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정화

 

성전 정화


성전 정화사건의 배경이 되는 축제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축제이다. 이 축제는 이스라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축제이다.


예수는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해방절에 관습적인 예루살렘 순례를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성전에서 많은 장사꾼들을 보시고 예수는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고 비둘기 상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신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성전 내에서 상행위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특정한 누구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권을 가진자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 보면, 많은 유대인들은 해방절이 되어서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과 이방인 지역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을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성전 내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양이나 소 혹은 비둘기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방이나 타국에서 올라온 축제 순례자들이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왔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순례자들을 위해 희생제물용 짐승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연히 짐승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재로 그 거래가 성전 광장에서만 이루어졌다고 전한다.1) 그렇다면 그러한 상행위는 정당한 상업행위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의 과격한 행동에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18절)라고 대든다. 예수는 이에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대답을 하신다. 이 말씀은 동문서답인 듯 보이지만 그들이 요구한 표징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행위는 그것이 성전 내의 장사로 이익을 얻는 가진 자들의 횡포를 꾸짖고 자신의 부활을 당신의 권위의 징표로 드러낸다 하더라도 부당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부당한 표현을 요한복음사가는 왜 등장시키는가?


여기에는 새로운 신학적 목적이 있다. 복음서의 저자의 관점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모든 축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제로부터 유일한 성전이다(2.21).2)


이러한 것은 해방절이 다가옴에 따라 예수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모습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2.13). 예수께서 소와 양을 쫓아내신 것을 되풀이하면서 복음서 저자는 해방절에 쓰이도록 제정된 제물들이 성전에서 추방되었음을 지적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유다인 해방절이 폐기되었음을 알려 주는 표지인 것이다. 세 번째 해방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해방절 즉 예수를 희생 제물로 하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3)


요한복음서는 공생활 초기에 성전 정화사건을 넣음으로 그리고 세 번의 해방절을 언급함으로 처음의 해방절은 마지막 해방절의 상징으로써 자리잡고 있으며 그 완성은 마지막 해방절에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통하여 해방절의 신학적 의미를 연장,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한의 이러한 예수의 활동을 축제적 시기와 연결함은 보다 분명한 의미를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성전정화 사건은 요한복음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물음은 이 사건에서 예수의 행동 안에 폭력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폭력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동에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는 이에 적극적인 대답을 피하고 있다. 예수의 행동의 근거가 성전 내에서의 상행위가 잘못 된 것이라면 예수의 폭력은 어떻게 인식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옳은 일이라면 폭력도 허용된다면 그리스도를 죽게 한 유대인의 폭력도 정당하지 않은가? 본 사건 기사는 결코 그런 결론을 목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의 성전 정화의 의미는 폭력으로 열정을 보이시는 예수의 행동이 아니라 제물이 변경과 성전의 변경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각절을 분석함으로 그 의미에 접근해보자.




13절 해방절이 다가오자 ~ 올라가셨다.


해방절4) :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가 공생활 기간동안 세 번 해방절을 보낸 것으로 보도한다(2,13;6,4;11,55). 이는 예수의 공생활이 3년 가까이임을 드러낸다.5)


그리고 유대인들의 해방절이란 표현은 유대인들과의 거리감을 시사한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반대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Ἰουδαίων(유다인의)6)”라는 수식어를 넣어 해방절을 언급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유다인을 예수와 교회의 적대자로 설정하는 요한의 습관 때문이고 또는 그가 그리스도교의 같은 이름의 축제와 혼동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복음서는 희랍 문화권에 사는 독자들을 위한 기록이므로 유대인의 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7)


‘ἀνέβη(올라갔다)’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데 대한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예수의 예루사렘 방문이 명절과 연결됨은 당시의 시대적 관습으로 본다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 가량 되기에 이런 표현은 의례적이다.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절은 맞이하여 순례차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13절에서 중요한 언급이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언급이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절기를 지키신 것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이와 함께 절기와 사건을 밀접하게 연결짓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옛 시대 율법의 완전한 준수자요 성취자이고 옛 율법의 파괴자가 아닌 완성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14절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여행의 과정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갑자기 독자를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8)


성전 마당 : Ἐν τώ ἱερῷ라는 말은 지성소라는 엄밀한 뜻으로 말하는 성전(ναός)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 있으나 이방인의 광장이라고 부르는 하급 광장이었다. 그곳까지는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 마당 가운데도 외부에 속한 구역인 이방인들의 마당에서는 장사꾼과 환전상들이 축제를 앞두고 제물과 성전세를 마련하기 위한 유대인들을 위해 북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성전세는 고대 시리아 화폐로만 지불해야 했는데 당시 시중에서는 로마제국의 화폐만을 사용했기에 환전상이 있음은 당연하다9). 그리고 멀리서 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제물을 집에서부터 가지고 온다는 것은 고역이었을 것이고 성전 앞에서 제물을 구한다면 구태여 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에 장사꾼은 크게 성업을 했을 것이다.


성전에서의 상행위 자체가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로 상행위의 장소가 기도하는 곳이고, 그러한 행동들이 전혀 비난의 여지가 있음은 분명히 언급하지 않지만 당시의 사회 상황, 즉 종교지도자들이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독점했다10)는 점을 상기한다면 예수의 행위가 부당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들의 제물매매 장소였던 이방인의 뜰11)-전통적으로 항상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가져야한다고 요구된 장소-은 이방인중 신실한 자들이 예배할 수 있고 머물 수 있는 성전의 유일한 기도처였다. 그러나 해방절 전후에 이러한 관습은 무시되고 있었다. 소와 양을 파는 점포, 광장 여기저기에 벌려놓은 환금상 등에 의해 성전은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큰 장터가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사제들은 이러한 상거래를 말리지 않고 있다. 이는 그들이 상거래로 큰돈을 벌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15절에서는 예수께서 오로지 장사꾼과 환전상들만을 상대로 성전 정화를 펼친 것으로 보도된다.12)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 : 이들의 장사 목적은 희생제사의 제물을 팔아 미처 제물을 준비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성전에 들어갈 때 제물을 살수 있음은 편리한 일이었을 것이다.


환전꾼들 : 성전세는 반드시 시리아의 동전으로 내야만 했다. 그리고 환전상들에게 적당한 웃돈을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환전은 한 종류의 화폐를 다른 종류의 돈으로 바꾸는 곳을 뜻한다.


양과 소의 상인과 환전꾼들과는 달리 예수는 가난한 이들의 제물로 비둘기를 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이것들을 치워버리시오.”라고 하실 뿐 비둘기를 쫓지는 않으셨다.13)


15절 채찍(φραγέλλιον) 라틴어 flagellum에서 온 말로 매, 채찍이라는 뜻을 지니며 여기에서는 소를 모는 채찍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14)


모두 양과 소와 함께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 모두는 예수께서 상행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내쫓았음을 지적한다. 내쫓다는 채찍이란 말에 의해 더욱 강한 의미를 얻는다.15) 요한은 아마도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가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희생제사를 위한 양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6)


예수는 소와 양을 성전에서 쫓으심의 순간은 당신 자신이 소와 양이 희생제사에서 차지하던 몫을 대신함, 즉 제물이 되심을 상징하는 계시의 순간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돈도 가져갈 필요가 없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심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로 스스로 올라간 어린양의 죽음을 지나 그 제물이 영원으로 자리하는 그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16절


내 아버지의 집17)을 : 성전 정화를 하고자 한 예수의 의도가 표현된 말이다. 예수의 이 말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루가2,49)으로 표현함으로써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 정화를 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전 정화를 예수의 메시아적인 행위로도 이해할 수 있다.18)


장사하는 집: ‘장사하는 집’이란 말 자체는 장사하는 장소를 뜻한다. 장사하는 집은 내 아버지의 집과 대칭적으로 자리한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예레미야서 7장 11절을 인용하면서 장사꾼들이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고발한다.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고발은 없다. 그러나 요한은 후대에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19절에 비추어 그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집’은 예수에게만 드러난다(14,2). 그리고 예수께서 성전을 가장 완전히 완성시켰으므로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19)




17절 제자들은 ~ 기록된 것을 상기하였다.


16절은 예수의 성전 정화를 하게 한 권위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예수의 이 말은 출애급 25,8절의 성소 건립에 관한 하느님의 계시를 상기시킨다. 17절에서는 제자들의 기억으로 기록되어 나타나는 시편 69,9의 열정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성전이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원래의 목적과 의도대로 사용되기를 희망하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바로 예수께서 가지신 하느님께 대한 성전의 희망과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20)


17절의 제자들의 상기와 그리고 22절의 부활 후에 제자들이 보다 깊은 이해력과 믿음을 가지고 전체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은 복음사가의 설명이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집에 대한 예수의 열정이 죽음을 초래할 것으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나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 시편저자는 자신의 고통을 성전에 대한 자신의 열정 탓으로 돌리고 있다. 요한은 이 말을 예수의 메시아적 활동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암시로 본다. 하느님을 위한 그의 열정이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21)




18절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소동의 순간이 지나간 뒤에 처음 등장한 유대인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예수가 행한 일에 대해 심문하듯이 접근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할 만한 표징22)을 요구한다. 이 표징은 예수의 하느님 아들로서 영광을 드러내달라는 이야기라기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요구하는 비웃음의 일종이다.


이들의 표징 요구는 예수의 권위를 묻는 말이다. 예수의 권위는 “아버지의 집”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유대인이란 예수에게 적대적인 특징을 가지는 유대인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상인들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다.




19절


권위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표징도 나오지 않는 대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나오고 여기에 어떠한 설명도 제시되지 않는다. 표징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거절된다. 대신에 오해를 야기시킬 계시의 말씀이 이어진다. 하나의 수수께끼 형태의 역설적인 말이 주의를 요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ἱερόν은 성전 본 건물에 사용된 용어다.


19절은 표면상 드러나지 않은 역설적 표현을 사용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심지어 당시에 그의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이었으며 유대 지도자들의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나아가서 그의 마지막 법정에서 심문 당할 때도 제기되어 나온 말이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의미했던 실재적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허무시오 : ‘λύσατε’ 이것은 조건절을 나타내기 위한 명령형이다.23) 요한은 분명 이 절이 일차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성전 파괴를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헐다(λυειν)는 건물을 허는 것과 몸을 파멸하는데 모두 적용되는 말로써 생명의 해체, 즉 사망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한다.


성전(τόν ναόν)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ναόν는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서는 ἱερόν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구분하자면 ναόν는 성전 중심이나 지성소를 뜻하고 ἱερόν이 성전 전체를 뜻한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


세우다(ἐγείρω)라는 말은 허물다와 대칭되는 말로 건물을 짓는데 대해서 적절하게 사용된 단어이다. 이 말은 건물의 재건과 개개인들의 부활에 대해 사용된 말이다. 이말은 유대인들에게 큰 오해를 사게하고 예수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마태 26,60; 마르 14,57-59)에 나오는 것처럼 고소자 중 하나는 예수가 성전을 헐면 다시 즉시 일으킨다고 했다고 증언에서 마태오 복음 27,40과 마르코복음 15,29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최후의 고난을 겪고 계실 때 조롱하던 자들이 동일한 비난을 사용한다. 심지어 사도행전 6,14절에서는 스테파노를 고발하던 무리들이 그의 말에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한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도 고칠 것이라고 스테파노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들었습니다.”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19절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가 얼마나 깊고 충격적인 사건인지를 짐작케 한다.




20절


유대인들은 19절에서의 예수의 말에 불합리한 점을 지적한다. 사실 돌로 지은 큰 성전을 짧은 시간에 부수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더군다나 다시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요한의 이차적인 해석이다.24) 이러한 반어법은 요한이 특징적으로 쓰는 기교이다.(3.3)


이 성전은 사십 육 년이나 걸려서 지었는데25) 당신이 그것을 사흘 안에 세우겠단 말이오?


이것은 예수의 하느님의 아들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19절의 예수의 말씀이 문자그대로 하면 터무니없는 일이다. 20절에 유대인들의 이해 못했음이 오해에 기초한 질문으로 언급되고 이어 21절에서 복음사가의 설명이 이어짐으로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 속에 감추인 참된 원형을 보지 못하고 문자적 의미의 성전만을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상징화법에 익숙하였기에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다고 생각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계 지도자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웃는다. 유대인의 반응은 유대교 전체적 반응을 대표한다. 22절을 보면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조차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이 저술되는 당시에도 이 말에 혼선을 빚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요구한 표징의 개념과 예수의 말씀과 그 성취사이에는 커다란 이해의 차이기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었다. 19절과 22절은 부활의 실재적 사건을 통한 제자들의 믿음과 연합하여 기억을 확실히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의 직무와 공생활의 영적인 성격을 펴기 시작한 것이고 그 결과로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공개적인 반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26)


본문의 계산대로라면 예수의 공생활 기간과 성전의 완공시기가 비슷하지만 앞에서 이미 제시했둣이 성전은 기원후 63년까지는 완성되지 않았었다. 요한의 이 기사가 역사적으로 근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가능성은 있다. 우선 해석에 있어 단순 과거를 계속적 용법으로  “아직 짓고 있는 중인 이 건물은 46년 동안 짓고 있는 중이다.”라고 번역해야 할 지도 모른다.27) 그러나 이는 가정일 뿐이고 요한이 성전 건축이 시작 된 때를 잘못 추측했거나 혹은 그 기간을 잘못 계산함으로 성전건축이 끝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 둘은 성서 주석하는데 무방하다.28)




21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씀하셨던 것이다.’


몸(σώμα) 신약성서에서는 51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는 바오로를 통해 참된 내용을 갖는 말로 전통적인 의미로는 시체이다. 죽은 σώμα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마태 27,52). 죽었다 부활한 예수의 몸을 성전과 연결되기도 한다(요한 2,21).


예수는 자신의 몸이 성전임을 가리켜 말했다고 복음사가는 설명함으로 유대인들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지적한다. 이들의 오해에 대해 21절은 후대 독자들과 당시의 오해에 대한 요한의 답변으로 제시된 것으로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 있다. 예수는 자기자신에 관해 말하였다. 성전은 그의 몸을 뜻하는 말로서 곧 그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29)


요한은 예수의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21절은 요한이 설명하는 말 즉 요한복음의 특징인 자신의 신학적 인식의 첨가로 보아야 한다. 복음사가의 이 설명으로 예수의 19절에서의 계시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몸을 “허물도록” 자유롭게 내어주지만 “사흘 안에 다시 세운다”는 것이다.30)


요한은 몸(σώμα)이란 단어를 오직 예수의 죽은 몸에 대해서만 사용한다.31) 요한에게 있어 예수의 인간의 몸은 하느님의 현시가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참된 성전, 참된 예배의 유일한 중심이 되었다. 예수의 몸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이기에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고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고 생명이 넘치는 장소이다.32)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몸을 성전으로 언급하고 있다.




22절 ‘제자들은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던 것을 상기하고’


이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의 공생활 기간 중에 많은 표징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위에 대해서는 유대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모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부활과 연결되어야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성전의 파괴는 예수의 몸의 파괴에서 완성되어지고 새 성전의 건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된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파괴할 것이고 예수는 새성전을 완성하실 것이다. 19절의 성전을 허문다함은 예루살렘에 있는 돌성전을 허무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허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은 그들의 성전을 함께 허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성전의 건설과 회복을 의미한다. 21절은 후대 독자들과 당시의 오해에 대한 요한의 답변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여지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해될 새로운 성전의 건설과 새로운 예배 질서의 회복을 의미했던 것이다.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이후 성령을 받고서야 예수의 계시를 상기하고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는 복음사가의 설명이다. 여기에서 성경은 17절의 성서 구절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예수의 말씀은 20절의 예수의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2,13-22은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성전 정화가 아니라 죽고 부활한 예수의 몸이 성전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옛 성전으로서의 헤롯 성전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새 성전이며 참의미의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기능-하느님의 임재의 장소이고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며 새로운 질서와 참 예배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 새질서와 옛질서 사이의 중재는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며 이것만이 새로운 성전의 성립과 생명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3. 신학적인 의미의 종합




본 사건은 요한복음에서의 서두에 이은 ‘표징의 책’이라 일컬어지는 예수의 공생활  부분 안에 등장한다. 예수의 공생활은 기적과 치유라는 이적을 통하여 당신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는데 본 사건을 통해 기적대신 기존의 관습적인 예배행위를 새로이 정립하고 있다. 기적대신 당신의 성전에 대한 열정을 통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권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본 사건은 요한복음에 있어 전혀 새로운 차원을 제공하고 있다. 예수의 공생활 중에 표징으로서 직접적인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의미를 당신의 생애 마지막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그 사건 자체로 의미를 알 수 있고 모든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애 끝과 연결함으로써 본사건의 구속적 의미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구속적 의미를 알게하기 위해 요한복음사가는 ‘성전’과, ‘소와 양’이 ‘그리스도의 몸’과 대조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복음사가는 그 서두로써 예수의 예루살렘 등장을 통하여 연다. 축제는 예루살렘으로 예수께서 올라갈 계기로 작용한다.33) 제자들의 수반은 언급되지 않지만, 그들은 당연히 증인들로서 전제되어 있다. 분명히 유대인 외의 독자를 생각하지 않은 공관복음의 설화가 단순히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만을 보도한다면, 여기서 이용된 자료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을 발견하고 예수는 이들을 내쫓는다. 여기에 어떠한 판단이나 인상이 기록되지는 않았다. 예수의 공격에 의거하여 유대인들은 18절에서 그것의 합법성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 권한이 무엇인지 표징을 요구한다. 그 표징으로 예수는 성전의 파괴와 새로운 성전의 건축이라는 말로써 응답하신다. 당시의 이 말은 표징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정화 사건을 공생활중의 예수의 첫 해방절의 예루살렘 방문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자리함으로 본 사건이 단순한 수난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예수의 전 공생활의 시작으로서 마지막 순간이 가져올 메시아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요한은 본 사건을 자신의 신학적 목적에 따라 복음서 앞부분에 둠으로써 본 사건의 지평을 예수 그리스도 생애 전체로 넓히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전향은 ‘표징의 책’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전반부에 강한 신학적 의지를 보여준다. 단순한 사건보도에 그치지 않고 이방인 독자를 위한 신학적 해설을 추가함으로 부활 신앙과 본 사건을 연결하려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 의미를 지니는 본사건은 유대인들이 요구한 예수의 성전정화의 권위를 보여주는 표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행위와 말씀은 표징이다. 성전 정화사건은 예수의 행동뿐만 아니라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공생활 첫머리에 심판과 구원을 일으키는 종말론적 파멸이 그 표징으로 등장한다. 표징으로서의 예언, 즉 예수의 말씀에는 특수한 양식이 들어있다. 그의 첫 문단은 예언적 문체의 풍자적인 명령으로 구분되었다.34) “이 성전을 허무시오” 성전 파괴의 심판이 예수에 대한 유대교적 불신앙의 결과라는 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허무맹랑한 명령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예수의 가르침인 것이다. 예수의 말에는 구원의 완성으로서의 새로운 성전을 지향하고 잇다. 단순히 책벌하는 차원을 뛰어넘고 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 본문은 성전 파괴의 위협의 말이 새로운 예언과 결합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확언의 차원을 넘는다. 즉 종말론적 예언으로서 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사흘, 성전의 붕괴는 요한이 이미 예수의 부활과 로마제국의 공격으로 기원후 70년 파괴를 알고 있었기에 이것을 성전정화사건의 신학적 강조를 위해 부각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사가는 20-21절을 첨가하여 예수의 말을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 그는 예수의 말을 심하게 오해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의해 말을 이어간다. 그들은 예수의 성전 재건의 발언을 평범한 의미에서의 기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전은 그의 몸을 뜻하기에 성전을 허물고 새로 새운다는 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것이다. 이것을 제자들은 부활 후에야 알았다라는 언급은 본 사건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직접 의미를 두고 있음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첫 해방절의 성전을 세우다는 마지막 해방절을 통해 즉 십자가를 세우고 부활을 통하여 새성전을 세운다로 전이된다. 예수의 행동과 말씀은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당신 몸이 대신할 것임으로 예언한다. 옛성전은 허물어지고 다시 성전이 세워지는데 그 성전이 그리스도이신 예수 자신이시다. 성전의 역할을 하느님 스스로 수행함으로 완전한 성전이 되신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성전이 새워진 후 제물은 무엇으로 하는가. 여기에 또다시 당신의 몸이 자리한다. 소와 양을 쫓다는 잡히시다와 십자가에 달리다로 변형된다. 예수는 상인들을 쫓으면서 동시에 희생제물인 소와 양을 내쫓으신다. 예수자신이 새로운 성전의 제물이 됨으로 더 이상 소나 양이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예수 자신이 제물이 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당신의 몸안에 당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완전한 통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치 않게 된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어지는 제사의 제물이 됨은 스스로 완전히 충만한 제사를 이루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부활을 체험한 후에 즉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신앙을 획득한 다음 계시자의 계시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계시는 세상의 공격을 받아야 한다. 예수의 계시는 세상이(유대인들이) 자체의 영광을 위해 계시자로부터 합법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세상의 불신앙을 명시한다. 그는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증명은 부활 신앙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종말적 신앙을 전제하게 된다.


2,13-22의 사건은 단순한 보도의 차원을 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과 연결되는  예수의 자기 계시를 기적이라는 표징이 아니라 실재행위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내에서의 본 사건의 중요성은 복음내 전체에 흐르고 있는 요한의 목적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에 따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려고 했던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요한복음 처음에서 끝까지 분명하게 나타난다.


본 사건이 공생활 초기에 자리함으로 예수의 수난과 직접 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완성해야할 성전을 드러내심과 자신이 대신할 소와 양의 제물로서의 역할을 하실 것임을 공생활 초기에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다. 이로써 요한복음도 공관복음서들과 같이 예수의 수난과 감추어져 보이지 않게 그러나 그것을 내포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즉 성전정화를 2장에 배치함으로 제물로서 바쳐질 당신의 삶과 생명을 극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암시는 부활사건까지 가려져 있지만 부활이후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자기 계시인 것이다.  




성전 정화 사건은 제사의 방해가 아니라 정화이다. 거룩함은 성전 외곽을 포함한 전체에까지 확장되었다. 예수의 행위는 성전이 장사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예언자적인 확신 아니 하느님의 아들임을 근거한 것이며, 성전은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하는 곳에서 희생제물을 쫓음으로써 기도는 희생제사보다 우월하다. 예수의 행동은 메시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 측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35)


요한복음의 첫 번 해방절은 마지막 해방절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마지막 해방절에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소와 양은 쫓겨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심으로 돈 대신 자신의 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줌으로 스스로 제물이 된다. 예수는 해방절에 참여하셨다. 그분의 목적은 해방절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예수는 해방절을 완성하실 분이다. 예수는 지상의 성전을 정화하시고 결정적인 성소인 당신의 부활한 몸을 선언하신(요한 2.13-22) 새로운 성전의 해방절의 완성이시다. 그곳에 희생으로 바쳐질 빠스카 양 즉 그리스도 자신이 서 계신다. 요한이 해방절의 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암시함으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바로 해방절의 완성임을 드러낸다. 이 글은 카테고리: 지난 묵상 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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