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은 구원을 끌어당기는 보화
자선이란 말을 풀이해보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렇게 선함을 사랑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 것입니다. 자선의 다른 말은 애긍입니다. 애긍(哀矜)이라는 말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이를 불쌍히 여겨 슬퍼하며 물질적으로 돕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랑을 가진 이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를 외면하지 않고,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고 있는 이는 결코 어려움에 처한 이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애긍보다는 자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자선을 회개하였음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캐오가 주님을 만나 회개한 후 기꺼이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는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가?”로 드러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내 방식대로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마태25,31-46)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선행을 쌓는 것이며, 내 죄의 보속을 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또한 자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외면하는 것은 죄를 끌어당기는 일입니다. 이것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16,19-31)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부자는 넉넉한 사람입니다. 넉넉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라자로가 바라는 것은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입니다. 당시 고기를 손으로 집어 먹으면 손에 묻은 기름을 빵으로 닦아 냈습니다. 가난한 라자로가 원한 것은 화려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 했습니다. 만일 부자가 라자로를 집에 불러들여 한 끼라도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면 주님께서는 그 부자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25,34-36)
그러나 부자는 이 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였습니다. 가난한 라자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부자는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청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루카16,24)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닫히는 순간, 나는 이런 운명을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
그러므로 자선은 하느님 자녀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