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례자의 탄생


대림 제4주간 화요일(12/23)


    말씀의 초대
    아기를 못 낳는 여자라 일컫던 엘리사벳이 어머니가 되었다. 이웃과 친척들이 더 기뻐한다. 그들이 아기 이름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때 즈카르야는 벙어리에서 해방된다. 요한의 탄생은 기적이며 축복이었던 것이다(복음).
    복음
    <요한 세례자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의심에 휩싸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생리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의 의심은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잉태는 주님의 기적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계산으로 판단하려 했던 것이 즈카르야의 잘못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사제였습니다. 보속으로 그는 벙어리가 되지요. 처음엔 놀랍고 부끄러웠을 겁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차츰 은총을 느끼게 됩니다.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아들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요한의 탄생을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로 있으면서 이것을 깨치게 됩니다. 그러자 보속은 해제됩니다. 벙어리의 삶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기다림 - 사랑의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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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례자의 탄생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대림 제4주간 화요일(12/23)


      말씀의 초대
      아기를 못 낳는 여자라 일컫던 엘리사벳이 어머니가 되었다. 이웃과 친척들이 더 기뻐한다. 그들이 아기 이름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때 즈카르야는 벙어리에서 해방된다. 요한의 탄생은 기적이며 축복이었던 것이다(복음).
      복음
      <요한 세례자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의심에 휩싸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생리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의 의심은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잉태는 주님의 기적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계산으로 판단하려 했던 것이 즈카르야의 잘못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사제였습니다. 보속으로 그는 벙어리가 되지요. 처음엔 놀랍고 부끄러웠을 겁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차츰 은총을 느끼게 됩니다.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아들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요한의 탄생을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로 있으면서 이것을 깨치게 됩니다. 그러자 보속은 해제됩니다. 벙어리의 삶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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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uest 님의 말:


    대림 제4주간 화요일(12/23)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당신의 사자’를 보내 주신다. 레위의 자손들을 정화시킬 사람들이다. 그들이 오면 유다와 예루살렘 역시 깨끗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그날’을 대비해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 주실 것이다. 파멸을 막기 위해서다(제1독서).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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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uest 님의 말:

    “그의 이름은 요한”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려니

    2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생각이 납니다
    손이 귀해  삼대독자로 외로우셨다는 친정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정성을 다해 키우셨습니다
    어릴 때는 물론 저희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도 손톱과 발톱을
    깎아 주시고 귓속의 이물질까지 ...
    어릴 때 자주 아팠던 제가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리고 가셨지요
    저희들이 태어나자마자 그날로 구청에 가셔서 호적에 올리시고
    저희들의 이름이 올려있는 등본을 떼어 오시며 기뻐하셨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철 없는 저는 저의 이름이
    흔하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작명소에 가서 지은
    이라며 이 다음에 잘 살 꺼라고 달래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곁으로 가신지 2년이 지난 요즈음...

    아버지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저 역시 부모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만큼 저희 아이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 자신이 반성이 됩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께 효도를 한 것도 없고
    아버지께서 정성껏 지어주신 이름을 불평불만하면서 이름 값도 
    하지 못하고 살아온 저의 불효가 오늘따라 죄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름  값은 못할 지라도 최소한의 자신의 이름에 긍지만이라도
    가져야 하는데  사실 어릴 때는 딸이 많아(세째) 이름도
    대충 지으셨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불효막심한 딸이지요 
    참 어릴 때 철이 많이 없었던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그의 이름은 요한”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이름 값이라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아멘

    “그의 이름은 요한”

    묵상하며



  4. user#0 님의 말:

    “그의 이름은 요한”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려니

    2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생각이 납니다
    손이 귀해  삼대독자로 외로우셨다는 친정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정성을 다해 키우셨습니다
    어릴 때는 물론 저희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도 손톱과 발톱을
    깎아 주시고 귓속의 이물질까지 ...
    어릴 때 자주 아팠던 제가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리고 가셨지요
    저희들이 태어나자마자 그날로 구청에 가셔서 호적에 올리시고
    저희들의 이름이 올려있는 등본을 떼어 오시며 기뻐하셨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철 없는 저는 저의 이름이
    흔하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작명소에 가서 지은
    이라며 이 다음에 잘 살 꺼라고 달래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곁으로 가신지 2년이 지난 요즈음...

    아버지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저 역시 부모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만큼 저희 아이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 자신이 반성이 됩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께 효도를 한 것도 없고
    아버지께서 정성껏 지어주신 이름을 불평불만하면서 이름 값도 
    하지 못하고 살아온 저의 불효가 오늘따라 죄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름  값은 못할 지라도 최소한의 자신의 이름에 긍지만이라도
    가져야 하는데  사실 어릴 때는 딸이 많아(세째) 이름도
    대충 지으셨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불효막심한 딸이지요 
    참 어릴 때 철이 많이 없었던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그의 이름은 요한”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이름 값이라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아멘

    “그의 이름은 요한”

    묵상하며



  5. guest 님의 말:

     

    막바지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아버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오늘은 참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수다를 떨지 않고 바라만 보았지요.

    수다쟁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답답하셨을 거네요? ㅎㅎㅎ

    바라만 보아도 행복하고

    바라만 보아도 기쁘고

    함께 앉아 있기만 해도 제 모든 시름이 다 사라지거든요.

    말씀을 묵상하면서 환히 밝혀진 촛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련해 왔답니다.

    네 개의 초가 야늘야늘 실처럼 흔들리네요.

    그 모습이 꼭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제 모습같아요. ㅎㅎ

    오늘은 말씀속에서 즈카르야를 그려 보았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던 그가

    아버지의 보속으로 벙어리가 되지요.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깨달았을 거네요.

    그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하신 것임을~~

    그래서 벙어리로 지내면서 아주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억울함보단 큰 행복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깨우침의 응답은 기쁨이자 희망이며 사랑이니까요.

    즈카르야가 그런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겐 불가능이란 없으니까요.

    깨달았기에 할례식에서 이름을 묻자

    판에다”요한”이라고 썼지요.

    가슴이 찡했습니다.

    믿지 않았지만 그는 보속에서

    큰 가르침을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었기에 알려주신 이름으로 적었을테니까요.

    얼마나 기뻤을까!

    아들을 바라보는 즈카르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을 겁니다.

    성모님이 찬미의 노래를 부르듯

    즈카르야도 그리 기뻤을 겁니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벙어리로 지내면서

    아버지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아들을 얻자 일러준대로 이름을 요한이라고 적었지요.

    가슴이 터지게 기뻤을 겁니다.

    아버지를 찬미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저도 함께 더불어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제모습을 살짝 봅니다.

    아버지를 부르면서 늘 뭔가를 바라며

    의문을 남기진 않았는지~

    그리고 깨달음의 기쁨을 모른채로 저의 고집만을 세우며

    버티진 않았는지~

    현실에 직시하여 틀에 저를 재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밀어내진 않았는지요.

    사랑을 고백하면서 깨닫지를 못한채

    저의 아집으로 심술주머니를 부풀리지 않았는지요.

     

    사랑이신 아버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불어 기뻐집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가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할례식에서 아들의 이름을 묻자

    판에다 “요한” 이라고 씁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임을 믿었기에 그렇게 했겠지요.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그에겐 그 시간마저 행복했을 겁니다.

    저도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매사에 뭔가를 바라며

    보여주시기를 바라진 않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를 믿는다 고백하면서

    형식적인 고백은 아니었는지~

    살아가면서 제 생각으로 모든 것을 기준삼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걸어온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

    부족한 저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아버지를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서 주신 깨달음으로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어

    깨달음의 몸짓으로 기지개를 펴게 하소서.

    무언가를 주심에도 무지하여 느끼지 못하는 저가 되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하며 깨달음에 즉시 응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응답속에 깊은 찬미가 샘솟게 하소서.

    찬미의 샘에서 기쁨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소서.

    아멘.

  6. user#0 님의 말:

     

    막바지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아버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오늘은 참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수다를 떨지 않고 바라만 보았지요.

    수다쟁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답답하셨을 거네요? ㅎㅎㅎ

    바라만 보아도 행복하고

    바라만 보아도 기쁘고

    함께 앉아 있기만 해도 제 모든 시름이 다 사라지거든요.

    말씀을 묵상하면서 환히 밝혀진 촛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련해 왔답니다.

    네 개의 초가 야늘야늘 실처럼 흔들리네요.

    그 모습이 꼭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제 모습같아요. ㅎㅎ

    오늘은 말씀속에서 즈카르야를 그려 보았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던 그가

    아버지의 보속으로 벙어리가 되지요.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깨달았을 거네요.

    그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하신 것임을~~

    그래서 벙어리로 지내면서 아주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억울함보단 큰 행복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깨우침의 응답은 기쁨이자 희망이며 사랑이니까요.

    즈카르야가 그런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겐 불가능이란 없으니까요.

    깨달았기에 할례식에서 이름을 묻자

    판에다”요한”이라고 썼지요.

    가슴이 찡했습니다.

    믿지 않았지만 그는 보속에서

    큰 가르침을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었기에 알려주신 이름으로 적었을테니까요.

    얼마나 기뻤을까!

    아들을 바라보는 즈카르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을 겁니다.

    성모님이 찬미의 노래를 부르듯

    즈카르야도 그리 기뻤을 겁니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벙어리로 지내면서

    아버지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아들을 얻자 일러준대로 이름을 요한이라고 적었지요.

    가슴이 터지게 기뻤을 겁니다.

    아버지를 찬미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저도 함께 더불어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제모습을 살짝 봅니다.

    아버지를 부르면서 늘 뭔가를 바라며

    의문을 남기진 않았는지~

    그리고 깨달음의 기쁨을 모른채로 저의 고집만을 세우며

    버티진 않았는지~

    현실에 직시하여 틀에 저를 재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밀어내진 않았는지요.

    사랑을 고백하면서 깨닫지를 못한채

    저의 아집으로 심술주머니를 부풀리지 않았는지요.

     

    사랑이신 아버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불어 기뻐집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가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할례식에서 아들의 이름을 묻자

    판에다 “요한” 이라고 씁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임을 믿었기에 그렇게 했겠지요.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그에겐 그 시간마저 행복했을 겁니다.

    저도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매사에 뭔가를 바라며

    보여주시기를 바라진 않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를 믿는다 고백하면서

    형식적인 고백은 아니었는지~

    살아가면서 제 생각으로 모든 것을 기준삼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걸어온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

    부족한 저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아버지를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서 주신 깨달음으로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어

    깨달음의 몸짓으로 기지개를 펴게 하소서.

    무언가를 주심에도 무지하여 느끼지 못하는 저가 되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하며 깨달음에 즉시 응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응답속에 깊은 찬미가 샘솟게 하소서.

    찬미의 샘에서 기쁨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소서.

    아멘.

  7. guest 님의 말:

    아기 이름은 요한

    1. 말씀읽기: 루카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2.말씀연구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즈카르야의 풀린 입. 사람들은 놀랐고, 그 사건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내 주변에도 놀라운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나 또한 많은 사랑을 받고,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에 새기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나이든 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엘리야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태중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아기. 그 아기는 바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입니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클까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아닐까요? 엘리사벳은 이웃과 친척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아이 못 낳은 여인의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지만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점쟁이가 이렇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지만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하였고, 급기야는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본인 스스로부터도 있었겠지만 주변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향한 자기 욕심의 분출,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고통으로 다가갑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아이를 소중하고 귀하게 키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여드레만에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창세17,12,21;4;레위12,3). 이 날의 예절은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또 여자라도 집행할 수가 있었습니다(1마카베오 1,60; 2마카베오 6,10). 할례는 즈카르야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엘리사벳도 그 곳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따르면(레위12,4) 여인은 산후 40일 동안 집 밖으로 나다닐 수 없었습니다. 할례는 하느님과 맺는 계약의 표시였기 때문에 어린이가 뽑힌 백성의 한 사람이 되는 이 날 새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가서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합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지어 주는 것도 유다 관습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주려고 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니 주변 사람들이 “북 치고 장구 치고” 제 맘대로 하려는 것 같습니다. 좌우지간 사람들은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지으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간섭하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 일이 아니면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막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권위를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그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또한 존중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나라 할지라도…,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아버지의 권리였습니다. 말을 못하는 즈가리야였지만 아내 엘리사벳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할멈! 아이 이름은 요한으로 하라구 했어…,”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아이 이름은 요한으로 할꺼유…”엘리사벳의 행동. 이것은 그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권리를 침해했고(자기들이 먼저 침해했는데), 또 아들 이름은 친척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는 관습에도 어긋났습니다. 좌우지간 그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못마땅해 합니다. 자신들이 지어준 이름이 선택되지 않아서일까요?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그들은 말 못하는 즈카르야를 붙들고 이야기 합니다. 이 행동은 엘리사벳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즈카르야를 제멋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즈카르야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천사가 일러준 이름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이며,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의심했던 즈카르야.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했을 때야 비로소 벌로 받게 된 것이 풀리게 됩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 까요? 얼마나 아들 요한이 원망스러웠을까요? 하지만 즈카르야는 기뻤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찬양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느님을 찬미하다가 조금이라도 서운하면 등을 돌리는 저 자신이기에 즈카르야의 모습은 존경스럽게만 보입니다.

     

    내 입은 열려서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남을 험담하고, 욕하고, 이간질하고, 상처 주던 입으로 이제는 하느님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 자리에 참례하지는 않았지만 참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게 됩니다.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글을 쓰면서 입이 풀렸다는 것. 즈카르야는 자신이 성소에서 받은 천사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믿지 않았기에 자신이 벙어리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 일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며 궁금해 합니다. 나도“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큰일을 해 주셨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나와 늘 함께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나 내 주변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힘을 내야 합니다. 내가 기억하면서 살아갈 때 주님의 손길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아기 이름을 지을 때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아기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나눠 봅시다. 내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으며, 누가 지어 주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도…,

     

    ②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 집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오늘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8. guest 님의 말: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고통이 있을때 저의 영성은 어떠했나를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즈카르야처럼 찬미 드릴수 있을까…

    언제인가 독감이 들어 몹씨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숨을 쉴수가 없어 앉아서 밤을 꼬박 새기도 했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프게 느껴질때가 바로 혼자 앓고 있을때였던 거 같습니다.

    누가 대신 앓아주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의지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깊이 깨닫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통해 고요속에 그분을 묵상하는 계기도 됐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심한 고통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씀을…
    그러시면서
    아이고! 예수마리아 성모어머니 …어이쿠쿠…예수마리아 성모어머니! 성모머니…

    저는 평상시 건강할때는 생각을 못하다가
    아픔이나 고통이 오면 그분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예수 마리아 성모어머니를 찾습니다.
    아마 저는 습관인 듯 싶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닮도록 해야겠는데…

    즈카르야 역시 입이 묶임을 통해 믿음이 더욱 강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벌을 준것이 아니라 침묵의 시간을 주어서
    믿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영성적으로 클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는 생각 또한 해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고통이 연장될때 갈등이 생깁니다.
    주님이 계신가…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나보다…
    나는 그분을 애타게 찾는데…
    왜 대답이 없고 갈수록 더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걸까…
    사실 믿음이 깊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을 주시는 것은 내게 유익된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느낄수 있는 기회이고 은총임을 깨달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저 더 악화되는게 아닌가 두려워하고 살았습니다.
    그분을 깨달으면
    모든 악조건의 상황도 다 받아들일수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즈카르야의 입이열려 찬미하듯이 말입니다.

    아직도 멀기만한 저의 영성을 돌아보면서….
    저역시 힘들고 아플때 저의 어머니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즈카르야의 찬미를 배울 것을 다짐해 봅니다.

  9. user#0 님의 말: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고통이 있을때 저의 영성은 어떠했나를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즈카르야처럼 찬미 드릴수 있을까…

    언제인가 독감이 들어 몹씨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숨을 쉴수가 없어 앉아서 밤을 꼬박 새기도 했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프게 느껴질때가 바로 혼자 앓고 있을때였던 거 같습니다.

    누가 대신 앓아주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의지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깊이 깨닫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통해 고요속에 그분을 묵상하는 계기도 됐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심한 고통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씀을…
    그러시면서
    아이고! 예수마리아 성모어머니 …어이쿠쿠…예수마리아 성모어머니! 성모머니…

    저는 평상시 건강할때는 생각을 못하다가
    아픔이나 고통이 오면 그분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예수 마리아 성모어머니를 찾습니다.
    아마 저는 습관인 듯 싶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닮도록 해야겠는데…

    즈카르야 역시 입이 묶임을 통해 믿음이 더욱 강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벌을 준것이 아니라 침묵의 시간을 주어서
    믿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영성적으로 클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는 생각 또한 해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고통이 연장될때 갈등이 생깁니다.
    주님이 계신가…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나보다…
    나는 그분을 애타게 찾는데…
    왜 대답이 없고 갈수록 더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걸까…
    사실 믿음이 깊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을 주시는 것은 내게 유익된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느낄수 있는 기회이고 은총임을 깨달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저 더 악화되는게 아닌가 두려워하고 살았습니다.
    그분을 깨달으면
    모든 악조건의 상황도 다 받아들일수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즈카르야의 입이열려 찬미하듯이 말입니다.

    아직도 멀기만한 저의 영성을 돌아보면서….
    저역시 힘들고 아플때 저의 어머니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즈카르야의 찬미를 배울 것을 다짐해 봅니다.

  10. guest 님의 말: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우리가
    좋은 것은 함께 좋아하고
    아픈 것은 함께 아파하며
    이웃과 나누는 이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도 함께 기뻐하시리라.

    새벽녘에 눈이 하릴없이 내리더니 천지가 하얗게 변하였다.
    마치 우리들 마음이 정결하라 이르시는 하느님 말씀과도 같이
    아름답웠다.

    오시는 아기예수님을 맞이하는 모두의 마음이리라.
    어설프고 부족한 자신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탓하지 않으시고 하얀 솜이불을 덮어 정결히 해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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