했지만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착한 사마리아 사람

그런데 유다인들 중에서 사랑과 자비를 가장 많이 베풀어야 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지만 유다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그를 보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10,33-24)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예 상종하지도 않았고, 서로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가엾게 여깁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유다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았지만 초주검이 된 유다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입니다.

 

이튿날,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10,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③ 내 옆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해야 합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놔두고 지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그를 돌봐 줍니다. 신앙인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를 데리고 병원까지 달려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순교자의 밤 행사가 있던 날입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전례담당자가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습을 했던 담당자가 오지 않으니 신부님도 당황했고, 다른 사람들도 당황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여 순교자의 밤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순교자의 밤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 그날 전례 담당자가 살며시 들어와서 성호경을 긋고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신부님께 그날 전례담당자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성당에 오는데 앞에 어떤 할머니가 길가에 쓰러져 계시더라구요. 뺑소니를 당한 것 같았습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분과 함께 하길 바라실 꺼야! 아냐! 이 사람이 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 어떻게 하지? 도와주려고 했다가 오히려 피해를 당할 텐데……, 아냐!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그렇게 그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가족들에게 알리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도 다들 전례에 참가하느라 전화를 꺼 놔서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 앞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서 계시는군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데에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조금만 내어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이웃 사랑을 위한 마음이 있습니까?

 

④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이제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10,36)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편협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웃은 자신의 동족이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로 이웃임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ㄱ)라고 답을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옹졸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대답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멋진 일을 했기에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옹졸하다.”고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ㄴ)

 

예수님께서는“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나에게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그와 나와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 참 안됐어~”하는 생각이 든다면 몸이 당연히 움직여야 함을, 손이 당연히 움직여야 함을 명심합시다.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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