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황: 일흔 두 제자들이 기쁨에 넘쳐 돌아와서 보고를 한다. 주님! 저희가 이런 저런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쁨에 넘쳐서 말씀을 하십니다.

21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나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돌아와 그들이 행한 일들을 보고한 것은 감사와 새로운 계시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돌아오자 기쁨의 탄성을 지르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같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계시하셨으니 아버지를 찬양하나이다. 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처럼 이루어졌나이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성령의 감화에 의한 것이다. 즈가리야, 엘리사벳, 마리아의 기도도 성령의 감화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기도 형식을 보면 찬미와 감사의 형식이다.
즉 나 또한 기도할 때 청원보다는 찬미와 감사가 앞서야 되지 않을까…

또한가지 예수님의 기도는 모두 “아버지”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정답게 부를 때 사용하던 아람어 아빠(Abba)(마르코 14,36)라는 단어의 번역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지극히 친근한 어조로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셨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감추다.
도대체 무엇을 감추시고 드러내시는가?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며 사탄의 패배이며 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어떤 사람들을 뽑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시대에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은 바로 율법학자들이었다.
어린이들은 율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교육받은 일도 없기에 죄를 피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죄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율법학자의 율법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덕행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감추시거나 드러내실 때 그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것을 초대 교회는 체험하였다.

│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도 아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아들과 그리고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친교로 결합되어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는것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는 것.
예수님과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 23 그리고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도다!
│ 24 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알려 주신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보는 것은 반드시 듣는 것을 동반해야 한다.
예수님에 관한 계시가 무엇인지를 들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올바로 볼 수 있다.
보고 듣는 것.
내가 그분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

무엇을 들으려고 했고, 무엇을 보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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