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해 연중 제 14주간 금요일
1. 말씀읽기: 마태10,16-23
박해를 각오하여라 (마르 13,9-13 ; 루카 21,12-17)
2. 말씀연구
요즘 시대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찾을까?”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성당을 멀리하고, 별로 많지도 않은 교무금 때문에 “이 신부님 가실 때까지는 성당 쉬겠다.”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신앙 때문에 나를 박해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마 도 저는 무슨 말로 합리화를 시키고 빠져 나올까를 고민할 것 같습니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제자들은 마치 이리떼 속에 있는 양과도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리”라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론가, 열광자, 괴변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모욕과 박해 속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함을 말씀하십니다. 뱀은 교활하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달리 말하면 어떠한 위험일지라도 교묘하게 피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사립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 속에 들어 간선교사는 스스로 그 이리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 가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뱀과 같이 자기를 보호하는 데 슬기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으로 슬기로운 선교사는 그들과도 어울 릴 수 있어야 합니다.
비둘기는 순진한 걸음걸이를 하며 언제 잡아도 괜찮다는 듯이 보이지만, 이쪽에서 막상 잡으려 하면 훌쩍 날아가 버립니다. 또 희고 아름다운 비둘기는 솔직함의 상징입니다. 죄 없는 생활을 하며, 음모를 꾸미지 않고, 악한 자의 의심도 일으키지 않는 정직한 생활을 보내는 것은 불화와 논쟁만을 일삼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조건입니다. 여기에 신중함을 곁들인다면 그 소박함을 지킬 수 있고, 악인의 함정을 피할 수 있으며 부당한 고소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조심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려고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당당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사나운 짐승들의 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기에 박해를 당할 때가 언제일까요?
개신교 학교에서 신자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숨기고 생활하고 있고, 더러는 개신교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계신지 모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렇게 당당하게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더 큰 직책을 맡더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종교가 달라서 박해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불교나 개신교이고 며느리가 가톨릭일 때, 어떤 이들은 시어머니를 따라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가지 하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미신자 가정을 신자 가정으로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자신의 열심한 신앙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손에 넘어갈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 하는 이는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같이 배우지도 못한 소박한 시골뜨기가, 학문도 있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재판관들 앞에 나간다면 겁을 집어 먹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교회사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천주교 신자인 자녀를 내치는 경우. 신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교하고서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는 배교자들. 하지만 끝까지 참고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분들은 구원을 받으셨고, 그분들의 신앙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퍼져 감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으나, 일가족이 모두 신자가 된 집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생질인 푸라비우스 크레멘스를 죽게 한 도미시아누스 황제와 같은 예가 적지 않았습니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과 예수님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른 이가 할 때, 그를 칭찬하기 보다는 그를 비방하고 소외시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의로움으로 가득 차셨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 의로움의 빛으로 자신들의 어둠이 드러나자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언제나 승리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확증해 주십니다.
섞이면 어렵습니다. 포기하면 어렵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일을 포기하고 다시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면 진리가 바로 서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세상에 홀로 남게 된다 할지라도 끝까지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피가 헛되이 흐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엎어 놓고 죽음 앞에 생명을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현명하게 박해자들의 핍박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들을 겁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날까지는 그릇된 명예심이나 공명심을 위해 어리석게 목숨을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박해가 심하다 할지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말씀을 음미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주어지는 시련들이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3. 나눔 및 묵상
① 예수님의 제자로서 슬기롭고, 양순하기 위해 내가 닦아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을 잘하고 있으며, 어떤 것이 부족합니까?
②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모욕을 당하거나, 거부를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가령 “너나 잘해. 나는 나를 믿어. 하느님이 계시다면 내 앞에 나타나 보시라고 해봐. 이 다음에…\” 이런 때는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③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나에게 어려움으로 닥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해야 될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④ 가족이나 직장안에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그분들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