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누구를 두려워 해야 합니까?


당신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넘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내 자신을 알려하고 그리고 알았을? 때 내 위치를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차리며,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먼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제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제자가 제 스승처럼 되고 종이 제 주인처럼 되면 넉넉합니다.”


위의 관계는 우월과 종속의 관계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제자로 남아 있는 한, 그는 스승 밑에 있는 것입니다. 제자나 하인 모두 예속된 위치에 있으며 그들은 더 위대한 자, 즉 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나 보다 많은 권력을 지난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이나 명령을 받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항상 제자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시니 이 관계는 언제나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승인 이상 예수님께서 “그만 하산하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우리가 기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만해져야 한다”는 말씀은 제자는 예수님과 똑같은 체험을 겪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승이신 예수님의 생활을 최대한으로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고, 제자들이 스승을 닮을 수록 그만큼 훌륭한 제자가 될 것이며 주인과 닮을수록  그만큼 훌륭한 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절대적인 고수이시니…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했는지, 내가 닮으려고 시도한 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얼마만큼 닮았는지 바라봅시다.




그런데 혹시 나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그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 했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집주인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때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저 사람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마귀와 한 패라는 비난을 예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나의 교만과 무지 때문에 나 또한 예수님을 그렇게 모독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나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면서도 길 잃은 것조차 모르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을 알지 못했기에 백성의 지도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자신들을 알지 못했기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누구를 두려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종종 무서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책을 딱 한 권 읽은 사람!” 이 사람 정말 무섭다고 합니다. “나 책에서 봤어!” 라고 우기기 시작하면 아무도 꺽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책을 딱 한권 읽고서 가르치는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도 자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무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가려진 것치고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치고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내가 어두운 데서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밝은 데서 말하시오. 여러분은 귓속으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시오.”




예전에 군대 생활을 할 때,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선임하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말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사람들은 피해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피곤하니까 그를 피해간 것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마귀와 한 패라고 비난하는 그런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대담하고 용기있게 나아갈 것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예”라 할지라도 홀로 “아니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귀와 한 패라고 비난을 받으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이. 당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만백성의 희망으로 드러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박해와 모욕 속에서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 처럼.




누구를 두려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


29 


사실 인간의 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힘이 세어서 화를 내고 심지어 그를 죽인다 하더라도 내가 의의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세적인 목숨을 잃는 것은 지옥에 떨어져 파멸을 당하는,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명을 다 지배하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심판을 하실 때 내 영관과 육신을 모두 지옥에 던지실 수도 있고 행복에로 부르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두려워 해야 할 분은 바로 이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하느님께서 무서운 분이시니 조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해 주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스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도 여러분의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참새는 매우 흔하기에 값이 쌉니다(포장마차에서도 좀 싸면 좋을텐데요). 그런데 참새가 보금자리에서 떨어지거나 소년이 새총으로 쏘아 떨어뜨리는 일도 있는데, 이러한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잘 것 없는 참새로 그렇게 아끼시거늘, 우리에게야 하느님께서 얼마나 가까이 계시며, 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얼마나 신경을 쓰고 계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어 두셨다는 것은 바로 그만큼 우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시다는 뜻이며, 너무도 자상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세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걸하면 저 사람이 싫어하겠지.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진급에 문제가 있는데….”




누구를 두려워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모른다고 하시면 얼마나 큰 고통이 밀려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먼저 생각하십니까? 삶에서 우선 순위는 어떻게 정해져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옳은 순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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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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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 묵상 ┼
     

    누구를 두려워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모른다고 하시면 얼마나 큰 고통이 밀려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운 생각이,,,,,,,,,하느님을  두렵게만 느끼면서 살아온것 같은마음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왜….마음의 죄를 많이 짓게 되기 때문에 그런생각을..

    그래도……..요즈음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많아져….다행으로……..

    하느님을 증언하며………그 분의 뜻에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하겠죠??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이성서 말씀을 묵상하며………하느님을 증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2. user#0 님의 말:

    ================================
    ┼ ▨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 마태 10,24-33 ┼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늙어지면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합니다.

    도시는 하느님의 흔적은 사라져가고 인간의 흔적만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 작품성이 하느님의 것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시골은 비교적 하느님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조화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성서를 우리에게 남겨주셨는데,

    하나는 대자연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성서’입니다.

     

    도시에는 거짓과 눈가림과 혼돈이 소용돌이쳐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시에는 건축과 파괴가

    연속되면서 하느님의 손길을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도시의 소음은 하느님의 음성을 삼켜버립니다. 도시의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들은 진리를 보는 눈을 혼란시킵니다.

    도시의 온갖 사기와 폭력은 하느님의 정의를 없애고

    있습니다. 시골의 벌레소리는 음악으로 들리는데,

    도시의 벌레소리는 소음으로 들리고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고 비밀은

    소음처럼 뒤섞여 사라져버리는 것 같지만, 결국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26)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권력의 그늘 아래서 저질러진 비리가

    정의의 조명을 받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골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골에서는 감출 수도 비밀스러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드러납니다. 감추어진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애정으로 드러나고, 비밀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탈바꿈하여 드러납니다.

     

    도시와 시골을 넘나들다 보면, 도시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인내하고 계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쓰지만 하느님의 흔적을

    다 지울 수 없듯이, 결국 사람은 하느님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28)고

    말씀하십니다.

     

    맑고 투명하고 순수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김경식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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