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 – 역사의 한 인물1)
(1) 예수는 로마 제국의 한 변방 팔레스티나의 갈릴레아 북부 나자렛에서 BC 4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주목받지 못한 한 인물이다.
(2) 예수는 서른살 무렵(티베리오 황제 15년: AD 28/29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가파르나움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작은 영역(직선 거리로는 고작 130Km)에서 1년 혹은 3년간 공적인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3) 사망년도는 빌라도 총독(AD 26-36년) 때의 30년경으로 추정된다.
2. <그리스도교>의 의미
국어사전에서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를 찾으면 <예수교>와 같은 뜻이 나온다(=예수교).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하나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2)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의 의미
-“예수(JESUS)”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3) 그러나 신경에서 언급되는 이름은 역사의 한 인물, 나자렛 사람,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의 의미 자체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CHRISTOS)”란 히브리어 “마시아(MASIAH)”와 아라메아어 “메시아(MESIAH)”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왕, 사제, 예언자와 관련하여 유다민족의 현실적 지평에서, 또는 종말적인 “하느님의 통치”의 실현(구원)에 대한 대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도시대에 이르러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이 모든 내용을 포괄하면서도 능가하는 새로운 풍부함을 지니게 된다(이는 그리스도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외아들” 칭호마저도 포괄하는 것이다).4)
– “주(主: KYRIOS)”는 구약에서 <야훼의 이름>을 대신하였던 “아도나이(ADONAI)”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서 하느님의 최상주권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이것이 신약에 이르러 예수에게 적용되어 예수를 전인류와 전역사 그리고 하늘과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는 우주적,무시간적 최상주권의 소유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다.5)
< 종합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란, 1)역사의 예수가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일치로 이루어져 있고, 2)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차원의 인간 조건 및 관계(신,타인,사회와의)에 있어서 결정적 척도로 삼는다는 고백이다.6) 그러면 역사의 예수가 도대체 어떠했길래···
▶ 예수 – “알 수 없는 분”(예수는 자유의 몸이시다7))
예수는 동시대인들의 가치체계 및 인식, 희망의 틀에로 접근해 갔다. 희망과 설레임!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예수는 “알 수 없는 분”(자유의 몸)으로 여겨졌다. 예수는 동시대인들의 지평 안에서 동시에 그 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8) 인식불가의 모순?!
* 예수의 모순된 태도와 가르침9)
-예언자로서 처신 그러나 세례자 요한을 가리킨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그러나 동시에 부자의 초대에 응하신다.
-불량배들(세리,죄인,창녀,병자들)의 친구 그러나 바리사이의 친구이시기도 하다.
-비정치적 태도(빌라도와의 문답) 그러나 정치적 태도(성전의 정화)
-메시아적 권위 주장 그러나 함구령이 있다.
-율법의 상대화 그러나 율법을 내면의 윤리에로까지 철저화 시키신다.
-메시아적 기적 그러나 십자가의 무능력
-유다이즘의 테두리에서 그러나 이방인의 영역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 그러나 심판이 아닌 사랑을···
-임박한 종말 그러나 ‘지금, 이미’의 하느님 나라
-먹보요 술꾼 그러나 기도하신 분
▶ 예수 – “알 수 있는 분”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예수는 “알 수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역사적 예수 생애 연구의 한계점이기도 했다. 신앙을 배제했던(또는 가능한 배제하려고 했던) 이성의 연구는 결국 좌초되었다. 예수 생애 연구는 예수를 제 각각의 모습으로 그려냈을 뿐이다.10)
예수의 동시대인들 역시 제 각각의 메시아관, 종말관으로 예수를 담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도망쳐 십자가에로 달아나버렸다. 제자들 역시 그러했고, 결국 부활하신 분을 체험하고서야 역사의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선포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에 이끌려 눈을 뜨고(개방성) 역사의 예수를 온전한 그리스도로 전해주고 있다(4개의 복음서)11).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현 단계의 논의가 아니다. 주어진 지상 예수의 모습에 주목해 보자.
1. 부분이 아닌 전체를!
-예수의 모습 가운데 어느것 하나를 과장한다면 예수는 그 과장된 틀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예수의 메시아 자의식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전해진 유산들이 이미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이를 반대할 큰 요인을 찾지 못하겠기에).
-예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두 개의 큰 줄기를 가닥잡을 수 있다: 감춤과 드러냄!
2.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12)
1) 감춤 – 인간의 길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성을 감춘다.
-복음은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준다(역사의 한 인물).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공적 무대에 나서기 전 30년간을 부모에게 순종한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유혹의 길에 나선다(유혹받는 인간상).
-정치적 메시아의 요구를 거절하신다. 그리고 함구령.
-아버지의 뜻을 찾는다: 광야와 산에서 기도함
-십자가의 순종(내어맡김)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걷는 인간의 길은 우상숭배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좇아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는 예수의 길에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인간의 길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실현된다(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
2) 드러냄 – 메시아의 길 그러나 새로움
-율법과 유다이즘의 상대화: 새로운 권위로 새로운 전망을···
-기적(특히 병자치유)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
-무조건적인 수용과 죄의 용서(모든 이의 구원): 사랑의 혁명!(하느님 나라의 구원론적 성격)
-유대 종말론적 지평의 수정: “아직 아니” 그러나 “이미”(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 그러나 인간의 길과 메시아의 길의 영역을 엄밀하게 분리할 수 없다. 두 개의 영역이 서로 넘나들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영역의 자유로운 왕래에서 칼체돈 공의회의 신앙 정식, “두개의 본성 안에서 하나의 위격”을 생동감 있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맥락에서(부분 아닌 전체를) 그리스도론은 십자가와 부활 모두를 고찰할 때에만 올바로 접합될 수 있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결국 역사적인 예수 생애 연구가 좌초된다면 신앙에로의 개방성이 요구될 것이다(그렇다고 본 발제의 논리적 부족함을 변명하지는 않겠다).
▶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W. Kasper는 예수가 지상에서 수행한 그 본연의 일(Sache Jesu)을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되었던 1)신론적 성격, 2)구원론적 성격, 3) 종말론적 성격을 갖는다.13)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이러한 성격들이 나자렛 예수의 인격과 삶 안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기에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동시에 4)그리스도론적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왜 그 제자들은 예수를 선포하게 되었는지가 드러난다.
▶ 이 고백의 실천적 의미
(1) 하느님 앞에서의 참된 인간의 길
-모든 현세적 권력(우상숭배)의 상대화
-신앙에로의 개방 : 자기숭배에서의 회두
(2) 신중심주의의 여타의 혼합주의에 대한 경계14)
(3) 전례적 “기억”과 예수추종(Nach-folge)의 “삶”(실천)
-부활체험이 역사의 예수를 재해석, 신앙고백했듯이 오늘의 우리 역시 전례적 “기억”을 통해서···
-그러나 “주님,주님!” 부르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믿음과 사랑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사랑의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15) 그러나 인간에게(나에게) 과연 그렇게 큰 사랑이 있는가?(있다면 무엇이고, 없다면 어떻게?)

1. 예수 – 역사의 한 인물1)
(1) 예수는 로마 제국의 한 변방 팔레스티나의 갈릴레아 북부 나자렛에서 BC 4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주목받지 못한 한 인물이다.
(2) 예수는 서른살 무렵(티베리오 황제 15년: AD 28/29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가파르나움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작은 영역(직선 거리로는 고작 130Km)에서 1년 혹은 3년간 공적인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3) 사망년도는 빌라도 총독(AD 26-36년) 때의 30년경으로 추정된다.
2. <그리스도교>의 의미
국어사전에서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를 찾으면 <예수교>와 같은 뜻이 나온다(=예수교).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하나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2)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의 의미
-“예수(JESUS)”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3) 그러나 신경에서 언급되는 이름은 역사의 한 인물, 나자렛 사람,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의 의미 자체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CHRISTOS)”란 히브리어 “마시아(MASIAH)”와 아라메아어 “메시아(MESIAH)”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왕, 사제, 예언자와 관련하여 유다민족의 현실적 지평에서, 또는 종말적인 “하느님의 통치”의 실현(구원)에 대한 대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도시대에 이르러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이 모든 내용을 포괄하면서도 능가하는 새로운 풍부함을 지니게 된다(이는 그리스도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외아들” 칭호마저도 포괄하는 것이다).4)
– “주(主: KYRIOS)”는 구약에서 <야훼의 이름>을 대신하였던 “아도나이(ADONAI)”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서 하느님의 최상주권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이것이 신약에 이르러 예수에게 적용되어 예수를 전인류와 전역사 그리고 하늘과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는 우주적,무시간적 최상주권의 소유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다.5)
< 종합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란, 1)역사의 예수가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일치로 이루어져 있고, 2)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차원의 인간 조건 및 관계(신,타인,사회와의)에 있어서 결정적 척도로 삼는다는 고백이다.6) 그러면 역사의 예수가 도대체 어떠했길래···
▶ 예수 – “알 수 없는 분”(예수는 자유의 몸이시다7))
예수는 동시대인들의 가치체계 및 인식, 희망의 틀에로 접근해 갔다. 희망과 설레임!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예수는 “알 수 없는 분”(자유의 몸)으로 여겨졌다. 예수는 동시대인들의 지평 안에서 동시에 그 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8) 인식불가의 모순?!
* 예수의 모순된 태도와 가르침9)
-예언자로서 처신 그러나 세례자 요한을 가리킨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그러나 동시에 부자의 초대에 응하신다.
-불량배들(세리,죄인,창녀,병자들)의 친구 그러나 바리사이의 친구이시기도 하다.
-비정치적 태도(빌라도와의 문답) 그러나 정치적 태도(성전의 정화)
-메시아적 권위 주장 그러나 함구령이 있다.
-율법의 상대화 그러나 율법을 내면의 윤리에로까지 철저화 시키신다.
-메시아적 기적 그러나 십자가의 무능력
-유다이즘의 테두리에서 그러나 이방인의 영역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 그러나 심판이 아닌 사랑을···
-임박한 종말 그러나 ‘지금, 이미’의 하느님 나라
-먹보요 술꾼 그러나 기도하신 분
▶ 예수 – “알 수 있는 분”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예수는 “알 수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역사적 예수 생애 연구의 한계점이기도 했다. 신앙을 배제했던(또는 가능한 배제하려고 했던) 이성의 연구는 결국 좌초되었다. 예수 생애 연구는 예수를 제 각각의 모습으로 그려냈을 뿐이다.10)
예수의 동시대인들 역시 제 각각의 메시아관, 종말관으로 예수를 담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도망쳐 십자가에로 달아나버렸다. 제자들 역시 그러했고, 결국 부활하신 분을 체험하고서야 역사의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선포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에 이끌려 눈을 뜨고(개방성) 역사의 예수를 온전한 그리스도로 전해주고 있다(4개의 복음서)11).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현 단계의 논의가 아니다. 주어진 지상 예수의 모습에 주목해 보자.
1. 부분이 아닌 전체를!
-예수의 모습 가운데 어느것 하나를 과장한다면 예수는 그 과장된 틀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예수의 메시아 자의식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전해진 유산들이 이미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이를 반대할 큰 요인을 찾지 못하겠기에).
-예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두 개의 큰 줄기를 가닥잡을 수 있다: 감춤과 드러냄!
2.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12)
1) 감춤 – 인간의 길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성을 감춘다.
-복음은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준다(역사의 한 인물).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공적 무대에 나서기 전 30년간을 부모에게 순종한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유혹의 길에 나선다(유혹받는 인간상).
-정치적 메시아의 요구를 거절하신다. 그리고 함구령.
-아버지의 뜻을 찾는다: 광야와 산에서 기도함
-십자가의 순종(내어맡김)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걷는 인간의 길은 우상숭배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좇아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는 예수의 길에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인간의 길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실현된다(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
2) 드러냄 – 메시아의 길 그러나 새로움
-율법과 유다이즘의 상대화: 새로운 권위로 새로운 전망을···
-기적(특히 병자치유)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
-무조건적인 수용과 죄의 용서(모든 이의 구원): 사랑의 혁명!(하느님 나라의 구원론적 성격)
-유대 종말론적 지평의 수정: “아직 아니” 그러나 “이미”(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 그러나 인간의 길과 메시아의 길의 영역을 엄밀하게 분리할 수 없다. 두 개의 영역이 서로 넘나들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영역의 자유로운 왕래에서 칼체돈 공의회의 신앙 정식, “두개의 본성 안에서 하나의 위격”을 생동감 있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맥락에서(부분 아닌 전체를) 그리스도론은 십자가와 부활 모두를 고찰할 때에만 올바로 접합될 수 있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결국 역사적인 예수 생애 연구가 좌초된다면 신앙에로의 개방성이 요구될 것이다(그렇다고 본 발제의 논리적 부족함을 변명하지는 않겠다).
▶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W. Kasper는 예수가 지상에서 수행한 그 본연의 일(Sache Jesu)을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되었던 1)신론적 성격, 2)구원론적 성격, 3) 종말론적 성격을 갖는다.13)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이러한 성격들이 나자렛 예수의 인격과 삶 안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기에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동시에 4)그리스도론적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왜 그 제자들은 예수를 선포하게 되었는지가 드러난다.
▶ 이 고백의 실천적 의미
(1) 하느님 앞에서의 참된 인간의 길
-모든 현세적 권력(우상숭배)의 상대화
-신앙에로의 개방 : 자기숭배에서의 회두
(2) 신중심주의의 여타의 혼합주의에 대한 경계14)
(3) 전례적 “기억”과 예수추종(Nach-folge)의 “삶”(실천)
-부활체험이 역사의 예수를 재해석, 신앙고백했듯이 오늘의 우리 역시 전례적 “기억”을 통해서···
-그러나 “주님,주님!” 부르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믿음과 사랑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사랑의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15) 그러나 인간에게(나에게) 과연 그렇게 큰 사랑이 있는가?(있다면 무엇이고, 없다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