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우스주의 ~主義 Arianismus
2세기 그리고 특히 3세기에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 문제와 관련해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성자 종속 이론은 성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해서 널리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에서 성서 주석 학교를 창설한 루치아노(Lucian)는 안티오키아에서 출생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사제 아리우스(Arius, 336년 출생)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리우스는 이른바 ꡐ그리스도 양자론ꡑ의 논리를 따르면서 318년에 소접된 어떤 시노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 바 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인 로고스는 영원한 성부로부터 연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고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로고스는 아버지에 의해 세계 창조 이전에 하느님의 의지 행위를 통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느님을 ꡐ아버지ꡑ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은 지위로 고양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 아버지의 편에 가담하였다. 이로써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신적인 영광으로 고양되었고, 하느님이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수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동의하였다. 특히 저명한 교회 저술가로서 활동하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주교와 안티오키아의 학자 출신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 주교가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Alexander)와 그의 부제였던 아타나시오(Athanasius),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일부 성직자들은 매우 격렬하게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아리우스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곧 전체 교회에 파급되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Konstantin)는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의 일치를 필요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논쟁을 이끌어 가고 있는 아리우스와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니케아로 초청하여 공의회(325년)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약 250여 명의 주교들이 모여 두 달간에 걸쳐 회의를 계속하였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옹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고, 부제 아타나시오의 제안에 따라 체사레아 교회에서 세례 때 사용하던 신앙 고백문을 「니케아 신앙 고백문」으로 인정하였다.
「니케아 신앙 고백문」은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내용을 배제하고 있다. 예수는 ꡒ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아니하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다.ꡓ이로써 아리우스는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신앙 고백문」을 제국의 법률로 선포하였다. 하지만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히 황제가 취한 사리에 맞지 않는 태도는 아리우스의 이단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를 귀양에서 다시 불러들였고, 그 대신 아타나시오를 평화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죄목으로 추방시켰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주교의 영향력을 빌려 아리우스의 이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서방 세계에까지 확산시키려고 모색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니케아 신앙 고백문」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328년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재임하고 있던 아타나시오는 로마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아리우스주의에 물들어 있던 에우세비오 주교 역시 교황 율리오 1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341년 교황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이 시노드에 참석했던 5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은 아타나시오를 지지하였다. 교황 율리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아타나시오를 단죄한 책임을 물었다. 교황은 이 서한을 통해 아타나시오에 대한 정당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에 이의를 제기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먼저 로마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후 정당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오랜 법률적 관행이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서한과 로마에 소집된 시노드의 결정은 안티오키아에서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와 서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42년 교황의 요청에 따라 사르디카 – 지금의 소피아 – 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는 300명의 서로마 교회의 주교들과 76명의 동로마 교회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동로마 교회의 주교들은 아타나시오로 하여금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요구를 제기하였으나, 이 요구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결과 공의회는 제대로 개회조차도 하지 못하고 분열되고 말았다. 동로마 교회 주교들은 교황 율리오 1세와 서로마 교회의 지도자급 주교들에게 파문을 선언하였고, 아타나시오는 자신의 단호한 태도의 고수로 말미암아 로마, 트리어 그리고 에집트(3번) 등지로 다섯 번씩이나 추방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아리우스주의 자체 내에서도 분열이 발생하였다. 한 편에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완전히 종속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편 – 반(反 )아리우스주의: 이들은 나중에 다시금 교회로 되돌아온다 – 에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유사 관계를 인정하였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아리우스주의의 자기 분열은 이단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아리우스주의가 파생시키는 정치적인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 아리우스주의는 매우 강하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50년경 훈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한 고트족(게르만족의 일족)은 로마 황제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황제는 고트족이 아리우스주의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조건하에 보호를 보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트족의 지도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품된 주교 불필라스(Wulfilas)였다. 그는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했으며, 이것은 첫 번째 독일어 성서 번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트족은 민족 이동 당시 프랑스 남부 지역, 스페인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지에 아리우스주의를 확산시켰다. 381년에 개최된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역시 아리우스주의를 다루었고,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배척하였다. 아리우스주의 이단은 그 당시 교회에 엄청난 동요와 불확실성을 야기하였다. 다른 한편 아리우스주의는 교회를 더욱더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즉 교회에서 발생하는 논쟁의 사안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법정을 모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결국 이 법정은 교황권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 아리우스주의 ~主義 Arianismus
2세기 그리고 특히 3세기에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 문제와 관련해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성자 종속 이론은 성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해서 널리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에서 성서 주석 학교를 창설한 루치아노(Lucian)는 안티오키아에서 출생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사제 아리우스(Arius, 336년 출생)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리우스는 이른바 ꡐ그리스도 양자론ꡑ의 논리를 따르면서 318년에 소접된 어떤 시노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 바 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인 로고스는 영원한 성부로부터 연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고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로고스는 아버지에 의해 세계 창조 이전에 하느님의 의지 행위를 통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느님을 ꡐ아버지ꡑ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은 지위로 고양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 아버지의 편에 가담하였다. 이로써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신적인 영광으로 고양되었고, 하느님이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수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동의하였다. 특히 저명한 교회 저술가로서 활동하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주교와 안티오키아의 학자 출신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 주교가 아리우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Alexander)와 그의 부제였던 아타나시오(Athanasius),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일부 성직자들은 매우 격렬하게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아리우스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곧 전체 교회에 파급되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Konstantin)는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의 일치를 필요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논쟁을 이끌어 가고 있는 아리우스와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니케아로 초청하여 공의회(325년)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약 250여 명의 주교들이 모여 두 달간에 걸쳐 회의를 계속하였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옹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고, 부제 아타나시오의 제안에 따라 체사레아 교회에서 세례 때 사용하던 신앙 고백문을 「니케아 신앙 고백문」으로 인정하였다.
「니케아 신앙 고백문」은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내용을 배제하고 있다. 예수는 ꡒ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아니하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다.ꡓ이로써 아리우스는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신앙 고백문」을 제국의 법률로 선포하였다. 하지만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히 황제가 취한 사리에 맞지 않는 태도는 아리우스의 이단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를 귀양에서 다시 불러들였고, 그 대신 아타나시오를 평화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죄목으로 추방시켰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주교의 영향력을 빌려 아리우스의 이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서방 세계에까지 확산시키려고 모색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니케아 신앙 고백문」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328년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재임하고 있던 아타나시오는 로마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아리우스주의에 물들어 있던 에우세비오 주교 역시 교황 율리오 1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341년 교황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이 시노드에 참석했던 5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은 아타나시오를 지지하였다. 교황 율리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아타나시오를 단죄한 책임을 물었다. 교황은 이 서한을 통해 아타나시오에 대한 정당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에 이의를 제기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먼저 로마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후 정당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오랜 법률적 관행이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서한과 로마에 소집된 시노드의 결정은 안티오키아에서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와 서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42년 교황의 요청에 따라 사르디카 – 지금의 소피아 – 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는 300명의 서로마 교회의 주교들과 76명의 동로마 교회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동로마 교회의 주교들은 아타나시오로 하여금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요구를 제기하였으나, 이 요구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결과 공의회는 제대로 개회조차도 하지 못하고 분열되고 말았다. 동로마 교회 주교들은 교황 율리오 1세와 서로마 교회의 지도자급 주교들에게 파문을 선언하였고, 아타나시오는 자신의 단호한 태도의 고수로 말미암아 로마, 트리어 그리고 에집트(3번) 등지로 다섯 번씩이나 추방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아리우스주의 자체 내에서도 분열이 발생하였다. 한 편에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완전히 종속 관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편 – 반(反 )아리우스주의: 이들은 나중에 다시금 교회로 되돌아온다 – 에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유사 관계를 인정하였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아리우스주의의 자기 분열은 이단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아리우스주의가 파생시키는 정치적인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 아리우스주의는 매우 강하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50년경 훈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한 고트족(게르만족의 일족)은 로마 황제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황제는 고트족이 아리우스주의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조건하에 보호를 보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트족의 지도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품된 주교 불필라스(Wulfilas)였다. 그는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했으며, 이것은 첫 번째 독일어 성서 번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트족은 민족 이동 당시 프랑스 남부 지역, 스페인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지에 아리우스주의를 확산시켰다. 381년에 개최된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역시 아리우스주의를 다루었고,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배척하였다. 아리우스주의 이단은 그 당시 교회에 엄청난 동요와 불확실성을 야기하였다. 다른 한편 아리우스주의는 교회를 더욱더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즉 교회에서 발생하는 논쟁의 사안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법정을 모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결국 이 법정은 교황권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