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20주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려고 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옳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에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믿지 않는 이들과는 갈등이 종종 생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것에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옳은 것을 말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묵상해 봅시다.

 

2.1.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몸소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에 평화를 주셨습니다(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러나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것처럼, 신앙인들은 이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다가오는 유혹들을 이겨내고, 불의에 당당하게 저항하며,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12,4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도 하지만 순수하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메마른 대지에 불이나면 모든 것이 타 버립니다. 그런데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불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은 강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줍니다. 쇠 덩어리를 가지고 멋진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쇠 덩어리를 녹이는 것입니다. 불로 녹여서 새로운 모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산에서 캐온 금덩어리들에는 다른 물질들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을 순수한 금으로 만드는 방법은 불로 가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물들은 모두 태워 버리고 오로지 순수한 금만 남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은 필요 없는 것을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새롭게 합니다. 불은 강한 것은 부드럽게 만듭니다. 불은 그 안에서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보다는 자신이 더 영광을 받으려 하였으며,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가로막고, 그들에게 길을 인도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계속해서 보내셨지만 이 백성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오히려 거짓예언자가 판을 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의 마음에 믿음의 불을 지르러 오신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라고 칼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지르시는 불에 나를 맡겨야합니다. 내 안에 쓸데없는 것들을 태워 버리고, 무딘 마음을 다시 새로워지게 하며, 다시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2.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세상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그러자 불순물들(불신, 이기심, 사리사욕, 탐욕, 죄 등)이 먼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백성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악한 마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자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불을 끄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지르신 불을 통하여 참된 목자를 만나게 되었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변화된 삶(세리와 창녀들의 회심 등)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어떻게 불을 지르실 것인지를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통의 세례는 수난과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원의 불을 지르십니다. 그러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메시아의 고통)의 고통을 잘 알고 계셨기에 그 고통을 이겨내시기 위해 늘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체험한 이들과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감추고자 하는 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세상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2.3. 분열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신앙생활을 하면서 큰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이 생겨 편이 갈리고, 서로 시기질투하게 되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실망하며 갈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망설이게 되며, “주님을 몰랐더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하면서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는 큰 평화가 밀려옵니다. 갈등과 서운함은 그저 분심일 뿐이고, 형제자매들이 나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경속에서 오히려 더 큰 평화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분열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분은 메시아다, 저분은 그냥 예언자다”,“저분은 사기꾼이다. 저분은 죄인이다”,“저분은…,” 이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죄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각자의 선택은 서로를 갈라놓게 되는 것입니다.

 

② 서로 갈라지는 사람들

주님께 대한 태도가 다르면 행동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루카12,52)는 말씀과 같은 상황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믿지 않는 이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전교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듭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다 보았기 때문에 “우리 성당가요”하면 “야! 너나 잘해!”“나는 성당 안다녀도 너 만큼은 해!” 이런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는 포기하게 되고 “그래!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하면서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당당해져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양보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인내하고 있으며, 사랑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을 이야기해도 외면하고, 미루고, 심지어 조롱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앙생활을 하기에 이 정도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 “비신자 배우자의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을 하고,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비신자 배우자 쪽에서 “내 배우자가 신앙생활을 그만두면 어떻게 하지?”걱정할 정도로 내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③ 가정 안에서의 분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이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가까운 관계이고, 그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어떤 행동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 안에 불신이 자라나면 그 누구도 화해를 시키기 어려운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12,53)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가 고등학교에만 올라가면 신앙생활을 권하지 않고, “대학교 가면 신앙생활 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오로지 학교 공부에만 전념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께서 오신다면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 책임을 넘기고, 아버지는 또 아들에게 그 책임을 넘기게 될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서로 위해줄 수 있는 관계이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부려먹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빨리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그 가정에 행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며느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시어머니, 성당에서는 열심히 활동하고, 노인들을 위해서 봉사도 많이 하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시어머니는 쳐다보지도 않는 며느리. 그들은 사랑의 불로 편협한 마음들을 태워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불신을 태워 버리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갈 때 나는 옳은 것은 옳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주님 편에서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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