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순 제3주간 화요일(3/17)


    말씀의 초대
    매정한 종은 임금의 큰 은혜를 입고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다. 오죽했으면 다른 동료들이 그를 고발했을까? 용서는 축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에 매이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복음).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복음의 종은 매정했습니다. 임금의 탕감을 받았다면 친구의 애원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정상으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죽했으면 다른 친구들이 그를 고발했을까요?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는지요? 복음 말씀은 이 점을 돌아보게 합니다. 남이 나를 ‘섭섭하게 했던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를 ‘고맙게 했던 일’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삽니다. 내가 남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상처 주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에게 도움 받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않고 살면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도 적어집니다. 그만큼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누군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고마운 일만 기억하고 살기에도 짧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야 합니다. ‘미운 마음’ 역시 그렇게 맡겨야 합니다. 붙들고 있을수록 마음은 차가워질 뿐입니다. 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용서의 출발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예수 내 작은 기쁨 / 김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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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사순 제3주간 화요일(3/17)


      말씀의 초대
      매정한 종은 임금의 큰 은혜를 입고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다. 오죽했으면 다른 동료들이 그를 고발했을까? 용서는 축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에 매이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복음).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복음의 종은 매정했습니다. 임금의 탕감을 받았다면 친구의 애원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정상으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죽했으면 다른 친구들이 그를 고발했을까요?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는지요? 복음 말씀은 이 점을 돌아보게 합니다. 남이 나를 ‘섭섭하게 했던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를 ‘고맙게 했던 일’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삽니다. 내가 남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상처 주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에게 도움 받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않고 살면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도 적어집니다. 그만큼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누군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고마운 일만 기억하고 살기에도 짧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야 합니다. ‘미운 마음’ 역시 그렇게 맡겨야 합니다. 붙들고 있을수록 마음은 차가워질 뿐입니다. 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용서의 출발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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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uest 님의 말:


    사순 제3주간 화요일(3/17)


      말씀의 초대
      다니엘의 세 동료들은 우상 숭배를 거절하다 불가마 속에 던져진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찬미하며 불길 가운데를 거닐고 있다. 주님께서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자르야’는 하느님을 기리는 노래를 남겼다. 이스라엘을 기억하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청하는 기도이다(제1독서).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34-43 그 무렵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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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uest 님의 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거울을 통해 저의 겉모습을 보면서 추임새를 고치듯

    내적인 모습도 말씀을 통해 잘 볼수있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음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쉽진 않지만 아버지께서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면서

    저를 돌아보는 여유가 있다면

    작은 것에 연연하다 큰 것을 잃고 후회하는 삶을 살진 않을텐데~

    용서의 축복!

    가장 행복하고 평온하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의 삶이라고 합니다.

    행복 바위!

    뭔지 아세요?

    자그마했을 때 어딘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업고 오솔길을 따라

    굽이를 돌아가면 정말 멋진 곳이 나왔습니다.

    높은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에 바위가 깍이어 옴폭패인 곳에

    물이 담아지고

    시원한 그늘도~

    누울수 있는 커다란 바위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아주 멋진 그런 곳이었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어렸을 적부터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그곳에 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몸도 적시고 옷도 빨고 커다란 바위에 누워서

    한숨 자기도 하면서

    복잡하고 속상한 마음을 다스리고 내려갔다고 합니다.

    저가 태어나 걷기 시작하면서는 저를 데리고 다니셨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저를 내려 주시고 물장난도 해 주시다가

    커다란 바위에 누우셔서 생각에 잠기곤 하셨지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내려 놓기가 무섭게 친정 엄마가 만들어 입힌 항아리 팬티만 입고

    제 옷을 다 적셔서 바위에 걸치고 아버지 옷도 벗으래서

    물에다 다 적셔 늘었답니다.

    그리고선 옴폭패인 곳에 쪼끄만 엉덩이를 담고서 그렇게 재밌게 놀았대요.

    햇볕에 얼굴이 빨개져도 아주 작은 까만 고무신으로 배를 접어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놀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행복이 먼곳에 있는게 아니라 맘속에 있음을~~

    그 기쁨을 알게 해 준 곳이 바로 그 바위였다고 합니다.

    힘든 육신과 맘을 바위에다 누이고 생각을 하다보면

    바위보다 못한 인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바위가 말없이 그냥 내어준 자리에서

    친정 아버지는 위안과 행복과 자신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삶이 하찮은 바위보다 못한 욕심의 삶이었음을 깨닫게 되셨다고~~

    맘속에 누군가를 담아두고 미워하면 할수록

    자신이 병들고 편협해짐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말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그 바위로 인해서~~

    그 바위에 누우시어 늘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맘을 비울 수 있었다고~~

    그리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음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나도 똑같이 미워하면 얼굴이 삐뚤어 진다고~

    그래서 나를 위해서 미워하지 말아야 한고 하셨지요.

    만약 그 사람이 잘못한게 있어도 내가 먼저 용서하면

    살짝 삐뚤어져 있었던 곳이 있었다면 다시 돌아온다고~~

    ㅎㅎㅎ 재밌지요?

    그치만 맞는 말씀인거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움의 감정은 수시로 들지만 그래도 사그라지는 물거품이지요.

    그렇지만 용서의 관계로 들어가면 쉽게 사그라지지 않기에

    작은 감정은 큰 베풂에 덮어지는 것임을 이젠 압니다.

    오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 깊이 새겨집니다.

    아픔을 승화시켜 더 깊은 사랑의 빛이 발하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에

    저를 비추어 봅니다.

    용서받기를 바라면서 용서하지 않는 저는 아니었는지요.

    저의 잘못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라 여기면서

    상대의 잘못은 자신에게 큰 아픔이 되어

    용서하지 못할 것이 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조각이 되어

    가슴에 묻어두진 않았는지 되돌아 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오늘 아버지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라니요.

    아마도 저를 모른 채,

    말씀을 행하려니 까마득한 일로만 생각을 하나 봅니다.

    용서하기보다 용서받기를 바라면서

    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의 잘못을 들추어 내는 부족한 저에게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어 일깨워 주시는 듯 합니다.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잊어 버린 채,

    저의 욕심이 저를 옭아매진 않았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작은 일에 연연하면서

    큰 용서의 축복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저가 아닌지요.

    베푸는 기쁨과 안는 기쁨이 주는 삶의 축복을 깨닫지 못하면서

    늘 전전긍긍하는 삶에 쫒기어

    저 스스로 비난과 불인정의 포대를 두른 채,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말씀으로 충만한 삶속에서 저를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실천으로 승화되어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저로 서게 하소서.

    저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되게 하시어

    용서하는게 아니라 용서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아버지께 받은 사랑으로 작은 꽃을 피우며 덤으로 받은 삶에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주신 정원에 많은 꽃들을 심어 가꾸는 것은 제 몫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4. guest 님의 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려니
    저에게 상처 준 사람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오늘복음말씀을 읽으면 좋을텐데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는지 하구요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 라는 사실이지요
    남을 탓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임을...
    그러면서도 언제나 복음을 묵상 할 때 뿐...
    용서도 사랑도 베품도 모두 다...
    복음을 묵상 할때의 일시적인 기분임을...
    사실 복음묵상을 하는  목적이 복음묵상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상처를 준 사람들도 용서하며 사랑해야한다는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이해하지요
    하지만 저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 할수 있는지
    복음을 묵상하는 이 순간에도 생각이 나니...
    아니! 생각 나는 것뿐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잘못되기를
    바라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은 합리화 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많이 참았다고...
    다른 사람들은 저 만큼 참지 못했을 거라고
    참 많은 핑계를 대지요
    마음 속에 미운 마음을 담고서
    그리고 주일에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면서 주의 기도를
    힘차게 부르기도 하지요
    저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참 잘도 부릅니다 힘차게...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말씀을 깊이 성찰하며
    일곱 번이 아니라 한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헬레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남의 잘못을 탓하는 어리석은 신앙가 헬레나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당신께서 저의 잘못을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받기만 하는 헬레나가 아니라 자신의 것도 아낌없이 주는
    신앙인 헬레나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실천하기 힘들지만 당신께서 원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멘

    ♬ Ave Mundi Spes Maria-베네딕도수도원

  5. guest 님의 말: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해 사순 제 3주간 화요일

    1. 말씀읽기: 마태18,21-35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루카 17,4)


    2. 말씀연구

     용서한다는 것,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용서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기도와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즉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용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마음을 모아서 청하는데 두 사람의 마음이 모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청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마음이 다르면 아주 작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마음이 맞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하나, 자기 색으로만 다가가려 하니 문제가 되어 아직도 서로가 하나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개인의 청원도 잘 들어주시지만 공동체의 청원을 더 잘 들어주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증해 주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는 말씀 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한 형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한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공동체가 기도한다면 분명 들어주실 것입니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이나 셋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려 모일 때,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이고, 그 기도를 하느님 아버지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모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모여서 기도하는데, 이것은 당연히 들어 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바로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 사도는 얼마나 많이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의 의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베드로 사도는 일곱 번을 이야기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것은 적어도 베드로사도가 용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 저에게 잘못하는 형제가 있는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는 제게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형제를 제가 일곱 번 까지 용서하고 그 다음 여덟 번째는 한대 때려도 될까요?”^*^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세 번까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서 인간들도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타이를 때 받아들일 마음이 없거나,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나에게 화를 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상처를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내가 너랑 친해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것이 나빠!…”이 말이 큰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충고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아닌 것을 옳다고 말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형제를 얻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적 사랑을 가지고 책망을 통해서 그를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니 그것을 마다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가 용서를 청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번만 용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에서 잘못하고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를 한다면, 그가 공동체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하니, 당연히 그에 대한 “서운함”등은 모두 용서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용서하려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외면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돌아와서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본당신부님이 바뀌시면 또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의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나오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사도 해 주고 반겨줍니다. 그리고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덤비고 욕하고 안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신앙인의 자비를 역이용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켜봐 준다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위해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비유 자체의 배경은 고대 근동의 농지세나 로마제국의 세금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동의 왕들은 신하들을 일정 지역의 책임자들로 내세우고, 농지세를 받아 정해진 몫을 왕실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왕과 종이 셈을 하는 이야기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일만 탈렌트는 커다란 액수입니다. 1데나리온 한 사람의 하루품삯이었고, 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만원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5만원 * 6,000 * 10,000 =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이 어쩌다 이렇게 엄청난 빚을 왕에게 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종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그가 관리하는 지역의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약속된 세금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종이 자신의 빚을 왕에게서 탕감 받은 다음, 다른 종의 멱살을 쥐고 빚진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아마도 세금 하청을 맡긴 하급 관리에게 빚 독촉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임금은 원칙대로 다 갚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그런데 아무리 처자식을 팔아도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걸만으로 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비가 있는 왕의 모습입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비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그가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동료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가 빚을 완전히 갚을 때까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  뿐입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살다보면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를 합니다. 그 무자비한 동료의 잘못을 보면서 그들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자 그들은 왕의 도움을 청합니다. 즉,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러바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서 말을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심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들 분위기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온전한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고 그전처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용서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용서의 어려움을 아셨기에 손수 모범으로써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하면서 살아야 함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나 또한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를 용서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왕의 자비로 말미암아 얻었던 것을 자신의 무자비를 통해 잃고, 이제 그가 자신의 동료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형리에게 넘겨집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엄과 자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보지 않을 때 이 비유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종 왕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그 왕은 군림만 하는 왕이 아니라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로운 왕이시고, 악한 종을 형리에게 넘겨주시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헤아리신 다면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용서하심과 자비로우심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요 희망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남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또한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합시다.


    3.나눔 및 묵상

    ①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무자비한 종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는 왜 그 많은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을까요?


    ②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내가 용서하기 힘든 상황은 어느 상황입니까? 그리고 힘든 용서를 한 사람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함께 나눠 보면서 나도 그 모습을 따라가려고 다짐해 봅시다.

  6. guest 님의 말: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죄는 가볍고 네죄는 무겁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즉 똑같은 죄라도 자신에 죄의 무게와 타인에 죄의 무게는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기적인 마음들만이 갖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용서하기보다 용서받기만 바라는 사람들 뿐일게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섭섭하고
    증오와 분노때문에 관계가 단절되지 않을까 묵상해 봤다.

    그럼 나는 어떤가…
    나역시 다를바 없음을 본다.
    하느님이 나만 돌봐 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살았다.
    같이 용서 받고 많은 사람이 그분을 뵙는다면 기쁜일인데…
    그런데 하느님도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외롭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바로 ‘외로운 사람’ 이라 한다.
    그래서 아무리 물질이 풍족한 나라라 해도 외로움이 극에 달하면 자살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렇게 스스로 외로움을 만들고 살아가면서 나는 왜 혼자일까 슬퍼했다.
    나역시 사람관계에서 덕을 쌓을수 있는 용서, 자비, 사랑이 부족하지 않았나싶다.
    암튼 이렇게 하늘나라도 혼자 차지하고 싶어하는 독선된 마음때문에
    언제나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이의 용서도 쉽게 용납할수가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왜 저런 인간들이 어이없는 짓 들을 해도 여전히 잘 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걸보면 참 불공평하지 않은가…이렇게 배 아파하며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심리중에
    남의 잘못되면 기분이 좋아진다라고하는 말이 진실인 듯하다.
    “너 두고 봐라! 열심한 척 하고 혼자 잘나서 내말 안 듣더니…”
    “또 뭐냐? 저 자식 아부에 가식덩어리가 아닌가?.”
    암튼 그러다 상대방이 정말로 잘못되면 쾌자를 올리며 마음속으로 좋아라 했다.
    겉으로는 위로한 척하면서 말이다.
    솔직히 하느님께 기도한 댓가가 발휘됐다며
    그분께 감사 기도 또한 드렸지 않나싶다.
    스스로 받은 댓가 인데…ㅎㅎㅎ
    그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얼마나 기뻐했는가…

    그땐 그랬다.
    이것이 공평한 하느님의 법이라 생각했다.
    그분의 공평이란 바로 내 바라는 바대로 행해 졌을때만이 공평한 것이었다.
    허나 그분이 일일이 인간의 일에 간섭하시고 개입하신다면
    살아남을 자 몇이나 있을까?
    아마 하나도 없을게다.

    사실 그땐
    내가 행한 착한 일에 대해서도 당연한 보상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는 건 똑같고 오히려 갈수록 힘들어지는 걸 본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으로써 나눔은 당연한 도리이기에
    보상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사는거라는 걸…깨달아 본다.
    내가 나를 볼때는 용된 거고…
    주님이 보실땐
    “착한 사람은 다 그래.. 너만 특별한게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보상이듯
    인간과 인간 또한 내가 볼때는 그런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어쨋든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아집된 사고가 은총으로 너그럽게 전환된다는 사실을 깨달아본다.

    이렇게 그분의 은총없이
    내게 이렇게 했으니 당연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협박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나 생각해 또한 해봤다.

    용서도 그렇지 않나 싶다.
    내가 했으니 당연히 너도 해야 된다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용서해 주셨으니
    당연히 나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함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감히 종을 용서해 줬는데 종들끼리 뭘 그리 따지고 사는가…
    암튼 오늘의 용서의 묵상은 이렇게 해봤다.
    노력하고 실천을 해야 하는데…

    글이 뒤죽박죽이다. 휴~

  7. guest 님의 말:

    (no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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