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25주일;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


약은 집사의 비유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재빠르고도 영리하게 자기 앞가림을 하는 약은 집사(청지기)를 칭찬 하십니다. 그의 부도덕함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자기 앞을 생각한 집사의 자세를 통해서 신앙인들도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는 나. 어떻게든 방법을 구해야 합니다. 그동안 소홀히 한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열심히 생활 하고, 기도생활도 충실히 하고……,

 

2.1. 부정직한 집사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주인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재물의 관리인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맡겨진 재물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내 삶을 위해 투자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집사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서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16,2)

집사는 상당히 큰 권한을 가지고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이 드러날 경우 쫓겨나기는 하지만 팔려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정이 발각되어 해고가 통지되었습니다. 변명의 기회도 없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변명할 기회도 없고, 변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판단하시니 말입니다.

 

2.2. 부정직한 집사의 선택

주인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낭비하다가 쫓겨나게 된 집사는 이제 자신의 장래를 걱정합니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16,3) 부정을 저지르다 발각되어 해고를 당한 것이기에 더 이상 그를 집사로 써 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좋은 생각을 떠 올립니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4) 부정직한 집사는 자신이 집사 자리에서 쫓겨나도 자신을 맞아들일 사람을 만들려고 합니다. 바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불려 나갔을 때 나를 기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옳지! 좋은 수가 있다. 오늘부터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어야지. 그리고 예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선행과 자선을 보여 드려야지. 그리고 성모님께도 전구를 청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의 행동은 바쁘게 변할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야겠지요. 이 집사처럼 말입니다.

 

2.3. 빚을 탕감해주는 부정직한 집사

부정직한 집사는 빚을 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서 빚을 탕감해 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시작합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루카16,5) 집사는 빚진 사람들의 빚을 조작합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루카16,6)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으니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루카16,7)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름 백 항아리를 빚진 사람에게는 쉰 항아리로 적게 하고,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여든 섬이라고 적게 합니다. 당시의 돈으로 환산하면 오백 데나리온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들의 하루 품삯이니 많은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준비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부정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실까요? 우리보고 이렇게 부정을 저지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 부정직한 집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 나의 삶”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2.4.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는 주인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당연히 불의한 집사는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주인은 그를 칭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행동은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비유가 불의한 집사를 벌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직하고 교활한 집사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적어도 자신의 장래를 걱정할 줄 알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는 그 부정직한 집사의 모습을 통해 신앙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2.5. 하느님 나라와 재물

예수님께서는“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16,8)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저희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세상에서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끼리 거래”(루카16,8)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영원한 삶은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정이 통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와 나눔과 희생이 통하는 것입니다.

 

①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16,9)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루카16,9)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라고 하시는데 그 불의한 재물은 무엇일까요?

불의한 재물(세속의 재물)은 부정한 수단으로 벌어들인 재산이란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재산에 집착하기 쉽고 또 악한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므로 재산을 불의한 재물(세속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세속의 재물(불의한 재물)로 부정하게 이 세상에서 친구를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사랑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풀고, 필요한 곳에 나눠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을 움켜잡지 말고, 내 것을 참된 나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써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불의한 재물)이 나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기를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움켜잡기만 하는 나의 손을 바라보시며 주님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그런 나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주실까요?

 

②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들

나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 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 친구는 내가 죽음을 맞이하여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될 때 나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줄 것입니다. “주님! 그 형제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고,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의 허물을 보지 마시고 저희의 정성된 기도를 들으시어, 그가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소서.”이렇게 나를 위해 하느님께 빌어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③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친구 만들기

신자들이 장례식장에 연도를 가지만 부의금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연도를 바치고 음식을 먹지 않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의금도 하지 않았는데 금전적인 손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작은 부의금이 상을 당한 형제자매들에게는 도움이 되고, 비록 그가 나에게 부의금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갚아 주실 것이니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함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함께 간 형제자매들이 조금씩 모아서 부의금을 내는 것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혼배미사 때의 축의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배미사에서 성가를 불러주고, 함께 미사에 참례해서 기쁨을 함께 나눈다면 당연히 축의금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계산하다보면 “상대방은 안 했으니 나도 안 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아까워하면서 움켜잡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④ 신앙인의 재물 다루기

의인은 성실함으로 살아갑니다.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의인은 아주 작은 것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알고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재물과 내 생명까지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관리자”입니다. 청지기인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16,10)는 것은 기쁘게 내어 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움켜잡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도 내어 주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성실하게 살아갈 수 없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의 것을 기쁘게 봉헌하고, 함께 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성실한 삶이고, 하느님 나라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많은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구원의 발판으로 쓰길 원하십니다.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돕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내어 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마치 나 자신만을 위해 주어졌다고 착각하면서 재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재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만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는 이들, 움켜잡는 이들, 자선을 베풀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16,12)

 

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16,13)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움켜잡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이들은 재물만 바라보기에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렇게 재물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들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물론 재물이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재물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재물만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하느님은 눈에서 멀어지게 되고, 하느님 나라는 내가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재물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로 향할 때, 나는 변화되게 됩니다. 첫 자리에 모신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성실한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관리자, 재물의 관리자, 생명의 관리자, 그리고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섬기려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 하느님과 재물은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에 마음이 가 있기에 몸도 재물을 벌어들이고 관리하는 곳에 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재물이 필요하지만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느님께로 몸과 마음이 가 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복지 시설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해 주고, 가난한 이들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자신의 재물을 내어 놓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서 다른 이들도 변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재물을 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모든 행동을 어리석게 봅니다. 그들 눈에는 나누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고, 베푸는 것도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어리석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확실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게 바라보는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은 슬기롭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멀어진 사람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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