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진복팔단이라고 일컫는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장엄한 복음선포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친 복음의 핵심을 이루기도 하는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삶의 모델을 인간에게 제시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을 신성하고도 원리적으로 재해석하심으로써 글자안에 죽어있던 율법이 생생하게 그 의미를 드러내고 율법에 짓눌려 지내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진복팔단은 매태오 복음 5장 3절부터 10절의 참된 행복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성서의 진복팔단의 의미에 따라 두 가지씩 묶어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1. 공동체의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 5)
진복팔단에서 선언된 참된 행복들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으로써 예수님의 자기증언입니다. 참된 가난은 궁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마음의 가난’과 ‘온유함’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둘 다 ‘야훼의 가난한 사람’(anawim)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음의 가난함’은 하느님의 마음 외에 자기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며, ‘온유함’은 그 결과를 뜻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회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사람이며, 삶에 따르는갖가지 변화와 모순들에 부딪히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온유한’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온유할 수 있음은 그가 먼저 하느님께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이들이 하느님을 거역할 때, 온유한 사람은 그가 하느님께 온유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온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와 헤로데, 그리고 완고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논쟁적인 처신은 그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한 사람의 처지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짐으로써 누리는 자유와 그 이전의 비공동체적인 처지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함은 우선 예수님의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하여진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에 제자들의 초기공동체의 모습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4, 32-35)

2. 하느님 나라를 위해 겪는 고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 5, 6)
슬퍼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출현을 너무나 깊이 열망하고 있는 까닭에 그 나라의 출현이 지연됨으로써 상심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옳은 일 또는 정의는 하느님 나라의 특징이요, 특별한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을 위한 정의는 제자로써 갖추어야할 요건입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정의가 사라진 현실을 슬퍼하였고(루가 19, 41-44), 이 현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떼에 비유하여 측은히 여기셨습니다.(마르 6, 34; 마태 14, 14)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 마음에 깃든 불의에 대한 슬픔과 정의에 불타는 열망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현실이자 제자 공동체에 따르는 현실이었습니다. 신약의 제자 공동체는 형제애를 실천함으로써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참된 행복을 추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란 사회정의를 넘어서서 형제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세워짐으로써 이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그 세력을 떨치고 사회 정의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공동체의 힘이, 사회적 죄악 때문에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이 가난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후퇴하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촉구하는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인간화된 사회,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에 대해 보다 충실한 사회, 보다 거룩한 사회로 현실을 변혁시키는 노력이 제자 공동체의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불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물론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까지도 정의롭게 변화됨으로써 정의의 참된 행복을 누리려는 초대입니다. 불의를 슬퍼하되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불의를 벗어나서 정의를 행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제자공동체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크리스챤의 사회 참여는 복음의 요청이며, 시대 상황이 제기하는 도전에 따라 역사상 다양한 형태로 응답되어 왔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자리는 불의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현실안에 삶의 자리를 잡고 자신의 삶과 일 그 자체로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부터 복음적인 것이 제자 공동체의 복음화이며, 이를 통해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 복음화도 이룩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회정의구현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약의 제자 공동체는 복음화된 형제애를 구현하고자 했고,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경계선들을 뛰어 넘으려 끊임없이 애를 썼습니다. 이리하여 점점 더 많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이 공동체의 형제관계 속으로 이끌어 들여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관계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세상의 빛처럼 드러내는 제자공동ㅊ로 변화되고 첨점 더 확장되는 길 밖에는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선한 방향으로 개혁할 길이 달리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로서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3. 자비의 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7)
자비의 참된 행복은 공동체의 형제애와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비는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에 속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자비는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고, 결속이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투신을 말합니다. 자비는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임으로써 공동체를 가능케하고 공동체안에 그리스도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1) 자비는 자기의 투신이다.
우리는 자비의 규범과 일상적인 예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 25-37)와 최후의 심판(마태 25, 31-46)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에수님의 체험을 담과 있다고 보여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 비유에서 자비는 사랑이 필요한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이웃으로 즉 형제로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투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자기를 투신하여 가난한 이들과 괴로워 하는 이들을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떠나 가난한 우리 이웃과 실질적인 결속, 연대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에서는 이런 실질적인 결속, 연대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 그리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발생하고 이 공동체를 통하여 “천지창조 때부터 마련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형제애의 표현인 자비는 물질적인 것이거나 정신적이거나 온갖 형태의 가난, 온갖 형태의 불행에로 향해야 합니다.
2) 자비는 용서하는 것이다.
자비의 두 번째 국면은 우리에게 잘못한 죄인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잃었던 양의 비유(루가 15, 4-7)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루가 15, 11-32)는 죄인들에 대한 자비의 이야기 입니다. 사ㅚ적인 차원에서 보면 죄란 형제적인 결속과연대를 파괴하는 일종의 폭력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우리와의 공동체 관계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이런 죄인이 “잃었던 양”과 “돌아온 아들”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단죄가 아니라, 오히려 용서가 베풀어집니다. 그리하여 공동체가 회복되고, 형제적인 관계는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공동체의 원천은 하느님께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떠난 “탕자”요,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길 잃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돌아온 우리를 기쁘게 맞아 주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죄인을 찾아다니고 받아들여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렇듯 영적인 차원에서 받는 용서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차원에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요청이 따르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 23-35)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는 용서가 공동체으 ㅣ형제에 대한 사랑의 본질임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자비가 갖는 상호관계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결국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있을 것이다.”(마태 18, 18)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마태 7, 1-2) 오히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마태 6, 12)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최후의 심판 기사가 말하는 자비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드로가 결속시키며, 자비는 공동체적 결속을 위한 투신입니다. 투신을 뜻하는 자비는 공동체를 창출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 그리고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말하는 자비는 괴로워하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형제로서 받아들이게 합니다. 요서를 뜻하는 자비는 공동체를 재건합니다. 투신과 용서로 나타나는 자비는 이같은 두 단면을 결코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비는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끈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완성된 공동체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국적이나 혈연, 지연 또는 어떤 기존의 논리적근거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공동체의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형제라는 인연은어려움 속에서도 자비를 베푸는 가운데 부단히 창조되고 보전되어야 합니다. 단 하나 공동체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기심이요, 실질적인 결속 과용서의 거부입니다. 자비으 참관 행복은 우리에게 자비를 촉구하면서 서로의 형제가 되어야 할 의무 즉 공동체를 창출하고 보전해야할 의무를 아울러 부여합니다.

4. 하느님을 마주 뵙는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 8)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진복팔단의 약속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직접 뵙는 행복, 즉 관상(觀想)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관상이라는 참된 행복은 예언서들과 시편, 특히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시편 24, 4a)에게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친해지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는 시편 24편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깨끗함을 행실의 깨끗함과 분리시켜 이해하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 마음과 조화되는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자신의 마음에서 온갖 거짓드로가 더불어 그 안에 숨어 있는 사악한 성향들 일체를 뿌리 뽑으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왜곡시키고 변형시키는 우상숭배로부터 자신을 정화하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시편 24, 46)입니다. 이 참된 행복은 나머지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자세와 요건들 일체를 종합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를 우리 마음에서 철저하게 몰아내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5편과 24편 참조)
복음에서 말하는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행실’은 하나이며 ‘깨끗함’의 뗄수 없는 두 단면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내적 자세이며, 깨끗한 행실은 내적 자세에 부합되는 외적인 자세입니다. 마음에서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사람이라면 일상생활 속에서 우상을 추구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끊임없이 마음을 쏟았던 관심사였습니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곳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0-23)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차 있다.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 질 것이다.”(마태 7, 16; 18; 23, 25-26)
그런데 이 ‘깨끗함’에 대한 참된 행복에서 놀라운 약속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나 행실로 우상을 떨쳐 버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뵙능 관상이 약속되고 있는데 이것이 지극히 유별난 약속입니다. 성서적 전승은 아무도 하느님을 볼수 없으며(요한 1서 4, 12) 하느님을 보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출애 33, 20) 모세도 하느님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고, 엘리야는 하느님을 보았으나 회호리 바람에 휘말려 하늘로 끌려가 버렸습니다.(열왕하 2, 11)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제자 공동체에게 하느님 관상을 약속합니다. 관상에 탁월한 요한 복음에서도 이 약속은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7. 9)
진복팔단이 말하는 하느님 관상이란 신앙을 통한 하느님 체험이며, 공동체 체험입니다. 하는미을 관상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행실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우상을 창조해 나가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자신의 우상을 쳐부수는 정도에 따라 하느님을 보다 선명히 관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관상은 신양을 통한 하느님 체험이요, 사랑의 체험이며, 결국 공동체의 체험입니다. 하느님을 관상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전 13, 12)

5. 참된 평화의 마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것이다.”(마태 5, 9)
평화의 참된 행복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다른 이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이룩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둡니다. 이 참된 행복은 실제 생활의 구체적인 환경속에서 평화의 건설을 위해 공헌 하고 일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두루 행사하는 데 실질적이며, 적극적으로 토신하는 사람들을 대화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화해를 촉진시키고 서로 분열되거나 갈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과 가정들, 사회집단들 사이의 형제적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죄와 증오와 불의 때문에 흩어지고 분열과 사람들에게 평화를 회복시켜주고,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간의 항구한 화해를 회복시켜주느 사명을 띠신 행복이신 예수의 자세와 부합되는 까닭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이사 9, 5)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참된 평화를 실천하는 그분의 나라의 위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과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과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리라.”(이사야 9, 6; 2, 4; 11, 6)
평화의 도래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화해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사람들이 하느님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증진 시키는데 필요한 복음적 조건입니다. 복음화 한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표하는”(루가 4, 19; 이사야 61, 2)것이요, 복음 선포자는 평화를 선포하는 사자인 것입니다.(로마 10, 15) 평화는 당신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 27)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19)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 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페 2, 14-16)

6. 박해와 순교 – 최후의 참된 행복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 10-12)
이제까지 열거된 일곱가지 참된 행복에 비해 여덟 번째 참된 행복은 반드시 습득해야 할 일상적인 자세를 선포하고 있지 않다느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만일의 경우를 이야기 하십니다. 박해는 갑자기 찾아듭니다. 예수께서는 순간적이든 길게 이어지든, 늦든 빠르든 간에 한 번 박해가 찾아오면 그것을 참된 행복으로 받아들이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에다 아주 특별한 보상을 첨가시키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참된 행복에 담겨있는 특별한 의미와 특유한 은총이 강조하기 위해 간결하게 표현 된 다른 참된 행복들의 경우와는 색다른 언어를 구사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 12)
이 마지막 참된 행복은 특별한 종말의 빠스카로서 그 의미가 주어집니다. 이는 십자가에 이어지는 부활을 한결 명백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참된 행복은 십자가의 참된 행복으로 이를 가져오는 박해는 여기서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박해는 비단 육체적인 박해나 경제적인 불이익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라는 시실 때문에 당하는 적개심, 압박, 괴롭힘, 불신과 오해등 온갖 형태의 정신적 폭행을 포함합니다. 박해가 죽음과 연결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고 부릅니다. 순교는 참된 행복 가운데 등급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박해받고, 재판받고 사형을 당하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순교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박해의 표본은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살랑이 확고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철저하게 헌신한 삶에 최후로 가해진 ‘종지부’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사랑을 다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분의 특정한 순간에 바친 사랑과 충실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이전에 받았던 모든 박해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보인 충절도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박해들이 십자가라는 대단원에 이르는 길을 포장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공동체가 지니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악과 이기심과 불의가 역사안에서 최후의 발언권을 갖지 못하게 되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최후의 발언권을 행사하느 것은 정의, 평화 그리고 공동체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진복팔단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진복팔단이라고 일컫는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장엄한 복음선포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친 복음의 핵심을 이루기도 하는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삶의 모델을 인간에게 제시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을 신성하고도 원리적으로 재해석하심으로써 글자안에 죽어있던 율법이 생생하게 그 의미를 드러내고 율법에 짓눌려 지내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진복팔단은 매태오 복음 5장 3절부터 10절의 참된 행복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성서의 진복팔단의 의미에 따라 두 가지씩 묶어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1. 공동체의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 5)
    진복팔단에서 선언된 참된 행복들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으로써 예수님의 자기증언입니다. 참된 가난은 궁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마음의 가난’과 ‘온유함’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둘 다 ‘야훼의 가난한 사람’(anawim)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음의 가난함’은 하느님의 마음 외에 자기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며, ‘온유함’은 그 결과를 뜻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회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사람이며, 삶에 따르는갖가지 변화와 모순들에 부딪히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온유한’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온유할 수 있음은 그가 먼저 하느님께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이들이 하느님을 거역할 때, 온유한 사람은 그가 하느님께 온유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온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와 헤로데, 그리고 완고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논쟁적인 처신은 그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한 사람의 처지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짐으로써 누리는 자유와 그 이전의 비공동체적인 처지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함은 우선 예수님의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하여진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에 제자들의 초기공동체의 모습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4, 32-35)

    2. 하느님 나라를 위해 겪는 고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 5, 6)
    슬퍼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출현을 너무나 깊이 열망하고 있는 까닭에 그 나라의 출현이 지연됨으로써 상심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옳은 일 또는 정의는 하느님 나라의 특징이요, 특별한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을 위한 정의는 제자로써 갖추어야할 요건입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정의가 사라진 현실을 슬퍼하였고(루가 19, 41-44), 이 현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떼에 비유하여 측은히 여기셨습니다.(마르 6, 34; 마태 14, 14)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 마음에 깃든 불의에 대한 슬픔과 정의에 불타는 열망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현실이자 제자 공동체에 따르는 현실이었습니다. 신약의 제자 공동체는 형제애를 실천함으로써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참된 행복을 추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란 사회정의를 넘어서서 형제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세워짐으로써 이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그 세력을 떨치고 사회 정의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공동체의 힘이, 사회적 죄악 때문에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이 가난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후퇴하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촉구하는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인간화된 사회,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에 대해 보다 충실한 사회, 보다 거룩한 사회로 현실을 변혁시키는 노력이 제자 공동체의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불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물론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까지도 정의롭게 변화됨으로써 정의의 참된 행복을 누리려는 초대입니다. 불의를 슬퍼하되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불의를 벗어나서 정의를 행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제자공동체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크리스챤의 사회 참여는 복음의 요청이며, 시대 상황이 제기하는 도전에 따라 역사상 다양한 형태로 응답되어 왔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자리는 불의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현실안에 삶의 자리를 잡고 자신의 삶과 일 그 자체로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부터 복음적인 것이 제자 공동체의 복음화이며, 이를 통해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 복음화도 이룩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회정의구현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약의 제자 공동체는 복음화된 형제애를 구현하고자 했고,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경계선들을 뛰어 넘으려 끊임없이 애를 썼습니다. 이리하여 점점 더 많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이 공동체의 형제관계 속으로 이끌어 들여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관계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세상의 빛처럼 드러내는 제자공동ㅊ로 변화되고 첨점 더 확장되는 길 밖에는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선한 방향으로 개혁할 길이 달리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로서 ‘불의를 슬퍼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3. 자비의 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7)
    자비의 참된 행복은 공동체의 형제애와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비는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에 속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자비는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고, 결속이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투신을 말합니다. 자비는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임으로써 공동체를 가능케하고 공동체안에 그리스도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1) 자비는 자기의 투신이다.
    우리는 자비의 규범과 일상적인 예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 25-37)와 최후의 심판(마태 25, 31-46)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에수님의 체험을 담과 있다고 보여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 비유에서 자비는 사랑이 필요한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이웃으로 즉 형제로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투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자기를 투신하여 가난한 이들과 괴로워 하는 이들을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떠나 가난한 우리 이웃과 실질적인 결속, 연대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에서는 이런 실질적인 결속, 연대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 그리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발생하고 이 공동체를 통하여 “천지창조 때부터 마련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형제애의 표현인 자비는 물질적인 것이거나 정신적이거나 온갖 형태의 가난, 온갖 형태의 불행에로 향해야 합니다.
    2) 자비는 용서하는 것이다.
    자비의 두 번째 국면은 우리에게 잘못한 죄인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잃었던 양의 비유(루가 15, 4-7)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루가 15, 11-32)는 죄인들에 대한 자비의 이야기 입니다. 사ㅚ적인 차원에서 보면 죄란 형제적인 결속과연대를 파괴하는 일종의 폭력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우리와의 공동체 관계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이런 죄인이 “잃었던 양”과 “돌아온 아들”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단죄가 아니라, 오히려 용서가 베풀어집니다. 그리하여 공동체가 회복되고, 형제적인 관계는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공동체의 원천은 하느님께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떠난 “탕자”요,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길 잃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돌아온 우리를 기쁘게 맞아 주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죄인을 찾아다니고 받아들여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렇듯 영적인 차원에서 받는 용서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차원에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요청이 따르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 23-35)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는 용서가 공동체으 ㅣ형제에 대한 사랑의 본질임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자비가 갖는 상호관계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결국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있을 것이다.”(마태 18, 18)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마태 7, 1-2) 오히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마태 6, 12)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최후의 심판 기사가 말하는 자비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드로가 결속시키며, 자비는 공동체적 결속을 위한 투신입니다. 투신을 뜻하는 자비는 공동체를 창출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 그리고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말하는 자비는 괴로워하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형제로서 받아들이게 합니다. 요서를 뜻하는 자비는 공동체를 재건합니다. 투신과 용서로 나타나는 자비는 이같은 두 단면을 결코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비는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끈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완성된 공동체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국적이나 혈연, 지연 또는 어떤 기존의 논리적근거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공동체의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형제라는 인연은어려움 속에서도 자비를 베푸는 가운데 부단히 창조되고 보전되어야 합니다. 단 하나 공동체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기심이요, 실질적인 결속 과용서의 거부입니다. 자비으 참관 행복은 우리에게 자비를 촉구하면서 서로의 형제가 되어야 할 의무 즉 공동체를 창출하고 보전해야할 의무를 아울러 부여합니다.

    4. 하느님을 마주 뵙는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 8)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진복팔단의 약속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직접 뵙는 행복, 즉 관상(觀想)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관상이라는 참된 행복은 예언서들과 시편, 특히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시편 24, 4a)에게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친해지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는 시편 24편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깨끗함을 행실의 깨끗함과 분리시켜 이해하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 마음과 조화되는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자신의 마음에서 온갖 거짓드로가 더불어 그 안에 숨어 있는 사악한 성향들 일체를 뿌리 뽑으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왜곡시키고 변형시키는 우상숭배로부터 자신을 정화하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시편 24, 46)입니다. 이 참된 행복은 나머지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자세와 요건들 일체를 종합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를 우리 마음에서 철저하게 몰아내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5편과 24편 참조)
    복음에서 말하는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행실’은 하나이며 ‘깨끗함’의 뗄수 없는 두 단면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내적 자세이며, 깨끗한 행실은 내적 자세에 부합되는 외적인 자세입니다. 마음에서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사람이라면 일상생활 속에서 우상을 추구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끊임없이 마음을 쏟았던 관심사였습니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곳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0-23)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차 있다.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 질 것이다.”(마태 7, 16; 18; 23, 25-26)
    그런데 이 ‘깨끗함’에 대한 참된 행복에서 놀라운 약속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나 행실로 우상을 떨쳐 버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뵙능 관상이 약속되고 있는데 이것이 지극히 유별난 약속입니다. 성서적 전승은 아무도 하느님을 볼수 없으며(요한 1서 4, 12) 하느님을 보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출애 33, 20) 모세도 하느님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고, 엘리야는 하느님을 보았으나 회호리 바람에 휘말려 하늘로 끌려가 버렸습니다.(열왕하 2, 11)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제자 공동체에게 하느님 관상을 약속합니다. 관상에 탁월한 요한 복음에서도 이 약속은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7. 9)
    진복팔단이 말하는 하느님 관상이란 신앙을 통한 하느님 체험이며, 공동체 체험입니다. 하는미을 관상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행실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우상을 창조해 나가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자신의 우상을 쳐부수는 정도에 따라 하느님을 보다 선명히 관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관상은 신양을 통한 하느님 체험이요, 사랑의 체험이며, 결국 공동체의 체험입니다. 하느님을 관상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전 13, 12)

    5. 참된 평화의 마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것이다.”(마태 5, 9)
    평화의 참된 행복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다른 이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이룩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둡니다. 이 참된 행복은 실제 생활의 구체적인 환경속에서 평화의 건설을 위해 공헌 하고 일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두루 행사하는 데 실질적이며, 적극적으로 토신하는 사람들을 대화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화해를 촉진시키고 서로 분열되거나 갈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과 가정들, 사회집단들 사이의 형제적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죄와 증오와 불의 때문에 흩어지고 분열과 사람들에게 평화를 회복시켜주고,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간의 항구한 화해를 회복시켜주느 사명을 띠신 행복이신 예수의 자세와 부합되는 까닭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이사 9, 5)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참된 평화를 실천하는 그분의 나라의 위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과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과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리라.”(이사야 9, 6; 2, 4; 11, 6)
    평화의 도래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화해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사람들이 하느님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증진 시키는데 필요한 복음적 조건입니다. 복음화 한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표하는”(루가 4, 19; 이사야 61, 2)것이요, 복음 선포자는 평화를 선포하는 사자인 것입니다.(로마 10, 15) 평화는 당신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 27)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19)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 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페 2, 14-16)

    6. 박해와 순교 – 최후의 참된 행복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 10-12)
    이제까지 열거된 일곱가지 참된 행복에 비해 여덟 번째 참된 행복은 반드시 습득해야 할 일상적인 자세를 선포하고 있지 않다느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만일의 경우를 이야기 하십니다. 박해는 갑자기 찾아듭니다. 예수께서는 순간적이든 길게 이어지든, 늦든 빠르든 간에 한 번 박해가 찾아오면 그것을 참된 행복으로 받아들이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에다 아주 특별한 보상을 첨가시키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참된 행복에 담겨있는 특별한 의미와 특유한 은총이 강조하기 위해 간결하게 표현 된 다른 참된 행복들의 경우와는 색다른 언어를 구사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 12)
    이 마지막 참된 행복은 특별한 종말의 빠스카로서 그 의미가 주어집니다. 이는 십자가에 이어지는 부활을 한결 명백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참된 행복은 십자가의 참된 행복으로 이를 가져오는 박해는 여기서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박해는 비단 육체적인 박해나 경제적인 불이익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라는 시실 때문에 당하는 적개심, 압박, 괴롭힘, 불신과 오해등 온갖 형태의 정신적 폭행을 포함합니다. 박해가 죽음과 연결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고 부릅니다. 순교는 참된 행복 가운데 등급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박해받고, 재판받고 사형을 당하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이 순교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박해의 표본은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살랑이 확고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철저하게 헌신한 삶에 최후로 가해진 ‘종지부’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사랑을 다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분의 특정한 순간에 바친 사랑과 충실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이전에 받았던 모든 박해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보인 충절도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박해들이 십자가라는 대단원에 이르는 길을 포장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공동체가 지니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악과 이기심과 불의가 역사안에서 최후의 발언권을 갖지 못하게 되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최후의 발언권을 행사하느 것은 정의, 평화 그리고 공동체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