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慰靈聖月)

고유의 미풍 살릴 위령 전례의 토착화
“주여, 과연 주를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니, 이 세상에서 깃들이던 집이 흩어진 다음에는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미사 감사송에서)

1.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관습
옛적부터 우리 민족은 조상에 대한 효성을 강조해 왔고 이런 효성을 조상들이 죽은 뒤에도 계속 표현하여 왔다. 무슨 명절을 맞이하거나 경사가 있으면 먼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가족들이 그 명절이나 경사를 즐긴다. 비록 현세를 하직하고 저승에 있다 하더라도 그분들도 한가족임을 생각하고 가정적 경사에 한몫 끼어 드리는 풍습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죽지 않는 혼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선조들에 대한 제사의 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효성에서 나온 매우 아름다운 풍습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도 이와 비슷하다. 구약의 마카베오 후서에 보면 전장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2마카 12,43-46참조). 초세기부터 가톨릭 교회는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등 많은 기도를 바쳐왔다. 로마 시대에 있었던 삼백년간의 박해 당시에 신자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던 지하 공동묘지(이것을 까따꼼바라고 한다)의 비석에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많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죽은 이들이 속히 죄의 사함을 받아, 천국의 영원한 행복에 들게 해 달라는 것들이다. 이때부터 이미 교회 전례에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삽입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신자들은 죽은 부모나 형제는 물론 그밖의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하고 기일이 되거나 성묘를 갈 때면 으례히 그들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바친다. 또한 매일 세계 도처에서 하느님께 바쳐지는 미사 성제 때마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행복과 광명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뿐만 아니라 매 식사 후 기도를 바칠 때마다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천주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하며 기도한다. 그 밖의 여러 기도를 바칠 때에는 항상 죽은 이들의 안식을 축원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도 오래 전부터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관습이 교회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대단한 신심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였고,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2마카 12,45) 그들을 위한 대도(代禱)를 바쳤던 것이다>(교회 50)

2. 한국 풍습과 가톨릭 전통의 차이점
여기서 죽은 이들을 자주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는 우리 한국의 풍습과 가톨릭의 전통을 비교해 보면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풍습은 직접 조상들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잡수라고 축원을 올리지만, 가톨릭은 죽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고 기도드리며 희생을 바친다. 죽은 이들을 위한 가톨릭의 제사는 하느님께 바쳐지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그 제사를 굽어 보시고 죽은 이들의 영혼에게 은총을 내려 주신다. 하느님께 대한 개념이 명백치 못하고 영혼에 대한 개념이 흐렸던 우리 민족은 조상을 위한 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려야 할 공경마저도 선조들에게 바쳐 온 것 같다. 이런 이유에서 혼을 위한 한국의 제사에는 미신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제사를 준비하고서 혼을 영접하러 대문 밖으로 나간다든지, 신위(神位)라 해서 거기에 혼이 와서 앉아 있다고 믿는다든지, 혼이 젯상에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미신적 요소를 제거한다면 부모님을 위한 효도로서의 제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美風)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살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이런 아름다운 풍습을 그리스도교화하여 조상께 드리는 정성을 조상을 위해 하느님께 드린다면 효성의 열매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3.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이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구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생 동안 하느님을 향해 살다가 은총 중에 죽은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조그마한 부족과 결점이 남아 있다. 우리 중에 현재 있는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완전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결점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기에 자연히 이런 결점과 부족을 기워 갚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기워 갚고 정화하는 시기를 ‘연옥’이라고 한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1439년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설정된 것으로 연옥은 일생 동안 하느님께 잘못한 것에 대한 보속을 치루는 기간이라고 표현되었다. 연옥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것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정화중에 있는 영혼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오직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만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행을 하며 희생을 드릴 수 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빨리 석방되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듯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현세를 사는 우리들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초세기부터 오랫동안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희망하고 권하고 있다.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는 연옥은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교회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고 전세계의 모든 사제들이 일제히 모두 죽은 이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해 한달 동안 특히 연옥에서 정화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다.
4. 위령 신심과 우리 생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신심은 가톨릭의 가장 유효한 신심중의 하나이다. 이 신심은 세상을 떠난 신자들의 불우한 처지를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이며,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신심이기도 하다.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은 하느님을 찬미할 영혼들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므로 곧 하느님께 영광이 되며 도움을 받은 그들도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신심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떠나서는 우리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삶에로의 전진임을 믿는 우리들은 항상 죽음을 묵상하며 살아야겠다. 전도서 7장에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치집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세 사람들의 마음이 잔치집에 더 가까운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위령의 달을 맞아 우리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먼저 가신 이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하고 희생을 드려야 하겠다. 더욱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하여 죽음이 곧 영원한 삶의 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묵상하고 성실한 삶 속에서 언제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위령성월(慰靈聖月)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고유의 미풍 살릴 위령 전례의 토착화
    “주여, 과연 주를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니, 이 세상에서 깃들이던 집이 흩어진 다음에는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미사 감사송에서)

    1.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관습
    옛적부터 우리 민족은 조상에 대한 효성을 강조해 왔고 이런 효성을 조상들이 죽은 뒤에도 계속 표현하여 왔다. 무슨 명절을 맞이하거나 경사가 있으면 먼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가족들이 그 명절이나 경사를 즐긴다. 비록 현세를 하직하고 저승에 있다 하더라도 그분들도 한가족임을 생각하고 가정적 경사에 한몫 끼어 드리는 풍습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죽지 않는 혼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선조들에 대한 제사의 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효성에서 나온 매우 아름다운 풍습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도 이와 비슷하다. 구약의 마카베오 후서에 보면 전장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2마카 12,43-46참조). 초세기부터 가톨릭 교회는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등 많은 기도를 바쳐왔다. 로마 시대에 있었던 삼백년간의 박해 당시에 신자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던 지하 공동묘지(이것을 까따꼼바라고 한다)의 비석에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많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죽은 이들이 속히 죄의 사함을 받아, 천국의 영원한 행복에 들게 해 달라는 것들이다. 이때부터 이미 교회 전례에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삽입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신자들은 죽은 부모나 형제는 물론 그밖의 죽은 이들을 자주 기억하고 기일이 되거나 성묘를 갈 때면 으례히 그들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바친다. 또한 매일 세계 도처에서 하느님께 바쳐지는 미사 성제 때마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행복과 광명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뿐만 아니라 매 식사 후 기도를 바칠 때마다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천주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하며 기도한다. 그 밖의 여러 기도를 바칠 때에는 항상 죽은 이들의 안식을 축원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도 오래 전부터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관습이 교회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대단한 신심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였고,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2마카 12,45) 그들을 위한 대도(代禱)를 바쳤던 것이다>(교회 50)

    2. 한국 풍습과 가톨릭 전통의 차이점
    여기서 죽은 이들을 자주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는 우리 한국의 풍습과 가톨릭의 전통을 비교해 보면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풍습은 직접 조상들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잡수라고 축원을 올리지만, 가톨릭은 죽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고 기도드리며 희생을 바친다. 죽은 이들을 위한 가톨릭의 제사는 하느님께 바쳐지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그 제사를 굽어 보시고 죽은 이들의 영혼에게 은총을 내려 주신다. 하느님께 대한 개념이 명백치 못하고 영혼에 대한 개념이 흐렸던 우리 민족은 조상을 위한 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려야 할 공경마저도 선조들에게 바쳐 온 것 같다. 이런 이유에서 혼을 위한 한국의 제사에는 미신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제사를 준비하고서 혼을 영접하러 대문 밖으로 나간다든지, 신위(神位)라 해서 거기에 혼이 와서 앉아 있다고 믿는다든지, 혼이 젯상에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미신적 요소를 제거한다면 부모님을 위한 효도로서의 제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美風)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살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이런 아름다운 풍습을 그리스도교화하여 조상께 드리는 정성을 조상을 위해 하느님께 드린다면 효성의 열매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3.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이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구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생 동안 하느님을 향해 살다가 은총 중에 죽은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조그마한 부족과 결점이 남아 있다. 우리 중에 현재 있는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완전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결점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기에 자연히 이런 결점과 부족을 기워 갚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기워 갚고 정화하는 시기를 ‘연옥’이라고 한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1439년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설정된 것으로 연옥은 일생 동안 하느님께 잘못한 것에 대한 보속을 치루는 기간이라고 표현되었다. 연옥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것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정화중에 있는 영혼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오직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만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행을 하며 희생을 드릴 수 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빨리 석방되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듯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현세를 사는 우리들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초세기부터 오랫동안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희망하고 권하고 있다.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는 연옥은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교회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고 전세계의 모든 사제들이 일제히 모두 죽은 이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해 한달 동안 특히 연옥에서 정화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다.
    4. 위령 신심과 우리 생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신심은 가톨릭의 가장 유효한 신심중의 하나이다. 이 신심은 세상을 떠난 신자들의 불우한 처지를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이며,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신심이기도 하다.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은 하느님을 찬미할 영혼들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므로 곧 하느님께 영광이 되며 도움을 받은 그들도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신심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떠나서는 우리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삶에로의 전진임을 믿는 우리들은 항상 죽음을 묵상하며 살아야겠다. 전도서 7장에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치집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세 사람들의 마음이 잔치집에 더 가까운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위령의 달을 맞아 우리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먼저 가신 이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하고 희생을 드려야 하겠다. 더욱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하여 죽음이 곧 영원한 삶의 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묵상하고 성실한 삶 속에서 언제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