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작은아들)과 함께 하시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큰 아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탕자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탕자의 비유는 두 형제를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알리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두 아들(회개한 죄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아버지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죄인들까지도 받아들여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더 나아가 모두 아버지의 마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지만 죄인의 회개를 더더욱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탕자를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의 모습 안에서 나의 옹졸한 마음을 보아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가가기로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2.1. 재산 분할을 청하는 작은 아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하고 아버지께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중동 지방의 사람들에게 한 신부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면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네 마을에서 이제까지 누군가가 그와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때렸을 것입니다.”
“왜지요?”
“그의 요구는 한 마디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이니까요.”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것을 통해서 편안함을 누릴 권리가 당연히 있습니다. 모든 수익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물려주는 것이 바로 유산입니다. 그 유산은 부모가 돌아가셔야 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라는 것은 “아버지, 아버지가 죽지 않아서 아버지의 재산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렸지만 돌아가시지 않으니, 나중에 저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렇게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아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관심이 없고, 부모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가정을 파괴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또 재산 때문에 자녀들이 갈라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② 자기 몫을 챙겨 떠난 작은 아들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꿈을 막고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그는 먼 고장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산과 거지꼴입니다.
2.2.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 작은 아들
① 모든 것을 탕진한 작은 아들의 비참함
작은 아들이“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루카15,14), 즉 흥청망청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였을 즈음에 그 고장에는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벌지 않은 재산이었기에 더욱 쉽게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자 그는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이방인을 반길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사실 그들을 친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탕자는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떨어져 버린 그에게 남아있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탕자는 이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습니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루카15,15). 그런데 유다인들은 돼지를 불결한 동물이라고 생각을 했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② 굶주리는 작은 아들의 비참함
부잣집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가족을 떠나 거지가 되었습니다. 가장 비참한 처지로 떨어져 돼지를 치게 되었고, 자신이 받은 수입으로는 식사조차 해결 할 수 없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루카15,16)이란 표현과 “아무도 주지 않았다.”(루카15,16)말을 통해 작은 아들의 비참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③ 비참함 속에서 정신 차린 작은 아들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탕자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루카15,17)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고, 용서를 청할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똥줄이 타야 기도가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절박한 상황이 닥쳐야 만이 매달리게 되고, 자신이 버렸던 것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 그리고 자신의 헛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가지고 나온 철없는 모습, 멀리 타지로 떠나와 그곳이 자신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며 친구들과 흥청망청 방탕한 생활을 하던 탕자, 모든 재산을 탕진했을 때 등을 돌려 버린 친구들, 그리고 비참하게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열매라도 배불리 먹고 싶어 했던 탕자. 이제 그의 생활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일꾼들의 생활과도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품삯을 받았고, 먹을 양식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굶어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굶주림과 비참함 속에서 정신 차린 작은 아들은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루카15,18-19)라고 청하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보속으로 아버지께 “날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써 달라고” 청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자에게 아버지는 주인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는 오히려 자신이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는 돼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음이 행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아버지와 함께 함이 가장 큰 행복임을 늦게야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기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④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고, 예수님의 사랑을 몰랐기에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왔습니다. 생명을 택했습니다. 나도 이런 처지에 자주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깨닫고,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거나, 집에 갈 때는 “용돈이 떨어졌을 때”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전화를 드리면 부모님은 반가워하시고, 또 용돈도 듬뿍 보내주십니다. 자녀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주고도 혹시 덜 주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분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그것밖에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시는 분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보다 헤아릴 수 없는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2.3. 아버지와 작은 아들
①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 아들
비참한 처지에서 아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바로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게 됩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한 아들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아버지의 눈을 아들이 돌아오는 길을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거지꼴로 집에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은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루카15,20)
② 용서를 청하는 작은 아들
자신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잘못을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이렇게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용서를 청합니다.
그런데 자격이 있어서 아들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조건을 걸고 아들로 받아들이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아들은 비록 아버지에게 조건이 있을지언정,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을 붙이시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반겨 주십니다.
③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15,22) 비록 잘못했지만 아버지는 사랑으로 안아 주십니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가장 좋은 옷”은 위대한 인물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넓은 값진 옷을 의미합니다. 또한 반지는 특별한 권위와 명예의 표시입니다.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입니다. 종들은 맨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에게 본래의 권리와 지위를 다시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④ 기쁨의 잔치를 여는 아버지
이제 기쁨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3-24)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2.4.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큰 아들
① 큰 아들의 불만
그런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바로 큰 아들의 자리입니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이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은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루카15,2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큰 아들에게 있어서 아우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간 순간 그에게 동생이라는 존재는 사라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날려먹은 동생은 필요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필요 없다고 뛰쳐나간 동생은 형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② 아버지와 큰 아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루카15,28) 형이 동생을 사랑했다면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이 필요 없다고 떠나버린 동생이라 할지라도, 더 나아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③ 아버지를 비난하는 큰아들
큰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그런데 큰 아들은 아버지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큰 아들은 “① 종처럼 아버지를 섬겼고, ②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③ 동생에게는 유산을 내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없는 사랑을 주시는데 말입니다. 지금 아버지의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인데도 말입니다.
더 나아가 동생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하며 “저 아들”(루카15,30)이라고 표현하며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15,30)
큰아들은 아버지의 이 행동을 통해서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존감의 결여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큰아들이고,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바로 그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2.5. 아버지의 자식 사랑
아버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옹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큰 아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 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31) 그리고 동생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①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② 아버지인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므로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이 바로 큰 아들의 아우임을(너의 저 아우) 상기시키며 그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음을 알려 줍니다. 형을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죽음의 길로 향했지만, 이제 다시 돌아와 생명의 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한 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와 철없던 작은 아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동생을 인정하지 않는 큰 아들. 이 이야기에서 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①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재산을 달라는 아들에게 재산을 주고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언제나 돌아오려나?”하며 늘 학수고대 하며 아들을 기다렸으며,
③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며, 질책하지도 않으셨던 아버지
④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 주며, 신발을 신겨 주신 아버지,
⑤ 그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며
⑥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아들의 마음에 사랑을 호소하는 아버지의 모습.
나는 이러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될 때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 주듯이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줄 수 있으며, 사랑과 평화를 느끼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변화되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