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많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지만 오늘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보다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유다교의 계명에는 613개가 있었습니다. 248개는 명령이고 365개는 금령입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어떤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유대 종교는 점진적으로 하나의 율법 체계를 발전시켜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 즉 “시나이 산에서의 모세의 율법”을 자기네가 받았다는 것을 큰 긍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들의 전체 삶을 규정해 놓은 법으로서 잘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어떻게 하면 그 수많은 규정을 일상생활 속에서 잘 준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늘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율법학자도 그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쾌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29-30)
이 말씀은 신명기 6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이 매일 아침 외우던 중대한 기도의 시작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이들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심리학에서 지혜가 담긴 자리였습니다. 목숨을 다하고는 정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리적인 모든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에 이어서 둘째 계명도 가르쳐 주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루카12,31)
율법학자는 이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둘째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친구들, 동료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안과 이방인 그리고 유다인, 세리와 죄인 그리고 생활이 문란한 여인과 의인이라고 보여 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친구, 적 모두가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구별 없이, 종교, 지위, 남녀노소 등을 떠나 모든 이가 이웃이고, 우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필요한 경우 용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편협한 이웃 사랑은 참된 이웃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 규정을 십계명으로 환원하셨고, 십계명은 다시 이렇게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은 더더욱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기쁨이 따라오고 기쁨이 열매 맺으면 평화는 당연히 열매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열매 맺으면 이웃 사랑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 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좋을 때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더 나아가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내가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귀한 자녀가 됩시다.
첫째가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하느님의 귀한 자녀가 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