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1.말씀읽기: 요한 8,1-11

2. 말씀연구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살아가면서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누구든지 크고 작은 죄들을 짓고 살아갑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다면 내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 자신은 완전한 것처럼  그렇게 옆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 그렇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들도 용서해 주고, 받아들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나와 관계없는 죄를 짓고 있는 그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의 편협한 모습을 대하면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매일 매일 달려는 유다인과의 불쾌하고도 긴 토론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고요와 침묵과 고독을 누리시기 위해 올리브 산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 바쁜 일상에서도 항상 하느님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이 밝으면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당당하게 하십니다. 남이 뭐라 해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4복음서에 수록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서 예수님에 관한 매우 오래 된 이야기로 보인다. 당초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죄를 저지른 후에 엄격한 보속이 규칙으로 되어 있던 초대 교회가 보속이 없이 간음한 여자를 즉시 용서해 준 온당치 않은 너그러움을 어떻게 복음서에 첨가 시킬 수 있었는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의 신자들은 모든 죄는 세례를 통하여 사해진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죄, 즉 우상숭배, 불경죄, 살인, 간음, 거짓 증언, 사기와 같은 큰 죄는 다시 용서 받을 수가 없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몇 가지 죄목에 대해서는 두 번째까지 용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것 같으나 배교, 간음, 살인은 너무 엄청난 죄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씻지 못한 채 남게 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더 큰 죄목들이 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죄가 크냐 작으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특히 간음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신명기 9,15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의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아내를 거슬러 불리한 증언을 할 우려가 있기에 여기서 요구하는 목격자에서 제외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이 죄인을 다룰 가장 적절한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장기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장군”을 불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과 같은 해결을 하였다고 한다면 자비에 대해서 가르쳐온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인하게 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이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외쳤을 것이고, 사형선고의 권리가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 “죽여라!”하면 로마인들에게 살인을 교사했다고 고소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동정을 느끼고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거스른 자로 고발하고, 그러한 범죄를 사형으로 처벌하지 않았던 로마의 지지자라고 부르짖고 나설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완벽한 “외통”이었습니다.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성경에 정식으로 사형시키는 방법이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에제키엘서 16,38-40에서 보듯이 간음에 대한 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뚜렷이 나와 있고 예수님 시대에도 여전히 실행되고 있었던 것입니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니 고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한다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한 예수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면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 도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로부터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즉 산헤드린(예루살렘에 있던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회의)은 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정직한 대화를 고의적으로 피하고 예수님의 신용을 떨어뜨려서 그들로부터 제외시키려는 심산이었습니다. 사실 궁지에 몰린 간음한 여인의 처지가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이용해서 무기로 삼아 예수님을 골탕먹일 심산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땅에 쓰신 예수님의 이 동작은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러한 뜻 없는 것을 쓰신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법률상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대답하려고 하신 것 같다. 그런 문제의 전문가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니 자신들이 해결하면 될 것이고, 안되면 재판소로 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인의 율법학자들도 자기네에게 향하 오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싶을 때에는 땅에 무엇인가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십니다.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죄인은 땅에 기록되리라(예레미야 17,13)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일깨우고,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으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도록 지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보여준 예언자적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예수께서는…그들 각 개인의 죄(목)들을 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한 사람이 돌을 던지려고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땅바닥에 쓰십니다. 누구랑 간음. 누구 등치고. ……문득 그것을 본 돌 집은 사람은 슬그머니 그 돌을 내려놓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돌을 집었지만 예수님은 또 그의 죄를 적습니다….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지난 죄를 알려 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면….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절대적인 원리 원칙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든지 판단을 할 수 없고, 또한 어떤 범죄자에게도 그에 마땅한 벌을 줄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중을 뚫어 보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간음한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율법학자들이 난관에 빠지게 됩니다. 돌로 치자니 자신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안치자니 율법을 우습게 만들게 되는 것이고. 오히려 “외통”을 당한 것입니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긴 자신의 죄를 인식한  사람이 다른 죄인에 대한 심판관으로는 자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을 단죄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가 버렸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가끔 우리는 \”나는 죄 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자신이 그것이 죄라고 못 느낄 뿐이지…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 또한 더욱 겸손해 지면서 남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두 가버리고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동정심 없는 행위의 묘사와 곧 돌로 맞아 죽을 너무나도 미약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의 모습 때문에 성 윤리의 기준에 대하여 감정에 치우쳐 여인의 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처사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자비와 용서는 바로 이제부터 더는 죄를 짓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즉 죄의 용서라는 선물은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반드시 포함되는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내가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에서 돌로 치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② 고백성사를 볼 때 성찰을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나는 그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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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나눔 및 묵상

    ① 내가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에서 돌로 치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하느님의 자녀가 어떻게
    이해하지 못할 언행을 서슴치 않고 하는가? 에 대하여 생각은 많이 합니다.
    바로 그 자체가 남을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채 말이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 돌로 치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없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② 고백성사를 볼 때 성찰을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나는 그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고백성사를 보기 며칠 전 부터 마음속으로 성찰을 하지만 고백소에 들어가면
    제대로 고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고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성찰했던 마음들은 온데간데 없고 중언부언 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죄 부터 메모지에 적어서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야만 빠뜨리지 않고 일일히 고할 수가 있습니다.

  2. user#0 님의 말:

    3. 나눔 및 묵상

    ① 내가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에서 돌로 치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하느님의 자녀가 어떻게
    이해하지 못할 언행을 서슴치 않고 하는가? 에 대하여 생각은 많이 합니다.
    바로 그 자체가 남을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채 말이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 돌로 치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없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② 고백성사를 볼 때 성찰을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나는 그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고백성사를 보기 며칠 전 부터 마음속으로 성찰을 하지만 고백소에 들어가면
    제대로 고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고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성찰했던 마음들은 온데간데 없고 중언부언 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는 큰 죄 부터 메모지에 적어서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야만 빠뜨리지 않고 일일히 고할 수가 있습니다.

  3. 엘리사벳 님의 말:

    네. 있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기전과 받고 난 후 얼마동안은 그랬습니다.
    감정이 생기면 그를 보기가 어려웠고 함께 한다는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말씀과 팔짱을 끼고부터 달라진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밉다’ 라는 생각은 들지만 잠시뿐 거품을 사그라지게 하는 힘이 생겼답니다.
    때론 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몫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때문에~~
    아무리 미운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뉘우치면 아버지께선 기뻐하시니깐요.

    늘 부족하고 옷을 더럽히지만 그래도 세탁하려 노력합니다.
    부족하기에 더 열심히 살아가려 하면서~~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를 비추이게 됩니다.
    그러면 저의 모습이 아주 잘 보입니다.
    전엔 제게 묻은 얼룩을 몰랐지만 말씀속에서 머물때
    지난 저의 얼룩이 남아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성찰을 한 뒤에 가장 빠른 시간에 용서를 청하고
    재빨리 아버지 무릎에 올라가 앉는답니다.
    그리고 수다를 떨지요.
    하지만 또 같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치만 아버지께선 늘 기다려 주십니다.
    제가 뉘우치기를~~
    더 오래 머물려 노력합니다.
    눈을 감아도 멤도는 사랑이니까요.
    사랑으로 용서를 해 주심에 감사하면서 더 큰 기쁨을 드리기위해 움직입니다.
    더 오래 바라보려고? ㅎㅎ
    많이 움직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놀아야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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