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52 그러자 유다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이 정녕 마귀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고 하니
53 그래 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5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 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될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5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 가셨다.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요구를 채움을 듯한다. 죽음을 겪지 않는다(직역하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표현 방식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52 그러자 유다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이 정녕 마귀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예수님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 신적 권력을 자처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유다인들은 말을 한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 안에서 과연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고 하니 53 그래 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아브라함과 예언자들, 이른바 하느님의 사람들도 죽음을 맛보았는데, 그들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되묻는 악의적인 거부이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외형적인 뜻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맛보다”란 표현은 “죽음을 겪는다”에 비해 모든 인간이 숙명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쓰라린 죽음의 운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하느님만이 영원히 사시는 분이요 생명을줄 수 있는 분인데,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자처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5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 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영광스럽게 한다”란 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관련된 “영광”을 뜻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활동 가운데서도 이미 이루어진 영광을 언급한 대목이 더러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재적 의미가 강조된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계속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으로서 계시다는 것이다. 바로 이분은 예수님을 파견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신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현재적 영광은 예수님께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계속적 증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될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은 하느님과 친교를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기에 자신의 망르 지키도록 요구하고 구원의 약속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미래에 희망을 두었고, 예수님의 날(내 날)을 보겠기에 즐거워했으며, 또한 보고서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증언한 셈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내다본 기쁨과 희망이 예수님께 와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내 날”은 예수님의 지상 출현을 가리키며, 하느님께 유보된 날(야훼의날)과 관련된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목적으로서, 또한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근원으로서 선포되신다.
57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쉰 살”은 실제 나이가 아니라 남자의 원숙한 연배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의인은나이 들어 죽기 직전에 천상계를 내다본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표현된 말로서 “예수님! 당신은 아직 그런 연배도 아닌데 천상계를 내다보았단 말이오?”하고 빈정대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몰이해와 오해가 만들어낸 말이다.
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시간의 지배 속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 곧 영원한 현재 속에 실재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세상에 태어난 적이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월등하고 아브라함보다 절대적 우선권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신적 품위와 실존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에 대한 약속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언제나 하느미께 속해 있고, 집에 머물러 있는 아들로서(35절)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를 이끌고(36절)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51절). 또한 예수님의 이 자기계시는 ‘나는 있는 자 곧 나다”라고 계시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가장 가깝고 그 맥락도 같다.
5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믿으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신적 품위를 갖춘 예수님께 감히 폭력을 행할 수는 없었다. 일부 사본에는 “그분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몸을 숨기다”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더는 계시 말씀을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자리하는 것조차 거절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났다는 표현도 맥락으 같이 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성역을 떠나갔다는 뜻으로서 예수님을 믿지 안는 유다인들의 비구원과 그에 대한 그들 자신의 책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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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도대체 당신이 누구요? – 말씀연구 ┼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요구를 채움을 듯한다. 죽음을 겪지 않는다(직역하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표현 방식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52 그러자 유다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이 정녕 마귀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예수님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 신적 권력을 자처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유다인들은 말을 한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 안에서 과연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고 하니 53 그래 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아브라함과 예언자들, 이른바 하느님의 사람들도 죽음을 맛보았는데, 그들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되묻는 악의적인 거부이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외형적인 뜻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맛보다"란 표현은 "죽음을 겪는다"에 비해 모든 인간이 숙명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쓰라린 죽음의 운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하느님만이 영원히 사시는 분이요 생명을줄 수 있는 분인데,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자처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5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 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영광스럽게 한다"란 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관련된 "영광"을 뜻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활동 가운데서도 이미 이루어진 영광을 언급한 대목이 더러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재적 의미가 강조된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계속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으로서 계시다는 것이다. 바로 이분은 예수님을 파견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신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현재적 영광은 예수님께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계속적 증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될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은 하느님과 친교를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기에 자신의 망르 지키도록 요구하고 구원의 약속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미래에 희망을 두었고, 예수님의 날(내 날)을 보겠기에 즐거워했으며, 또한 보고서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증언한 셈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내다본 기쁨과 희망이 예수님께 와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내 날"은 예수님의 지상 출현을 가리키며, 하느님께 유보된 날(야훼의날)과 관련된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목적으로서, 또한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근원으로서 선포되신다.
57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쉰 살"은 실제 나이가 아니라 남자의 원숙한 연배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의인은나이 들어 죽기 직전에 천상계를 내다본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표현된 말로서 "예수님! 당신은 아직 그런 연배도 아닌데 천상계를 내다보았단 말이오?"하고 빈정대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몰이해와 오해가 만들어낸 말이다.
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시간의 지배 속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 곧 영원한 현재 속에 실재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세상에 태어난 적이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월등하고 아브라함보다 절대적 우선권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신적 품위와 실존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에 대한 약속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언제나 하느미께 속해 있고, 집에 머물러 있는 아들로서(35절)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를 이끌고(36절)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51절). 또한 예수님의 이 자기계시는 ‘나는 있는 자 곧 나다"라고 계시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가장 가깝고 그 맥락도 같다.
5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믿으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신적 품위를 갖춘 예수님께 감히 폭력을 행할 수는 없었다. 일부 사본에는 "그분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몸을 숨기다"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더는 계시 말씀을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자리하는 것조차 거절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났다는 표현도 맥락으 같이 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성역을 떠나갔다는 뜻으로서 예수님을 믿지 안는 유다인들의 비구원과 그에 대한 그들 자신의 책임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이미 언제나 하느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의 집에 머물러 있는
아들로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참된 자유를 주시며 또한 죽음을
이겨 내는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해방과 자유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정신과 영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기에 육체만 죽지 않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낡은 몸은 버리고 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일에 더 힘을
써야 하겠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시아가 자기후손에게서 나오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서는 성조아브라함을 믿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우매함은 이제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시대의 유다인들이나 지금의 우리들 역시 진실을 보지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예수님을 믿지않고 내 방식대로 살면서
예수님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때 우리는 유대인 못지않게 그 때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을것입니다.
우리도 하루하루 삶 안에서 사랑하며 살지않고 세속에 얽매여 내 방식대로 살아갈 때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처럼 성전을 떠나가실까 두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못하는데 말입니다.
주님 제 안에 머물러 계시어 제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올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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