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Augsburger Bekenntnis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信仰告白  Augsburger Bekenntnis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이 제출되었다. 황제 칼 5세는 터키의 침공을 앞둔 위기에 직면하여 제국을 다시금 일치시키기 위해 제국 의회를 소집하였다. 제국의 일치를 위해서는 가톨릭과 루터교파 사이에 내재하는 분열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작센의 선제후(選諸侯)였던 요한(Johann) – 루터의 친구이기도 했다 – 은 개신교 신앙 고백의 기본 조항과 이 조항에 근거를 둔 중요 실천적 지침을 감정할 것을 루터와 멜란히톤(Melanchthon)에게 의뢰하였다. 멜란히톤은 최종적인 감정의 결과를 제출하였다.


  1부는 21개의 조항에 대해 다루었고, 성서의 가르침,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가톨릭의 교의로부터 빗나가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2부는 7개 조항에 걸쳐 ꡐ폐습ꡑ에 대해 다루었으나 개신교도들이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양형 형태로 거행되는 성찬 전례, 독신 제도의 폐지 그리고 성지 순례 관습의 중지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은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들 – 특히 에크(Eck)와 코흐레우스(Chchlaeus) – 로 하여금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 신학자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의 1부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였다. 그러나 2부의 내용에 대해서는 기존의 관습으 옹호하면서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로써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 거부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타협의 시도가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려고 했던 황제의 계획은 공의회 지상주의의 부흥을 우려하는 교황 클레멘스(Clemens) 7세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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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信仰告白  Augsburger Bekenntnis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이 제출되었다. 황제 칼 5세는 터키의 침공을 앞둔 위기에 직면하여 제국을 다시금 일치시키기 위해 제국 의회를 소집하였다. 제국의 일치를 위해서는 가톨릭과 루터교파 사이에 내재하는 분열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작센의 선제후(選諸侯)였던 요한(Johann) – 루터의 친구이기도 했다 – 은 개신교 신앙 고백의 기본 조항과 이 조항에 근거를 둔 중요 실천적 지침을 감정할 것을 루터와 멜란히톤(Melanchthon)에게 의뢰하였다. 멜란히톤은 최종적인 감정의 결과를 제출하였다.

      1부는 21개의 조항에 대해 다루었고, 성서의 가르침, 교부들의 가르침 그리고 가톨릭의 교의로부터 빗나가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2부는 7개 조항에 걸쳐 ꡐ폐습ꡑ에 대해 다루었으나 개신교도들이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은 양형 형태로 거행되는 성찬 전례, 독신 제도의 폐지 그리고 성지 순례 관습의 중지 등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은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들 – 특히 에크(Eck)와 코흐레우스(Chchlaeus) – 로 하여금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 신학자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의 1부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였다. 그러나 2부의 내용에 대해서는 기존의 관습으 옹호하면서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로써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 거부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타협의 시도가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려고 했던 황제의 계획은 공의회 지상주의의 부흥을 우려하는 교황 클레멘스(Clemens) 7세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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