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1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2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4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6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7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4복음서에 수록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서 예수님에 관한 매우 오래 된 이야기로 보인다. 당초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죄를 저지른 후에 엄격한 보속이 규칙으로 되어 있던 초대 교회가 보속이 없이 간음한 여자를 즉시 용서해 준 온당치 않은 너그러움을 어떻게 복음서에 첨가 시킬 수 있었는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의 신자들은 모든 죄는 세례를 통하여 사해진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죄, 즉 우상숭배, 불경죄, 살인, 간음, 거짓 증언, 사기와 같은 큰 죄는 다시 용서 받을 수가 없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몇 가지 죄목에 대해서는 두 번째까지 용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것 같으나 배교, 간음, 살인은 너무 엄청난 죄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씻지 못한 채 남게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더 큰 죄목들이 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죄가 크냐 작으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특히 간음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2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간이 크신 예수님!
남들이 자신을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굳굳하게 하신다. 남이 뭐라 해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
3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4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다. 신명기 9,15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명의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아내를 거슬러 불리한 증언을 할 우려가 있기에 여기서 요구하는 목격자에서 제외된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이 죄인을 다룰 가장 적절한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6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성서에 정식으로 사형시키는 방법이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에제키렝서 16,38-40에서 보듯이 간음에 대한 벌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 뚜렷이 나와 있고 예수님 시대에도 여전히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니 고발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한다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한 예수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된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면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 도 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로부터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즉 산헤드린(예루살렘에 있던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회의)은 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더이상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정직한 대화를 고의적으로 피하고 예수님의 신용을 떨어뜨려서 그들로부터 제외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사실 궁지에 몰린 간음한 여인의 처지가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이용해서 무기로 삼아 예수를 골탕먹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말 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과 부정직과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못된 생각을 경멸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였던지, 아니면 그들의 교활한 함정에 동요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같다.
7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절대적인 원리 원칙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든지 판단을 할 수 없고, 또한 어떤 범죄장에게도 그에 마땅한 벌을 줄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중을 뚫어 보고 말씀을 하시는것이다. 이들은 간심한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제 율법학자들이 난관에 빠진 것이다. 돌로 치자니 자신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안치자니 율법을 우습게 만들게 되는 것이고.
한마디로 손해 엄청 본 것이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하긴 자신의 죄를 인식한 사람이 다른 죄인에 대한 심판관으로는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여인인 단죄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가 버렸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렸다. 그런데 나이많은 사람들부터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가끔 우리는 “나는 죄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세상에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자신이 그것이 죄라고 못느낄 뿐이지…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 처럼 우리의 모습 또한 더욱 겸손해 지면서 남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모두 가버리고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동정심 없는 행위의 묘사와 곧 돌로 맞아 죽을 너무나도 미약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여인의 모습때문에 성 윤리의 기준에 대하여 감정에 치우쳐 여인의 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처사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자비와 용서는 바로 이제부터 더는 죄를 짓지 안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즉 죄의 용선라는 선물은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다.
성전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께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흠집을내서 곤경해 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안에 있는 악한 마음을 보시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를 보게됩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이 가득한 마음안에서만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용서와사랑을 하게되는것입니다.
이웃들에게하는 충고나조언도 사랑이 없이는 한낱 교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와 자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로써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교만과아집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우리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교만과이기심을 알기 때문에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처럼 잘못살다가 하느님대전에 갈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할까요??
두려운 마음입니다.
내안에 가득한 교만과이기심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으로 자꾸만 살아가고 있는
저에게 주님께 겸손과 진정으로 내 가족과이웃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라고 청해봅니다.
나중에 저도 하느님께 돌을 맞을까 겁이납니다
무섭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용서해주시리라 생각하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