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신다.
이제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말씀이시다.
그러시면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다.
예언의 말씀이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알리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놀라워한다(복음).
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기쁨으로 ‘한 해’를 지내라는 선언입니다.
눈먼 이들은 다시 보고,
가난한 이들은 기쁜 소식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으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할까 봐 조바심합니다.
물질의 가난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늘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기쁘게 살 수 없는 ‘함정’을 스스로 파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희년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없습니다.
이끄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놓아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의 원인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벗는 첫 번째 행위입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안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생각하며 ‘잡으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이기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끈은 서서히 약해질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희년의 시작입니다.
매번 성체를 모실 때마다 희년의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면, 희년은 내 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하느님의 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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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후 목요일(1/07)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신다. 이제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말씀이시다. 그러시면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다. 예언의 말씀이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알리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놀라워한다(복음).
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기쁨으로 ‘한 해’를 지내라는 선언입니다. 눈먼 이들은 다시 보고, 가난한 이들은 기쁜 소식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으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할까 봐 조바심합니다. 물질의 가난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늘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기쁘게 살 수 없는 ‘함정’을 스스로 파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희년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없습니다. 이끄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놓아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의 원인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벗는 첫 번째 행위입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안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생각하며 ‘잡으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이기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끈은 서서히 약해질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희년의 시작입니다. 매번 성체를 모실 때마다 희년의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면, 희년은 내 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주님 공현 후 목요일(1/07)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매우 힘들다(제1독서).
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9ㅡ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
고향 나자렛을 찾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그리고 내가 고향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였다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직분을 준비하기 시작하신 곳이 갈릴래아였고,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활동도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려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루카 4,1-13)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뜻 안에서 살아가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갈릴래아는 유대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방인의 갈릴래아로부터 솟아났습니다. 왜 유다인들이 갈릴래아를 무시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① 예수님시대의 갈릴래아는 유대인들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13-12세기경 열두 지파 중 아셀, 즈불룬, 아싸갈, 납달리 그리고 후에 단 지파가 이 지역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만났고 그들과 타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 만이 아나라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600년 동안 갈릴래아는 외세의 강점과 지배 아래서, 순수한 인종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783년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셋이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건너편 길르앗 지역 및 지중해안 지역을 병합한 이래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갈릴래아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민족들의 이동이 빈번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맨 처음 언급한 “이방인들의 갈릴래아”(이사8,13-9,1; 마태4,15)는 잡다한 인종들의 거주지인 것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이 순수한 유대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갈릴래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갈릴래아를 다스리지 못했기에 갈릴래아의 이방화는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심화되었습니다.
②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인의 강한 액센트를 조롱했습니다. 갈릴래아인은 “H”,가 없는 “아레프”와 “H”가 달려 있는 “하인”을 똑같게 발음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갈릴래아인이 어느 날 한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소?” 유다인은 대답하였다. “어리석은 갈릴래아 촌놈이군. 타는 하모르(당나귀)인가? 마시는 하마르(포도주)인가? 입는 아마르(모직)인가? 먹는 임마르(양)인가? 알 수가 없구나.”
③ 갈릴래아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이방인들의 영향에 대해서 조심성이 덜했기 때문에 유대 전통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고, 남부 유대 지방 및 예루살렘과 긴장 관계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환상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로서 더러는 혁명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러한 갈릴래아에 대한 남부 유대적 시각은 부정적이고 때로는 경멸적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라는 말은 그래서 때로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④ 갈릴래아 지역은 비옥한 땅이어서 농업 소출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 사람들은 로마 정부의 무자비한 세금 징수와 팔레스타인에서 부과된 종교세(11조)는 비옥한 지역 농민들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헤로데 왕은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농 지주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땅을 포기하게 되고, 소작인으로, 그 다음에는 날품팔이로 몰락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등지에서는 그들의 땅을 가진 지주들이 늘어갔습니다.
갈릴래아 주민 대부분의 생계비는 연 200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시골뜨기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멸시의 대명사였습니다. 또 바리사이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보았는데, 그들이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지주들은 곡물을 매점한 후 곤궁기에 방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권력자들은 갈릴래아의 주산물인 밀, 기름, 포도주 등을 엄격하게 독점 통제해서 무역업자들과 직거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습니다.
⑤ 갈릴래아는 유다의 편에서 보면 지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변방에 속하는 지방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불렸습니다. 갈릴래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는 약속된 땅의 변두리로, 그 주민들은 하느님 백성에 속하기도 어려운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소외 계층과 외국인들은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지방에서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계를 없애고 우리를 뒤섞어 놓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복음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유다인들의 사고를 넘어 온 인류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그들에게 임마누엘이라는 메시아의 빛이 비칠 것을 예고했습니다(8.23-9.1 참조). 예수님께서도 이사야의 말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구원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집니다. “너희의 하느님께서 다스리신다.”(이사 52.7). 그러므로 지금은 회개할 때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활동은 놀라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그 지방 전체에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신 전도 활동을 예루살렘에서 마치시면,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을 시작할 것이며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매주 기도와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회당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위한 당연한 장소로 제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을 풀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것이고, 회당에 참례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송한 것입니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안식일 집회는 기도와 성경 낭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 예배 순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①셔마(신명 6,4-9;11,13-21;민수15,37-41을 합친 신조) ② 셔모네 에스레(18조항 기도문) ③ 파라쉬(모세오경 독서) ④ 하프타레(예언서 독서) ⑤드라샤(설교,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었음).
율법서(모세오경)는 언제나 낭독되었으나 예언서의 구절을 선택하는 일은 낭독자의 소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낭독할 권리가 있었고, 해설을 덧붙이거나 다른 훈계의 말을 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이 권리를 행사하기 원한다는 표시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 낭독을 포함한 그 의식이 시작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례 규정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고 공손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도 미사 전례 중에 독서자가 말씀을 봉독하기 위해서 일어나서 독서대로 걸어 나옵니다. 사제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독서대에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회중들도 복음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성경은 경건하고 공손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들을 때도, 선포할 때도 언제나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예수님께서 받아 드신 성경 구절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목을 펴신 것은 우연히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계셨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제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바로 나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선포는 “바로 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다만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가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이사야58,6 참조: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로 대체되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대체됨으로써 전체 내용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문장과 둘째 문장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성령을 받고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문장들은 구원의 증여자가 이루어야 할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 그리고 가운데 두 문장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복음 선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가운데 두 구절은 구세주의 활동을 언급합니다.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십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또한 갈릴래아가 왜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불렸으며,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족속으로 취급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다면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의 기막힌 가난, 노예들이 겪는 부자유, 그리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아셨습니다. 차별받는 것을 아셨고, 무시당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는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구세주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예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임으로서 입니다. 이것은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며 이 믿음은 들음으로써 옵니다. 믿음은 도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알게 되고, 알게 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며,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됨으로써 더 큰 사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은 희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50년마다 모든 노예들을 풀어주고 모든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되돌려주는 “희년”이 있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예수님을 믿는 이는 누구나 구원받게 하실 것입니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처지를 위해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예수님을 주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성경 낭독 후에는 가르침이 뒤따랐습니다. 그 가르침이 강렬한 만큼 인상적인 단어들로 된 한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때를 선포하시고 그 때가 도래하였음을 알리십니다. 억압받고 절망 속에서 살아야 했던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 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저주받은 족속이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며,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라면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②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왜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