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 Canossa

  카노사  Canossa

  성직 임명권을 둘러싸고 독일 왕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였다. 불화가 진행되는 동안 독일의 주교들은 왕의 요청에 따라 1076년 1월 24일 교황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1076년 로마에서 개최된 시노드에서 왕을 파문시켰다. 1076년 독일의 영주들은 1년 이내에 파문으로부터 풀려날 경우 하인리히를 왕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아울러 독일의 영주들은 1077년 2월 2일 주의 봉헌 축일, 초 축성 전례를 함께 거행하자는 명목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아우크스부르크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원래 초청 목적은 교황과 왕 사이의 불화를 화해시키고자 한 데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 영주들의 초대를 받아들여 독일로 향한 여행길에 올랐다. 그사이 하인리히 왕은 파문의 사면을 청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향해 길을 떠났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왕은 카노사에서 조우하였다. 3일 동안 하인리히 왕은 참회의 옷을 입고 교회의 참회 규정에 따라 속죄를 이행하였다.


  1077년 1월 28일 하인리히 왕은 파문으로부터 풀려났고, 교황은 왕에게 성체 배령을 허락하였다. ꡒ카노사는 하인리히 개인에게는 굴욕을 의미했으나, 교황은 왕의 참회로 왕을 사면해 주어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실제로는 하인리히가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순전히 정치적인 견지에서 볼 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처신은 현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왕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적대자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금 회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반대로 교황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희생시켰다ꡓ(Franzen/Bau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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