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씀연구>
운전을 하려면 운전 면허가 있어야 합니다. 공연을 가기 위해서는 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수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영복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외적인 행위 뿐만 아니라 내적인 마음까지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참다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길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인생이 무의미한 것 같다는 이유 때문에 심약하고 무감각해진 감정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결단과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던 것과 같이 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기(필립비2,6-8)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결단은 자신을 버리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서로를 보충해 주며 한 가지 동일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결국 그것이 실제의 죽음에 관계되는 것이라 할지라도(순교, 박해 등)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 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의 숭고한 규범입니다.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얻을 것이고 잃은 사람은 잃었다고 해야 옳은 것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를 사용하시며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보존하려고 애쓰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목숨을 잃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목숨을 얻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시고, 제자들에게 따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관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면(영원한 생명) 그것을 무엇으로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종교는 건강종교 입니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목숨을 걸고 살을 빼기 위해 별의 별 것을 다하고, 건강을 위해 안하는 것 빼고는 다 합니다. 굉장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썩어 없어질 그 육신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많은 것을 투자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왜 그리도 인색한지…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심판 때 판결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그때 “넌 안돼!”라는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오늘부터 조금씩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연옥은 가야 좀 가능성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28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마르코 복음(9,1)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힘차게 오는”이라고 했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인자가 자기 나라에 오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다와 자기 영광에 싸여 오다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다“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오는 것”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임금의 영광에 싸여 있는 사람의 아들을 볼 사람도 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었고, 당대인들 중에도 살아서 그 종말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온다는 것”은 심판하기 위한 그분의 오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안에는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없는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아무것도 생략하거나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고 이 말씀을 전해줍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곧 불시에 세상에 들이닥칠 것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이 그 나라를 이끌어 들일 것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생각하시던 그 기간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태24,36) 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안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내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한다면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원 하나씩 들어주신다고 한다면 어떤 소원을 말씀드릴까요? 아마도
“저기요. 예수님! 아직 준비가 좀 덜 되었거든요.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주어진 시간은 우리에게 기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아쉽겠습니까?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특별한 사랑을 베풀며 살진 못하나, 제게 주어진 일상 하나 하나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2.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아쉽겠습니까?
글쎄요…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요즘처럼 사고가 많은 시대에 사는 현대인으로써
나도 어느날 갑자기 죽게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답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했는데,
저는 먼저 그 동안에 미쳐 고백하지 못하고 켜켜로 쌓아둔 묵은 죄를 고백하는 성사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오랜된 죄목을 하나 둘 생각날 때마다 종이에 잘 적어두어야겠죠
(혹시 이렇게 적어놓으면 신부님께서 죄를 사해 주시고 보속을 주실지도 ……)
아울러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느냐는 물음엔,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하염없는 사랑에 보답을 못하고,
주님의 계명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삶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특별한 사랑을 베풀며 살진 못하나, 제게 주어진 일상 하나 하나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2.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아쉽겠습니까?
글쎄요…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요즘처럼 사고가 많은 시대에 사는 현대인으로써
나도 어느날 갑자기 죽게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답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했는데,
저는 먼저 그 동안에 미쳐 고백하지 못하고 켜켜로 쌓아둔 묵은 죄를 고백하는 성사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오랜된 죄목을 하나 둘 생각날 때마다 종이에 잘 적어두어야겠죠
(혹시 이렇게 적어놓으면 신부님께서 죄를 사해 주시고 보속을 주실지도 ……)
아울러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느냐는 물음엔,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하염없는 사랑에 보답을 못하고,
주님의 계명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삶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 성무일도를 바치고 가까운 이웃을 위해
묵주의 9일기도를 바치고, 성서를 읽고 쓰고, 직장공동체에서 미사참례와 주모임,
성가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일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작은 몸짓은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언뜻 보기에 나열해 놓은 가짓 수는 참 많기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과연 얼마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쁘게 행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 가족과 그리고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직장동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 자신의 이기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줄 아는
그런 일련의 실천이 앞서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실천하고
행했을 때의 기쁨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쨍쨍 내리쬐는 삼복더위 끝에 정신없이 쏟아지는 한 줄기 소나기는 마음 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네요. 정말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렇죠?
더위속에 한 줄기 소나기! 바로 이런 삶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아쉽겠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하여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미운사람으로 남아있는 형제자매를
찾아가 용서하고, 또한 내가 준 상처로 마음 아파하는 이웃을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겨질 두 아이들을 꼭 안아 주고 싶네요.
아쉬운 것… 글쎄요. 생각해보면 참 많을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 특별한 생각은 없고, 단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질투하고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말을 툭툭 던지며
마음대로 살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꼭 고백성사를 보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 품으로 가고 싶을 것 같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 성무일도를 바치고 가까운 이웃을 위해
묵주의 9일기도를 바치고, 성서를 읽고 쓰고, 직장공동체에서 미사참례와 주모임,
성가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일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작은 몸짓은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언뜻 보기에 나열해 놓은 가짓 수는 참 많기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과연 얼마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쁘게 행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 가족과 그리고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직장동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 자신의 이기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줄 아는
그런 일련의 실천이 앞서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실천하고
행했을 때의 기쁨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쨍쨍 내리쬐는 삼복더위 끝에 정신없이 쏟아지는 한 줄기 소나기는 마음 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네요. 정말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렇죠?
더위속에 한 줄기 소나기! 바로 이런 삶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아쉽겠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하여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미운사람으로 남아있는 형제자매를
찾아가 용서하고, 또한 내가 준 상처로 마음 아파하는 이웃을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겨질 두 아이들을 꼭 안아 주고 싶네요.
아쉬운 것… 글쎄요. 생각해보면 참 많을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 특별한 생각은 없고, 단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질투하고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말을 툭툭 던지며
마음대로 살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꼭 고백성사를 보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 품으로 가고 싶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