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 말씀읽기: 요한 7,1-30

예수님의 형제들이 믿지 않다

초막절에 가르치시다

저분이 그리스도이신가



2. 말씀연구

 가고 싶은 곳이 있고, 가기 싫은 곳이 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곳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단숨에 갈 수 있고, 나를 박해하고 환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가기가 싫습니다. 직장, 가정, 학교, 성당….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나를 대합니까? 아니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주고 있습니까?

또한 가기 싫은 곳이 있다 하더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사촌 형제들과 나눈 대화(1-10절)와 예수님께 대한 예루살렘의 분위기(11-13절)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예수님의 모습과 세상에 나타내 보이도록 요구하는 예수님의 사촌 형제들의 생각이 대조가 됩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는 것(불신)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므로 유다지방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서 갈릴레아 지방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이 하느님 손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시간도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추수절 또는 초막절은(판자집절, 천막절, 오두막절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민속적인 축제로서 가을에 추수절기 마지막에 가서 지냈다. 이 축제 동안에는 짚으로 초막을 지어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야영하던 일을 상기했습니다. 이 초막절은 오순절과 누룩 없는 빵은 먹는 명절(무교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가장 큰 순례 축제의 하나입니다.



초막절

이 명절은 유다인이 하느님의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세 명절 중의 하나였다. 티쉬리 15일부터 21일까지(9월 말부터 10월 초순 까지) 1주일간 거행되었다. 제 8일에는 마감하는 대축제를 거행한다. 이 목적은 두 가지로서, 그 해의 수확을 위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탈출34,18) 일과 이집트를 나와서 사막에서 보낸 히브리이의 오랜 체류를 기념하는(레위23,42) 것이었다. 원래 초막절은 포도나 올리브와 과일 추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대축제였다. 그러나 나중에 종말 구원의 커다란 염원과 연결되었고, 나뭇잎으로 만든 움막, 즉 초막은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이 명절동안 모든 사람은 뜰, 길, 혹은 집의 평평한 지붕 위에 만들어 놓은 초막에서 살아야 했다(레위23,42;느헤미야8,14-17). 거기에다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에 참여해야만 했다. 제물의 제단 위에 붓는 물은 씨로에의 샘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가을의 풍부한 비를 간청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식과 색체가 선명한 행사들은 이 명절의 대중적인 색깔을 주는 것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이 명절이 1년 중에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또 이 경우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3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활동장소를 갈릴래아에서 유다로 옮기라는 요구입니다. 유다는 갈릴래아 보다 예루살렘의 행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고, 사람들의 이목도 더욱 두드러지게 집중되는 지역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지역에서 신기한 일들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명성을 얻도록 바랐던 것입니다.



4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만일 예수님께서 대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백성의 갈채를 받고 환영을 받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계셨다면 더 이상 좋은 시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가?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서 나오는 것과, 일의 성과에 대한 유혹에서 나오는 것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해야만 합니다.



5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넓은 의미로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들을 가리킵니다. 복음에서는 가족의 명예만 생각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불신하는 사람들로 가족들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나 사명을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아무 때라도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내가 세상을 두고 그 일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8 너희나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갈릴래아에 머무르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부정적이십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때는 바로 예수님의 수난의 때입니다. 예수님은 처지가 다르신 분이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신을 증오하고 죽이려 하는 유다인 지도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그런데 나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고 올라가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식 모임을 조직하여 정식 순례에 참여하여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참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11 그래서 유다인들은 축제 동안에, “그 사람은 어디 있나?” 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다. 12 군중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두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많았다. “그는 선한 사람이오.”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오. 그는 군중을 속이고 있소.” 하는 이들도 있었다. 13 그러나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분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순례 단체 속에 안 계시므로 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많은 이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가 없을 경우 험담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그의 좋은 점을 찾아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그렇게 나쁜 것만을 바라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는 좋은 분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나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나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4 축제가 이미 중반을 지날 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는 명절 축제가 중반쯤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15 그러자 유다인들이 놀라워하며,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 하였다.

“어!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네!”청중 속에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지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아버지 하느님 안에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늘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가르침입니다.



17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은“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하느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느냐? 아니냐?” 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내게 들려오는 무수한 말씀들. 그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낸다면 나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18 스스로 나서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찾는다. 그러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찾는 이는 참되고, 또 그 사람 안에는 불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치심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두 번째 증거로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을 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과시에서 벗어나 행동하셨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뽐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만을 구하셨습니다.

 결국 유다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매일 입에 올리면서도, 입만 열었다하면 율법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코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입만 열면 하느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 도대체 너희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하는 유다인들의 정곡을 찌르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주었고,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심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있다면 신앙인의 믿음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고,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못된 표양을 보이고, 적대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20 군중이 “당신은 마귀가 들렸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그런데 유다인 지도자들의 마음을 모르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마귀가 들렸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혹시 당신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이 아니오?”당시 사람들은 정신병을 마귀의 짓이라고 여겼기에 “당신은 마귀가 들렸군.”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도자들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들도 분위기가 무르 익으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 사실 할례는 모세가 아니라 선조들에게서 비롯되었다. ─ 아무튼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푼다. 23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어째서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  24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말에는 답하지 않으시고 유다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가지 일 – 베짜타의 병자를 고쳐주신 일- 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놀라워한다.”즉, 유다인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근거를 할례에 두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할례와 관계있는 모든 일은 안식일에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안식일에 할례를 베풀 수 있다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다면, 한 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기적을 베푸는 것은 화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규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안의 내용을 올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만 바라보면 그 안에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실천하지 않아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론은 꼭 지도자들에게 유리하게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도 볼 눈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더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다 지도자들(최고의회 의원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가르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놀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정말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의 전통에는 메시아가 완전히 숨어서 존재하신 후에 나타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분의 신원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원(나자렛 출신이고, 부모님은 요셉과 마리아이고 형제들은….)을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장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려져 있기 때문에 메시아일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의 틀에 맞지 않으니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틀에 맞추려 할 때 내 틀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내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메시아는 베틀레헴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적용시켜 보면 딱 맞는데 그것은 적용시키지 않고 하찮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정말 알고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알고 있는 것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 보시기에도 노력하고 있는 모습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알고 계시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강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신비를 계시가 없다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을 모르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받게 될 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하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형제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다면 그 형제가 받을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이고, 나 또한 그렇게 행동으로 옮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인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을 했고,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기, 곧 반대자들의 손에 넘겨지도록 섭리된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31 그러나 군중 가운데에는,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저분께서 일으키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시겠는가?” 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유다인들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군중들 중에는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저분께서 일으키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시겠는가?”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보고 믿으면 됩니다. 맺은 열매를 보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믿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중에 와 닿는 말씀은 어떤 말씀이고, 그 말씀이 왜 와 닿습니까?



② 누가 하느님을 모독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나 자신을 향하여도 노골적인 분노를 터뜨린 적도 있습니까? 오늘 유다인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그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③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과 험담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혹시 당사자가 없을 때 그를 험담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반대의 경우, 그렇게 험담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당사자가 없을 때 그를 험담하기보다 그를 칭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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