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일을 한다면 그의 편을 들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물 한 잔이라도 주님의 사람이기에 주님의 사람에게 베푸는 이에게는 큰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으며 먼 거리를 여행한 이에게는 시원한 물 한잔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별 것 아니지만 그는 그 물을 통해서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그것이 형제자매들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물 한 잔 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잘 해 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작은 양보와 너그러움, 그리고 다가감일 것입니다. 용서를 청함과 화해의 악수일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한 배려와 웃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어려워하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나서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상처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비신자와의 관계는 좋으면서도 신자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비신자와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신앙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또한 물 한 잔 주기를 꺼려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작은 것 하나 내어줌을 통해, 하늘의 큰 축복을 얻게 됨을 반드시 명심합시다.
요한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9,38)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지도 않으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당황했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았습니다. 요한이 그의 구마예식을 막은 이유는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예식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요한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행동을 한 후에 요한은 자기 행위가 잘못인지 아닌지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예식을 행하는 이를 막았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마르9,39)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켜 마귀를 쫓아냈는데 예수님을 나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이름의 권능을 직접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서로가 드러나지 않고, 서로를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신자였구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신자였구나!”나는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역시 신자는 다르구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용서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주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기도하고 봉사하고 함께 하는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하다 할지라도 무시해서도 안 되고, 나보다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시기질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다 하여 “너랑은 더 이상 일 못하겠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팀이기 때문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자매들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지지하는 한 형제자매가 됩시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한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사람이기에 물 한잔을 주는 이에게 상을 내리시겠다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의 사람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벌이 작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시는데, 물에 던져 죽이는 사형방법이 이스라엘에는 없었지만, 로마인은 이런 형벌을 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사형 방법과 함께 팔레스티나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경우, 시체를 묻을 수가 없어서 몹시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자맷돌을 달고 물속에 들어가면 죽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 때문에 냉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해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해서 등을 돌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상처를 주어서 마음이 닫힌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하! 그들에게 다시 다가가지 않는다면 내가 화를 입게 되는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가 신앙에서 멀어졌기에 화를 당할 것이고, 나는 그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기에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깨어 있어야 할 사람이 “사제”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신자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아픔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을 죄짓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순진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그냥 믿어줍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는 말들을 그냥 받아들여 줍니다. 왜냐하면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른 길에서 방황하게 하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직 튼튼하지도 못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잘못 이끈다면 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 지을 기회를 단호하게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죄짓게 하거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결코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9,43.45)
예수님께서는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 위하여 단호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단호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두 손을 자르는 마음으로, 두 발을 자르는 마음으로 단호해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화투에 미친 사람들은 손이 끊어져도 화투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게임에 중독된 친구들은 시험도 포기하고, 좋은 학교도 포기하고 오로지 게임에만 매달립니다. 큰 충격이 있어야 만이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런 결심을 할 때는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자르는 마음으로 단호하게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손 없는 사람, 발 없는 사람, 눈 없는 사람 천지가 아닐까요? 손과 발, 눈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호한 결정을 하는 것이 영원한 벌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친구들안에서 나는 나를 내어주고, 친구들을 받아들여 주고, 그가 예수님께로 갈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 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부주의한 말 한마디 던졌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적이 되려고 다가온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을 기회를 단호하게 피하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7-48)
죄 지을 기회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그 결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하는 내가 되어 봅시다. 망설이는 내가 되어 봅시다. 그렇게 고민하며 하는 행동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목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만 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을 믿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님을 지지하지는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자매들을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고, 언제나 주님 편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그렇게 형제자매들을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줍시다. 부족하더라도 주님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 노력을 지지해 이어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고 기도해 줍시다.
우리는 보통 예의 없는 사람을 뒷담화 할 때 “싸가지 없다.”, “소갈머리 없다.” 등의 말을 합니다. “싸가지”는 “느자구”와 함께 “싹수”의 방언인데 “싹수”는 “앞으로 성공하거나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그르다”, “보이다”와 함께 쓰이며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을 판단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그 형편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미루어 그 사람의 앞날 역시 형편없으리라는 뜻이었으나, 요즘은 단순히 눈앞에 벌어지는 행동이 형편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들어서 좋은 것이 아니므로 함부로 입으로 발설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거나 뒤에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보통의 경우는 “나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없다”와 붙게 될 경우에는 보통의 경우 어른을 공경하지 않을 때, 당연한 배려를 하지 않을 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을 때, 이기적이며 자신만 생각할 때, 함부로 욕설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낼 때,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양보하려 하지도 않을 때 표현하는 “욕”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다”와 붙게 될 경우에는 “앞으로 잘 될 것 같다.”는 칭찬의 의미입니다.
“싹수”는 식물의 씨앗에서 제일 먼저 트이는 잎을 말하는데, 싹수가 없으면 그 식물은 결국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싹수가 노랗게 변하면” 그 식물도 죽게 되는 식물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어릴 적부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자세가 올곧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의 생각이 옹졸하고 이기적이거나 무례할 때는 “소갈머리 없다.”고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상식적인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갈딱지하곤…,”하면서 그의 옹졸함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머리”라는 말은 명사의 뒤에 붙어서 앞에 있는 말을 부정적이고 속되게 표현하며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면 “버르장머리 없다, 인정머리 없다. 채신머리 없다. 주변머리 없다.” 등입니다. “머리”와 비슷한 접미사로는 “딱지”가 있습니다. “소갈딱지, 주변딱지”등이 이에 속합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연결되어 관용구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젓갈로 유명한 밴댕이는 성격이 급하여 잡히자마자 죽어 어부말로는 살아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사람, 속이 좁고 너그럽지 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을 비유적으로 “밴댕이 소갈머리”라고 합니다.
물론 내 눈에는 “있고 없고”가 명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가는 순간 나 또한 “입고 없고”의 판단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할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임을 꼭 기억하고, 웬만하면 긍정적인 말로 표현하고, 칭찬과 격려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나도 판단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83년 겨울 이벽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이 천주교에 대해 더 알아오기를 부탁했고, 북경의 북당(北堂) 성당에 도착한이승훈은 1784년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를 보낸 적이 없는 나라에서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청한 것은 그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이승훈은 세례를 받기 전에 ‘박해를 각오할 것, 첩을 두지 않을 것’ 등을 약속하였고, 귀국길에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 등을 가지고 왔다. 1784년 겨울, 이승훈은 서울 수표교근처의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조선에 첫 신앙공동체[교회]가 형성되었다. 이 때 이벽(세례자 요한), 정약전과 정약용(요한) 형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을사년(1785)에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이 이벽의 주도로 김범우의 집에서 예식을 거행하던 중 순찰을 돌던 추조(형조) 관원들에게 적발되었다. 이것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모임이었기에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 신자들이 대부분 남인 양반이어서 곧 훈방되었으나 중인 김범우는 감옥에 갇혀 신문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는 유배형을 받아 귀양을 떠났고,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유배지에서 1786년 가을에 순교하였다.
예수님 편에 선 우리가 받게 되는 상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일을 한다면 그의 편을 들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물 한 잔이라도 주님의 사람이기에 주님의 사람에게 베푸는 이에게는 큰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으며 먼 거리를 여행한 이에게는 시원한 물 한잔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별 것 아니지만 그는 그 물을 통해서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그것이 형제자매들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물 한 잔 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잘 해 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작은 양보와 너그러움, 그리고 다가감일 것입니다. 용서를 청함과 화해의 악수일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한 배려와 웃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어려워하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나서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상처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비신자와의 관계는 좋으면서도 신자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비신자와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신앙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또한 물 한 잔 주기를 꺼려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작은 것 하나 내어줌을 통해, 하늘의 큰 축복을 얻게 됨을 반드시 명심합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
요한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9,38)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지도 않으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당황했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았습니다. 요한이 그의 구마예식을 막은 이유는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예식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요한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행동을 한 후에 요한은 자기 행위가 잘못인지 아닌지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예식을 행하는 이를 막았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마르9,39)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켜 마귀를 쫓아냈는데 예수님을 나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이름의 권능을 직접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서로가 드러나지 않고, 서로를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신자였구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신자였구나!”나는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역시 신자는 다르구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용서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주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기도하고 봉사하고 함께 하는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하다 할지라도 무시해서도 안 되고, 나보다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시기질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다 하여 “너랑은 더 이상 일 못하겠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팀이기 때문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자매들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지지하는 한 형제자매가 됩시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한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의 제자들을 죄짓게 하는 이들이 받게 되는 벌
예수님의 사람이기에 물 한잔을 주는 이에게 상을 내리시겠다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의 사람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벌이 작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시는데, 물에 던져 죽이는 사형방법이 이스라엘에는 없었지만, 로마인은 이런 형벌을 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사형 방법과 함께 팔레스티나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경우, 시체를 묻을 수가 없어서 몹시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자맷돌을 달고 물속에 들어가면 죽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 때문에 냉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해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해서 등을 돌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상처를 주어서 마음이 닫힌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하! 그들에게 다시 다가가지 않는다면 내가 화를 입게 되는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가 신앙에서 멀어졌기에 화를 당할 것이고, 나는 그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기에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깨어 있어야 할 사람이 “사제”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신자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아픔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을 죄짓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순진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그냥 믿어줍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는 말들을 그냥 받아들여 줍니다. 왜냐하면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른 길에서 방황하게 하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직 튼튼하지도 못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잘못 이끈다면 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 지을 기회를 단호하게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죄짓게 하거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결코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9,43.45)
예수님께서는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 위하여 단호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단호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두 손을 자르는 마음으로, 두 발을 자르는 마음으로 단호해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화투에 미친 사람들은 손이 끊어져도 화투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게임에 중독된 친구들은 시험도 포기하고, 좋은 학교도 포기하고 오로지 게임에만 매달립니다. 큰 충격이 있어야 만이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런 결심을 할 때는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자르는 마음으로 단호하게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손 없는 사람, 발 없는 사람, 눈 없는 사람 천지가 아닐까요? 손과 발, 눈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호한 결정을 하는 것이 영원한 벌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친구들안에서 나는 나를 내어주고, 친구들을 받아들여 주고, 그가 예수님께로 갈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 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부주의한 말 한마디 던졌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적이 되려고 다가온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을 기회를 단호하게 피하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7-48)
죄 지을 기회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그 결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하는 내가 되어 봅시다. 망설이는 내가 되어 봅시다. 그렇게 고민하며 하는 행동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목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만 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을 믿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님을 지지하지는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자매들을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고, 언제나 주님 편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그렇게 형제자매들을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줍시다. 부족하더라도 주님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 노력을 지지해 이어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고 기도해 줍시다.
예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들
우리는 보통 예의 없는 사람을 뒷담화 할 때 “싸가지 없다.”, “소갈머리 없다.” 등의 말을 합니다. “싸가지”는 “느자구”와 함께 “싹수”의 방언인데 “싹수”는 “앞으로 성공하거나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그르다”, “보이다”와 함께 쓰이며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을 판단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그 형편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미루어 그 사람의 앞날 역시 형편없으리라는 뜻이었으나, 요즘은 단순히 눈앞에 벌어지는 행동이 형편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들어서 좋은 것이 아니므로 함부로 입으로 발설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거나 뒤에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보통의 경우는 “나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없다”와 붙게 될 경우에는 보통의 경우 어른을 공경하지 않을 때, 당연한 배려를 하지 않을 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을 때, 이기적이며 자신만 생각할 때, 함부로 욕설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낼 때,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양보하려 하지도 않을 때 표현하는 “욕”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다”와 붙게 될 경우에는 “앞으로 잘 될 것 같다.”는 칭찬의 의미입니다.
“싹수”는 식물의 씨앗에서 제일 먼저 트이는 잎을 말하는데, 싹수가 없으면 그 식물은 결국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싹수가 노랗게 변하면” 그 식물도 죽게 되는 식물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어릴 적부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자세가 올곧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의 생각이 옹졸하고 이기적이거나 무례할 때는 “소갈머리 없다.”고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상식적인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갈딱지하곤…,”하면서 그의 옹졸함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머리”라는 말은 명사의 뒤에 붙어서 앞에 있는 말을 부정적이고 속되게 표현하며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면 “버르장머리 없다, 인정머리 없다. 채신머리 없다. 주변머리 없다.” 등입니다. “머리”와 비슷한 접미사로는 “딱지”가 있습니다. “소갈딱지, 주변딱지”등이 이에 속합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연결되어 관용구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젓갈로 유명한 밴댕이는 성격이 급하여 잡히자마자 죽어 어부말로는 살아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사람, 속이 좁고 너그럽지 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을 비유적으로 “밴댕이 소갈머리”라고 합니다.
물론 내 눈에는 “있고 없고”가 명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가는 순간 나 또한 “입고 없고”의 판단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할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임을 꼭 기억하고, 웬만하면 긍정적인 말로 표현하고, 칭찬과 격려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나도 판단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훈의 세례와 한국 교회
1783년 겨울 이벽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이 천주교에 대해 더 알아오기를 부탁했고, 북경의 북당(北堂) 성당에 도착한 이승훈은 1784년 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를 보낸 적이 없는 나라에서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청한 것은 그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이승훈은 세례를 받기 전에 ‘박해를 각오할 것, 첩을 두지 않을 것’ 등을 약속하였고, 귀국길에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 등을 가지고 왔다. 1784년 겨울, 이승훈은 서울 수표교 근처의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조선에 첫 신앙공동체[교회]가 형성되었다. 이 때 이벽(세례자 요한), 정약전과 정약용(요한) 형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을사년(1785)에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이 이벽의 주도로 김범우의 집에서 예식을 거행하던 중 순찰을 돌던 추조(형조) 관원들에게 적발되었다. 이것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모임이었기에 모두 형조로 끌려갔다. 신자들이 대부분 남인 양반이어서 곧 훈방되었으나 중인 김범우는 감옥에 갇혀 신문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는 유배형을 받아 귀양을 떠났고,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유배지에서 1786년 가을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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