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Bernhard von Clairvaux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Bernhard von Clairvaux

  베르나르도는 1090년에 부르군트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112년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동료 30명과 함께 시토의 개혁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115년 베르나르도는 수도원의 창설을 위해 클레르보에 파견되었고,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활약하였다. 클레르보를 중심으로 해서 베르나르도는 69개의 수도원을 창설했으며, 이로써 베르나르도는 시스테르시안(Zisterziens) 수도원의 제2의 창설자로 간주되고 있다.


  교황사와 관련해서 베르나르도는 두 번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130년 교황 선거는 이중(二重)으로 치러졌다.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Anaklet) 2세가 같은 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래서 어느 교황이 적법한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로마의 백성들은 아나클레토 2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였다. 베르나르도는 1130년 에탕프(Etampes)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인노첸시오 2세의 고매한 인격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시노드에 참석한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프랑스 이외에 영국과 스페인도 인노첸시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1137년 말경 베르나르도는 교황 선출과 관련gkud 생긴 분열이 종식된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양쪽 진영에서 파견딘 사절들이 약 2주간에 걸쳐 격론을 벌였으나 별다른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1138년 1월에 아나클레토 2세가 별세하였다. 그의 후임자로 빅토리오 4세가 선출되었으나 빅토리오 4세는 인노첸시오 2세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이로써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을 충실하게 보필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도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 에우제니오(Eugen) 3세가 1145년 12월 1일 십자군 모집을 호소했을 때 다시 한 번 더 교회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였다. 베르나르도는 십자군 모집을 위한 홍보를 위임받았다. 베르나르도의 설득력 있는 설교는 프랑스, 독일, 특히 라인 지역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어 수많은 지원자를 모집할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은 1147년 성렁 강림절에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책임을 물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르나르도에게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별세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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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Bernhard von Clairvaux

      베르나르도는 1090년에 부르군트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112년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동료 30명과 함께 시토의 개혁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115년 베르나르도는 수도원의 창설을 위해 클레르보에 파견되었고,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활약하였다. 클레르보를 중심으로 해서 베르나르도는 69개의 수도원을 창설했으며, 이로써 베르나르도는 시스테르시안(Zisterziens) 수도원의 제2의 창설자로 간주되고 있다.

      교황사와 관련해서 베르나르도는 두 번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130년 교황 선거는 이중(二重)으로 치러졌다.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Anaklet) 2세가 같은 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래서 어느 교황이 적법한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로마의 백성들은 아나클레토 2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였다. 베르나르도는 1130년 에탕프(Etampes)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인노첸시오 2세의 고매한 인격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시노드에 참석한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프랑스 이외에 영국과 스페인도 인노첸시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1137년 말경 베르나르도는 교황 선출과 관련gkud 생긴 분열이 종식된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양쪽 진영에서 파견딘 사절들이 약 2주간에 걸쳐 격론을 벌였으나 별다른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1138년 1월에 아나클레토 2세가 별세하였다. 그의 후임자로 빅토리오 4세가 선출되었으나 빅토리오 4세는 인노첸시오 2세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이로써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을 충실하게 보필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도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 에우제니오(Eugen) 3세가 1145년 12월 1일 십자군 모집을 호소했을 때 다시 한 번 더 교회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였다. 베르나르도는 십자군 모집을 위한 홍보를 위임받았다. 베르나르도의 설득력 있는 설교는 프랑스, 독일, 특히 라인 지역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어 수많은 지원자를 모집할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은 1147년 성렁 강림절에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책임을 물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르나르도에게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별세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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