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과 마주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예수 스승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시대에 보면 나병환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 되었지만 성벽이 있는 고을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사람들 가까이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의 구성을 보면 재미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다인들 속에 사마리아 사람이 끼어있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는데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나병이라는 비참함이 그들 사이에 공동적인 유대를 형성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민족적 적대감 까지 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공동적인 신분이 있기에 형제요 자매라고 부를 수 있고, 더욱 친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다른 이들 보다도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조건 때문에, 자신의 이익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의 특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갈라져 서로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 스승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스승님이라는 칭호는 성서에서 사도들이 그분의 능력에 압도당하였을 때, 그분의 영광에 깜짝 놀랐을 때, 또는 곤경 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린 칭호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이 칭호를 드리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어떠한 조건도 걸지 않으십니다. “가서 제관들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 나병환자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헤서는 사제들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사제들이 “이 사람 병이 다 나았습니다”라고 선언해야만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 것은 결국 “너는 다 나았으니 공동체로 돌아가거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환자 열 사람은 아무 조건도 없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10명이 구원되었는데 이방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들 드리고 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의 선물에 오직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감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이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대변인으로부터 자신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를 감사할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는 남편과 아이들.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이 당연한 것이겠습니까? 남편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여 봉급을 타오면 그것을 아무런 고마움 없이 써 버리는 아내와 아이들. 남편의 눈에도 아내와 아이들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여겨질까요? 몇 년전에 수능을 하루 앞둔 날 복음말씀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보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고 그날 성당에 와서 감사미사를 바친 학생은 단 한명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한번쯤은 감사하다고 여겨 보십시오. 두 눈이 있음을,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음을, 가족이 있음을, 부모가 있음을, 직장에 다니고 있음을, 그리고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과 마주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예수 스승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시대에 보면 나병환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 되었지만 성벽이 있는 고을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사람들 가까이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의 구성을 보면 재미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다인들 속에 사마리아 사람이 끼어있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는데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나병이라는 비참함이 그들 사이에 공동적인 유대를 형성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민족적 적대감 까지 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공동적인 신분이 있기에 형제요 자매라고 부를 수 있고, 더욱 친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다른 이들 보다도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조건 때문에, 자신의 이익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의 특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갈라져 서로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이라는 칭호는 성서에서 사도들이 그분의 능력에 압도당하였을 때, 그분의 영광에 깜짝 놀랐을 때, 또는 곤경 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린 칭호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이 칭호를 드리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어떠한 조건도 걸지 않으십니다.
“가서 제관들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
나병환자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헤서는 사제들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사제들이 “이 사람 병이 다 나았습니다”라고 선언해야만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 것은 결국 “너는 다 나았으니 공동체로 돌아가거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환자 열 사람은 아무 조건도 없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10명이 구원되었는데 이방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들 드리고 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의 선물에 오직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감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이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대변인으로부터 자신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를 감사할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는 남편과 아이들.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이 당연한 것이겠습니까?
남편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여 봉급을 타오면 그것을 아무런 고마움 없이 써 버리는 아내와 아이들. 남편의 눈에도 아내와 아이들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여겨질까요?
몇 년전에 수능을 하루 앞둔 날 복음말씀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보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고 그날 성당에 와서 감사미사를 바친 학생은 단 한명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한번쯤은 감사하다고 여겨 보십시오. 두 눈이 있음을,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음을, 가족이 있음을, 부모가 있음을, 직장에 다니고 있음을, 그리고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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