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3/10)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신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게으름을 꾸짖으신다. 그런 삶은 진정한 지도자의 삶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인의 삶도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헌신하지 않으면 누구나 게으른 생활에 젖게 된다(복음).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렇다고 ‘육친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린이의 신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이며,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 진리는 주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이론도 그분 앞에선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낮추어야 할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스승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인지천산 불여 천지일산’(人之千算不如天之一算)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 번’을 계산해도 하늘이 ‘한 번’ 계산함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하늘이 한 번 봐주는 것에 못 미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늘의 힘이 개입하기에 그렇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당신의 그 섬김이 - 김종찬  



이 글은 카테고리: 오늘의독서·묵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사순 제2주간 화요일(3/10)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신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게으름을 꾸짖으신다. 그런 삶은 진정한 지도자의 삶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인의 삶도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헌신하지 않으면 누구나 게으른 생활에 젖게 된다(복음).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렇다고 ‘육친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린이의 신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이며,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 진리는 주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이론도 그분 앞에선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낮추어야 할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스승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인지천산 불여 천지일산’(人之千算不如天之一算)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 번’을 계산해도 하늘이 ‘한 번’ 계산함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하늘이 한 번 봐주는 것에 못 미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늘의 힘이 개입하기에 그렇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당신의 그 섬김이 - 김종찬  
    
    
    
    

  2. guest 님의 말:


    사순 제2주간 화요일(3/10)


      말씀의 초대
      자신을 씻고 깨끗하게 살라고 하신다. 악한 행실을 치우고 선행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러면 자비와 용서를 만나게 될 것이다. 진홍빛 같은 죄악이라도 눈처럼 희어지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제1독서).
      제1독서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6-2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당신의 그 섬김이 - 김종찬  
    
    
    
    

  3. guest 님의 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1.말씀읽기: 마태 23,1-1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마르 12,38-40 ; 루카 11,39-52 ; 루카 20,45-47)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동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예를 들면서 좀더 겸손하게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좀더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였습니다. 모세 이후로는 조상들의 전승만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의 관심사는 모세 율법과 아울러 거기서 발전된 전승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을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 제도는 에스델 시절(기원 전 5세기)의 것인데,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유다 국민의 지도자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를 이은자들 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위기의 미드라스(해석)에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제로서 올바른 표양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만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말은 들으라고 하십니다. 행동은 본받지 말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말씀입니다. 가끔은 신자들이 사제들을 통하여 신앙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을 통하여 신앙을 얻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한 율법학자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멋진 은유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들은 노새와 낙타의 등에 엄청난 짐을 실어 놓고 그 짐을 옮기는 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장사꾼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율법학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하면서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결례, 안식일, 단식과 기도 등을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규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누르는 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 자신은 겉으로는 신심을 가장하면서도 자기네를 위해서는 그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 번째 죄는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랑 똑같은 모습입니다. 남에게는 시키기를 좋아하고, 나는 하나도 하려 하지 않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만 할 줄 알지 행동으로 할 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사제들의 말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꽃꽂이를 잘 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에 좌지우지되어 봉사자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각이 너무 발달한 신부님의 밥을 해 드리는 분도 어려움에 처합니다. 뭐가 안 들어갔다느니, 뭐가 더 들어갔다느니, 이런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그런데 막상 하라고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제들이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꽃꽂이와 요리이다. 배우면 말이 너무 많아진다나요.^*^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허영심을 꼬집으십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 남에게서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 명예로운 호칭을 좋아 하는 것. 이것은 허영심의 결과입니다. 성구 넣는 갑은 그리스 말로 부적이라는 뜻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구 넣는 갑은 조그만 갑인데 그 속에 탈출기 13,1-10. 11-16 그리고 신명기 6,4-9;11,13-21절까지의 글귀를 양피지에 써서 넣었습니다. 작은 갑은 왼팔이나 이마에 달고 다녔는데 지금도 히브리인들은 기도할 때 그것을 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명기 6,8절의 그릇된 해석에서 나온 습관 같습니다. 거기에는 야훼 하느님의 계명에 대하여 쓰여 이는데.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말씀을 상징적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로니모 성인 당시 이 관습은 인도, 페르샤, 바빌론의 유다인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미신적인 것으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술은 항상 율법을 회상시키는 의미로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려 있는 푸른 털의 술이었습니다.


    결국 바리사이파 사람의 미신과 허영심은 사람의 눈에 돋보이도록 일부러 크게 만든 갑과 술에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자리는 나이의 차례에 따라 앉게 정해져 있었으나, 위엄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 순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영 다툼의 근원 같습니다. 자리 그 자체에 위 아래를 정하는 것은 질서를 잡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명예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윗자리 다툼인 것입니다.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히브리인 사이에서는 인사를 받는 사람을 마음과 이마와 입에 새겨 두고 싶다는 그런 뜻으로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원말은 “라브”(스승), “라삐”(나의 스승), “랏방”(우리의 스승)입니다. 라브는 기원 전 2세기 말, 현재 말하는 박사, 선생 등의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기원 후 1세기 말에는 “라삐”라 하고, 일반적으로 팔레스티나의 선생을 가리켰습니다. 그 무렵 로마 정부가 인정한 유다의 으뜸은 “랏방”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자들이 신부님들에게 인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당 신부님에게만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불편해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옆 본당 신자였습니다. 서품식이나 큰 미사에 가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당당하게 걸어오면서 자신의 본당 신부님이 아니면 인사를 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호칭들을 좋아하고, 그것만을 노리는 명예심과 오만을 배척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스승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표현”은 신앙인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조금만 잘 나가면 막말하고, 반발하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 그들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현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높은 지혜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의 스승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겸손해 져야 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표현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 사이의 보편적 형제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옆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사악과 야곱 등 세 조상에게만 사용되었고, 어머니는 사라와 레베카와 레아와 라헬에게만 붙였던 존칭입니다. 그 후 “아브”,“앗바”(아버지)를 유명한 사람이나 학자에게 붙였습니다. 라삐 이스마엘과 라삐 아키바는 세상의 아버지라 존경을 받고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밑에서는 모두가 형제이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 형제라는 것을.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사람이 너무 호칭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배제시켜야 할 세 가지 칭호(스승, 아버지, 지도자(선생님))의 예는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칭호들은 초대 교회의 위계질서의 요소를 반영해 줍니다. 특히 유다계 사회에서 제자들은 다소 신심의 모델이 되는 행위와 혼돈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특히 유다인들의 사회에서는 랍비(나의 스승)라는 경칭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러한 칭호를 의식적으로 거부해야만 했습니다.


    지도신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정말 참다운 지도신부가 될까 하는 생각을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지도를 가진 신부라면 좋은데…지도는 사면 되니까요^*^).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다인들은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는 선생의 일꾼입니다. 제자의 일꾼이 되는 선생은 없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뛰어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형제의 선 때문에 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제자들의 탁월한 스승이요 지도자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뿐이시기에 교회안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도 이러한 칭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유다교의 랍비들의 본보기를 따라 자기 자신의 교리적인 견해를 주장하거나 어떤 교리 학파를 세우거나 거기에 가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아무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된 영광으로 가는 길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자신을 높이는 결국 자신을 낮추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은 들어 올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 즉 미래 심판의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날에 한껏 뽐내며 세상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왔던 사람들과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이 말씀이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높여 주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그냥 깔아 뭉개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겸손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저항감이 있어야 만이 잘해주고, 예의를 갖춰주고, 조심스럽게 대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3. 나눔 및 묵상

    ①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하느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② 가끔은 착각에 빠져 살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남이 그렇게 대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기도 합니다. 내가 착각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③ 참된 겸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옆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겸손해 지고 싶어서 옆에서 나를 비하한다면(물론 그 마음까지도 비워야 하겠지만) 마음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벽을 쌓기도 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겸손해 질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4. guest 님의 말: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헬레나씨!

    올 부활판공도 물동이문제집을 풀어야 한다네
    우리구역에서 헬레나씨가 또 수고해야겠네
    구역회때 갖고와요 구역식구들끼리 답을 써야하니까^*^
    아휴!성탄 때도 겨우 했는데 눈도 아프고 
    다른 사람 좀 하라고 하면 안될까?
    우리구역에 할 사람 없으니까 헬레나만 믿어
    그럼 수고해 10일날 구역회 때 봐요^*^
    아니! 이틀만에 어떻게 문제를 풀어 큰일났네ㅠㅠㅠ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씀에 가슴이 뭉쿨했습니다
    사실 오늘복음말씀을 한 두 번 묵상한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오늘복음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실천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뿐...
    언제나 복음을 묵상할 때만의 일시적인 기분임을 느낍니다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라면 아마 제가 메달을 타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제만해두요 주님!

    부활판공문제집을 풀어오라는 구역반장님의 전화를 받는순간
    몇십명이나 되는 구역식구들 중 바빠서 주일만 겨우 지키는
    저 한테 문제집을 풀어오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틀린 답을 적을까 조심스럽기도 하고
    이틀만에 문제를 풀어야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었지요
    하지만 저만 바라보고 계실 구역식구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어제부터 오늘 하루종일 낑낑대며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모르는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지 평소에 복음묵상을 
    수박 겉 핣기식으로 했다는 생각에 반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복음묵상을 성의있게 성서공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면서...
    사실 처음 부활판공문제집을 할 때는 힘들어 짜증도 났었는데
    문제를 풀수록 성서공부도 되고 답을 적을 때마다 성취감이랄까
    즐겁고 제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성서지식도 부족하고 능력도 없는데 모두들 저를 
    열심한 신앙인으로 생각하는 구역형제자매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당신의일은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보상을 해주신다는 사실을 ...
    제가 작아져야 제가 커진다는 말씀이...
    자신을 낮춰야 높아진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습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씀을 깊이 새기며
    봉사도 희생도 성서공부도 복음묵상도 모두 다....
    기쁜마음으로 해야한다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입으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참 신앙인
    헬레나로 거듭나야 한다고 당신께 축복받은 사람답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하여도 당신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묵상하며


    ♬ 자비송 The Chant of Metta
    말레이지아의 뮤지션 “이메이 우위(Imee Ooi)” 의 노래

  5. guest 님의 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질문하셨지요.

    너희는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리고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고 묻자

    바리사이들이 다윗의 자손이라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명쾌히 한방 먹이시지요.

    다윗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찌 된 일이냐고~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 부르는데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냐고 하시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명쾌함이 제 삶이 되길 은근히 청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말씀의 수다를 떨어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지요.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정말 가슴깊이 와 닿는 말씀입니다.

    어제는 결혼 기념일이라고 아들이 저녁을 사준다고 저희 부부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과히 넘치진 않았지만 마음만은 세상 무엇보다 행복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 아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낚시 가시는게 싫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좋아서 밤을 새면서 하는건데 막고 싶지 않다.

    싫은 거라면 누가 시킨다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되었든 간에

    좋아 죽는 기쁨도 맛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감에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여러 가지의 그릇이 있는데 어떤 그릇이고 싶은지를 물어 보았더니

    가장 큰 그릇을 가리켰답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작은 그릇 하나를 가리키면서 아빠거,

    가장 작은 종지 하나를 가리켜 저라고 했습니다.

    크게 웃어 주면서 그랬지요.

    맞다고~~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활용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그 가치는 내가 어떻게 승화시키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나 스스로 고집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빚는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가장 멋진 도예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기에 멋진 그릇을 빚는게 아니라

    모든 면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가 담아져야 하는 거라고~~

    전 그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자신있게~~

    그랬더니 의외의 말을 했습니다.

    “신앙이 있는 곳에서 정치의 냄새가 나서 싫어.” 라고 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확 막혔습니다.

    그런데 순간 오늘 말씀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용히~ 하지만 힘있게

    신앙의 도예가 비유를 들어 저의 확신을 담았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말없이 제 얘기를 다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아들이 던진 말이 저를 더 긴장하게 했습니다.

    엄마를 존경한다고~

    남이 알아주거나 봐 줄때 더 힘을 낼 것 같은데…

    그리고 어깨에 힘도 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라

    우리 엄마도 그럴꺼라고 생각을 했는데,

    보여지는 모습에 얼만큼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그래서 신앙심이 없는 저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었다고 속을 털어 놓았습니다.

    군대가려니 철이 들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아버지께~~

    말씀의 맛을 몰랐다면

    제가 어찌 이런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다른 어떤 말보다도 말씀에 비추어 저를 보면서 다시 빚는 것이 이렇게

    큰 행복인지를 새삼 깨닫기도 한 날이었습니다.

    유창하고 멋있게 묵상하거나 음미하진 못하지만

    제 그릇만큼을 잘 먹고 잘 소화시키면서

    저를 살찌울 수 있도록 사랑주심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말씀속에 저를 묻고 돌이켜 봄에 더 깊은 사랑을 배우고

    더 깊은 배려를 배울수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도 저 스스로 한게 하나도 없지요.

    그 말씀의 처방으로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낮은 자세에서

    말씀의 치료를 통해 새로 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오늘 아버지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제가 저를 높이기에 급급하진 않았는지를

    돌이켜 보게 하시는 것 같아 깊이 와 닿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작 더 바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신자보다 더 못난 삶을 살아가는 저는 아니었는지도 반성해 봅니다.

    순명하는 척 하는 입술의 소유자이지만

    정작 몸은 근엄을 바라는 동상으로 서있진 않았는지요.

    삶으로 높아져야 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 자리의 높이를 높이려 안간힘을 쓰진 않았는지요.

    그러면서 무너질까를 걱정하면서 안절부절하진 않았는지요.

    아버지!

    부족하지만 하루하루 주어진 삶속에서 말씀으로 저를 바로서게 하시어

    입보다는 늘 먼저 움직이는 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들어 올림 받기를 바라지 않으심에도 오직 한분 뿐이시듯이

    저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보여지기를 바라지 않게 하시어

    보일듯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소서.

    남이 좋아하지 않는 자리,

    남이 불편해 하는 자리,

    남이 싫어하는 자리가 제 자리가 되게 하시어

    오로지 말씀의 삶으로 그 자리를 빛내게 하소서.

    아멘.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