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7/14)


    말씀의 초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일종의 반어법이다. ‘평화’를 강조하시고자 완전히 반대되는 관계에 있는 ‘칼’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만큼 평화를 갈망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복음).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분명하게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칼은 자르는 도구입니다. 무엇을 자르라는 말씀인지요?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가족을 자르라는 말씀입니다. 평생 사랑해야 할 가족입니다. 삶의 이유요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를 수 있단 말입니까? 가족만을 위하여 악착같이 재물을 모으고 있다면 이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식 사랑에 내몰려 정신없이 살고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 자식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한 애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집착을 끊는 칼입니다. 아집을 자르고 편견을 도려내는 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칼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가족만 소중한 듯 행동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칼’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당연히 귀한 법입니다. 평범한 이 진리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녁노을(모니카)





♬ 임쓰신 가시관  

 

 




이 글은 카테고리: 오늘의독서·묵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저씨! 백숙하려고 하는데 닭4마리 주세요
     녜!아주머니 2만원입니다
    어머! 죄송해서 어떻하죠? 지갑을 안갖고 왔네요
     집에 가서 돈을 갖고  다시 오겠습니다
    아주머니 다음에  오실 때 가지고 오시구요 
    그냥 가지고 가세요 

    아니!

    아저씨 저 여기 오늘 처음 왔는데요 저를  모르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오늘 첫손님인 것 같은데 아침부터 외상하면
    안되지요  집에 갔다 오겠습니다 
    아주머니 묵주반지 끼신 것 보고 그냥 드립니다
    다음에  지나가시면 주세요 
    아휴!고맙습니다 죄송하구요

    참 아저씨 교우세요? 
    저는 성당에 안나가구요
    집사람이 갈마동성당에 다닙니다 아주머니는 어디 성당에 다니세요? 
    예 저는 태평동성당 교우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주님!

    오늘 닭을 사러 시장에 갔는데  닭집 아저씨께서 저의
    묵주반지를 보시고 외상으로 주셨습니다 
    얼마나 죄송한지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더구나  저를 알지도 못하시는데 묵주반지를 끼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도 첫 손님이었는데 외상으로 주셨습니다
    곧 바로 닭값을  갔다 드렸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즈음  세상에 각박해서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지갑을 안가지고 왔다는 말에  의심하지 않으시고
    신자도 아닌  아저씨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인이면서도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신앙인으로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앵무새처럼
    당신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대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입으로만....
    언제나 공수표를 날리고...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입으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시편 19,14)

    ”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구원이 되신 주 희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울려지기를 원하네

    아멘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묵상하며


    ♬ 임쓰신 가시관

  2. user#0 님의 말: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1. 말씀읽기: 마태10,34-11,1

    2. 말씀연구

     신앙생활 하면서 마음에 평화도 있지만 분열도 있고, 기쁨도 있지만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비추어 내 행동들을 바라볼 때, 충실하게 살아가는 기쁨보다는 부족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만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아  봅시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메시아의 재림에 앞서서,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재난과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평화 그 자체이신 메시아가 재림하신 그 때부터 모든 것은 질서와 평화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이 유다인의 전통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은 싸움이나 전쟁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기회이십니다.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인간을 둘로 갈라놓고, 서로 다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환영한다면 큰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를 적대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어둠의 자식은 빛의 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 올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도 어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을 빛으로 비추려고 합니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둑질을 하러 나가는 남편에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고 말할 수 없고, 자해공갈단인 시어머니에게 “많이 벌어오세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같이 도둑질을 하고, 같이 사기를 친다면 갈등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서로 같은 모습이니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도록 강요했을 때,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 모르고 소홀해졌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상과 벌을 내리실 때 당연히 신앙생활 못하도록 만든 부모나 형제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돌할 때에는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또 기억해야 될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 때문에 아들딸을 버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이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고3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들은 고3학생들을 성당에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잠도 못자고 피곤하니 주일 하루만이라도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기간에 학생들이 성당에 가지 않으면 혼내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권면하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가족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성당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부모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떠한 뜻인지 당시의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부터 약 20년 쯤 전에 로마인들은 유대인의 눈 앞에서 갈릴래아의 유다와 그 도당들을 수백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십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으로 고통을 짊어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벌써 저 골고타의 고통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랍비 나탄(기원 39년)은 “율법의 한 마디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지키며, 율법의 한 마디를 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중점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인간 생명의 목적으로 놓으시고,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잃는 사람, 곧 세상의 규범과 상반되는 복음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미래를 확립하기 때문에 자기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의 가치는 영원을 위하여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16,26)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보는 사람은 그 안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가 그 열정과 믿음이 있으니 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존중하고 있던 “손님을 환대한다.”는 관념을 생각해 봅시다. 랍비 요카난(기원279년)은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율법의 학교로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랍비 유다(기원 299년)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하느님 자신께 인사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나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환대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작은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냉수 한 그릇”은 뜨뜻미지근하고 구역질나는 물이 아니라, 집 옆에 깊게 판 저 차디찬 우물 물 한잔을 말하는 것으로써, 타는 듯한 사막을 지나온 나그네(예수님의 제자)에게 준다면 그에게는 얼마나 귀한 선물이겠습니까?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내 제자라고 하여”,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나 때문에 가족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신앙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②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구역모임, 레지오, 반모임, 직장 모임..기타 이런 모임에 나오라는 전화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알았어요. 갈께요.”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③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user#0 님의 말: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1. 말씀읽기: 마태10,34-11,1

    2. 말씀연구

     신앙생활 하면서 마음에 평화도 있지만 분열도 있고, 기쁨도 있지만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비추어 내 행동들을 바라볼 때, 충실하게 살아가는 기쁨보다는 부족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만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아  봅시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메시아의 재림에 앞서서,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재난과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평화 그 자체이신 메시아가 재림하신 그 때부터 모든 것은 질서와 평화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이 유다인의 전통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은 싸움이나 전쟁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기회이십니다.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인간을 둘로 갈라놓고, 서로 다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환영한다면 큰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를 적대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어둠의 자식은 빛의 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 올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도 어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빛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을 빛으로 비추려고 합니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둑질을 하러 나가는 남편에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고 말할 수 없고, 자해공갈단인 시어머니에게 “많이 벌어오세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같이 도둑질을 하고, 같이 사기를 친다면 갈등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서로 같은 모습이니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도록 강요했을 때,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 모르고 소홀해졌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상과 벌을 내리실 때 당연히 신앙생활 못하도록 만든 부모나 형제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돌할 때에는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또 기억해야 될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 때문에 아들딸을 버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이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고3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들은 고3학생들을 성당에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잠도 못자고 피곤하니 주일 하루만이라도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기간에 학생들이 성당에 가지 않으면 혼내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권면하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가족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성당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부모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떠한 뜻인지 당시의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부터 약 20년 쯤 전에 로마인들은 유대인의 눈 앞에서 갈릴래아의 유다와 그 도당들을 수백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십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으로 고통을 짊어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벌써 저 골고타의 고통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랍비 나탄(기원 39년)은 “율법의 한 마디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지키며, 율법의 한 마디를 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중점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인간 생명의 목적으로 놓으시고,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잃는 사람, 곧 세상의 규범과 상반되는 복음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미래를 확립하기 때문에 자기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의 가치는 영원을 위하여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16,26)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보는 사람은 그 안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가 그 열정과 믿음이 있으니 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존중하고 있던 “손님을 환대한다.”는 관념을 생각해 봅시다. 랍비 요카난(기원279년)은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율법의 학교로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랍비 유다(기원 299년)는 손님을 환대한다는 것이 하느님 자신께 인사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나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환대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작은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냉수 한 그릇”은 뜨뜻미지근하고 구역질나는 물이 아니라, 집 옆에 깊게 판 저 차디찬 우물 물 한잔을 말하는 것으로써, 타는 듯한 사막을 지나온 나그네(예수님의 제자)에게 준다면 그에게는 얼마나 귀한 선물이겠습니까?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내 제자라고 하여”,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나 때문에 가족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신앙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②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구역모임, 레지오, 반모임, 직장 모임..기타 이런 모임에 나오라는 전화나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알았어요. 갈께요.”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③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user#0 님의 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무셔라” 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짖는 접니다.

    어찌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단호한 말씀을 던지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이 세상에 연연하여

    스스로 평화를 안지 못함에 너무나 속이 상하셔서

    그리 말씀하심을 뒤늦게 깨달았기에 겸연쩍은 미소를 짖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식이기에 주어도 주어도 부족함에 더 많이 주려하지만

    어리석은 자식은 보지고 깨닫지도 못하니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엔 정말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네~~ 하면서 고개를 저었던 저였는데~~

    아버지의 단호한 그 외침을 이젠 깨달았습니다.

    사랑에 응답하는 저가 되어야 했는데 그것을 몰랐었지요.

    힘들고 어렵게 걸어가는 자식의 뒷모습에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걸어가는 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전엔 제가 그랬지요.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 집착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한 불평을 호소하면서

    그저 저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생각으로 살아왔던 저였습니다.

    평화가 무엇인지도~ 제 마음의 고요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왔던 저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 저였지요.

    버림에 채워지고, 안음에 더 여유로워짐을 몰랐습니다.

    넓고 깊어야만 돌을 던져도 물여울이 적음을 몰랐습니다.

    그랬기에 작은 것에도 지치고 힘들어 했습니다.

    그랬기에 평화하고는 거리가 멀었답니다.

    주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제가 준비하고 버리면서 채워지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그랬던 제가 이젠 평화를 노래합니다.

    인내속에 더 큰 기쁨을 안게 되는 것을 알았고

    인내속에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하루의 기쁨이 제게 안깁니다.

    어떻게 다가올 하루일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지혜가 있기에 그저 기쁨니다.

    그리고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땀을 흘려 범벅이 되어도 주어진 일분일초의 시간이

    제겐 기쁨이고 소중한 보석이거든요.

    그 일분일초에 제가 울수고 기뻐뛸 수도 있는 아주 소중한 시간임을 이젠 압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그 칼로 또다른 저를 베었습니다.

    그리고 새로났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선 제게 평화도 기쁨도 지혜도 슬기도 주셨습니다.

    그 멋진 보석들을 잃을까 지금도 얼마나 닦고 또 닦는지 모릅니다.

    그 소중한 보석을 관리하지 못하면 다른이에게 넘어감도 알거든요.

    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이 기쁨을 부족하지만 기쁘고 당당한 저의 작은 삶으로 보답하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오늘 아버지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시면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저의 무뎌진 자세를 꾸짖는 듯 그렇게 가슴깊이 와 닿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리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젠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방해되는 모든 것을 끊어버려야 함을

    이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생각의 노예가 되어서

    혼동속에 평화를 잃은 적은 없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제가 질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를 지워주심인데

    벗어던지려고만 했던 저는 아닌지요.

    아버지!

    주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나가는 지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지혜로운 바보되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기쁨의 미소로 힘들게 십자가를 지고 오는 이들에게 힘이 되게 하소서.

    버림에 채워지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어

    언제나 사랑의 강에 평화의 물결이 넘실거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물결의 힘에 십자배를 옮기는 지혜로운 저가 되게 하소서.

    아멘.

  5. user#0 님의 말: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요즈음의 저의 신앙생활을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의 신앙생활은 영세하기 전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개신교신자인 남편의 천주교에 대한 선입견으로 비협조적이고
    제가 성당에 가서 예비자교리를 받는 것조차 비아냥거렸습니다
    함께 성당을 다니자고 애원을 했지만 성당에 가느니 절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반대를 하였지요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남편이 반대해도 성당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예비자교리를 하면서도 동네사람들과 친구에게 외인권면을 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참 그때 친구한테도 성당에 다니자고 권면을 하니 사실은
    고등학교때 영세를 하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후로 반대를 하던 남편도 영세를 하고 저와 남편이 증인이
    되어 조당에 걸렸던 친구와 친구남편의 조당을 풀게하고
    친구남편도 영세를 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저보다
    친구와 친구 남편이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모범적인 성가정으로 변했지요

    하지만  요즈음의 저의 신앙생활은
     예전에 반대하던 남편은 저 보다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봉사활동도 저 보다 더 열심히....
    예전보다 상황이 더 나뻐 진것도 아닌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의 저의 모습은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인권면도 냉담자회두도 봉사활동도 피정이나 성지순례등
    모두 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요
    언젠가는 (여건이 좋아지면)예전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외인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복음을 묵상하려니
    저의 모습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예전생각도  많이 나고 ...
    그때가 그립다는 생각에...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묵상하며


    ♬ Panis Angelicus-Andrea Bocelli

  6. user#0 님의 말: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말씀에 가슴이 뜨금했습니다
    솔직히...
    입으로야 하늘의 별도 따서 드릴 것같이 말을 하지만
    당신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아니!
    자식들을 위해서도
    저 자신까지 희생을 하면서까지는...
    자신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잘못이 없음을 합리화하지요
    언제나 입으로만...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할수 있고 그럴 듯하게...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계산적인 사람인지를...
    당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에게 손해가 가지 않을까? 계산하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식들한테도 불이익이 온다면  신앙생활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남들에게는 언제나 신앙이 깊은 사람처럼 말을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답게 정직해야 한다고...
    자식들한테도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켜야한다고...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실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성서지식과 신앙이 깊지 않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탓하는 세속적인 모습등...
    복음을 묵상하면서 성찰을 해보니 깡통신자인 저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의 눈에도 보이니 남들 눈에는 얼마나 잘 보일까? 생각하니
    부끄럽고 창피하고 하지만  사랑이신 당신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기에 용기가 생깁니다
    노력도 중요하지요?주님!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말씀을 성찰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짓밣는
    어리석은 신앙가는 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희생까지는 못하더라도 가슴에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신앙가는
    되지 않아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리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그리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언제까지나 당신께 가는 그날까지
    변치 않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묵상하며

     


    ♬ Panis Angelicus-Andrea Bocelli

  7. user#0 님의 말: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주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말씀을 깊이 새기며

    당신의 말씀을 입으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
    당신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노력하는 신앙인
    당신의 말씀을 전하며 당신의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신앙인헬레나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굳게 믿으며^*^
    아멘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묵상하며

  8. user#0 님의 말: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요즈음의 저의 신앙생활을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의 신앙생활은 영세하기 전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개신교신자인 남편의 천주교에 대한 선입견으로 비협조적이고
    제가 성당에 가서 예비자교리를 받는 것조차 비아냥거렸습니다
    함께 성당을 다니자고 애원을 했지만 성당에 가느니 절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반대를 하였지요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남편이 반대해도 성당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예비자교리를 하면서도 동네사람들과 친구에게 외인권면을 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참 그때 친구한테도 성당에 다니자고 권면을 하니 사실은
    고등학교때 영세를 하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후로 반대를 하던 남편도 영세를 하고 저와 남편이 증인이
    되어 조당에 걸렸던 친구와 친구남편의 조당을 풀게하고
    친구남편도 영세를 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저보다
    친구와 친구 남편이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모범적인 성가정으로 변했지요

    하지만  요즈음의 저의 신앙생활은
     예전에 반대하던 남편은 저 보다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봉사활동도 저 보다 더 열심히....
    예전보다 상황이 더 나뻐 진것도 아닌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의 저의 모습은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인권면도 냉담자회두도 봉사활동도 피정이나 성지순례등
    모두 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요
    언젠가는 (여건이 좋아지면)예전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외인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복음을 묵상하려니
    저의 모습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예전생각도  많이 나고 ...
    그때가 그립다는 생각에...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묵상하며

    ♬ 우리와 함께 이곳에

user#0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