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본당 [한] 惠化洞本堂

1909년 서울에 들어온 독일 바이에른지방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 수사들이 백동(栢洞, 혜화동)의 3만평 땅에 수도원을 건설하자, 이 일대의 교우들은 거의 모든 성사를 이 수도원 성당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원산(元山)교구의 포교를 담당하고자 1927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결정적으로 옮기게 되자 백동 교우들은 이 수도원 성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본당설립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종현(鐘峴, 명동)본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서울에서 세 번째로 혜화동본당을 설립하였고, 초대 본당신부로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시잘레(Pierre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9년 5월 신설된 소신학교(건물은 수도원 성당을 사용) 교장신부로 전임, 2대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가 새로 부임, 수도원 부속건물인 목공소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 그 해 9월에 라리보(Adrianus Larribeau, 元亨根) 부주교는 본당 주보성인을 ‘성 베네딕토’로 정하고 강복예절을 거행한 뒤 첫 미사를 드렸다. 1936년 3대 본당 신부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가 부임 당시의 본당 주변의 신자수는 1,400명, 14개 산하공소의 신자수는 1,444명이었다. 1937년 혜화유치원 개설과 때를 같이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본당의 전교와 유치원 원아 교육수녀가 부임하였다. 당시 평신도로 장기빈(張箕彬) · 장면(張勉) · 장발(張勃) 3부자를 비롯해 박병래(朴秉來), 유홍렬(柳洪烈), 한창우(韓昌愚), 정지용(鄭芝溶) 등 유지 지식인이 많았으며, 이들은 모두 재속 성 프란치스코회(제3회) 회원들이기도 하였다. 1939년 4대 본당신부로 생제(Singer, 성재덕) 신부가 부임, 1942년 제기동(祭基洞)본당을 분리 독립시키는 한편, 1943년에는 성가수녀회 수녀원을 창설하였으며, 1944년에는 미아리(彌阿里)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분리시켰다.

1950년 11월 7대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가 부임, 1954년 숙원이던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 8대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공사를 완공, 1960년 5월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집전미사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9대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는 1965년 포천묘지(15만 7,000여평)를 조성하였다. 11대 박귀훈(朴貴勳, 요한) 신부는 1975년 성북동(城北洞)본당을 분할 독립시키면서 그 자신이 성북동 1대 본당신부로 전출하였다. 12대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는 본당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여 1975년 12월 구 사제관을 헐고 교리실을 겸한 사제관(110평)을 신축 낙성시켰고, 역시 본당 창설 50주년 기념사업으로 1977년 혜화동본당사 ≪백동반세기≫(栢洞半世紀)를 발간하였다. 1979년에는 문산(汶山)본당 돕기운동을 벌여 모금한 3,000만원을 전달하였다. 현 13대 이기명(李起明, 프란치스코) 본당 신부는 부임 직후인 1980년 수녀원(61평)을 신축하였다. 현재 본당 소유대지는 1,178평, 연건평은 564평이고, 관할구역은 이화동, 혜화동, 명륜 4동, 연건동, 와룡동, 동소문동 일부, 성북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신자수는 5,554명(1983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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