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중요한 것들을 외면하는 사람들.
<말씀연구>
내적인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외적인 것이 중요한가? 물론 둘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적인 것을 무시한 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얼굴만 잘생기면 뭐하겠습니까? 성격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것만을 존중하는 유대교 신심을 날카롭게 비판하십니다. 참다운 정결이란 무엇일까? 마음과 정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5“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식사 전에 적어도 물 한 움큼으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는 것은 유다인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거룩한 관습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커다란 범죄, 위반이었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목말라 죽을 지경이었지만, 식사 전에 주는 한 줌의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모세까지 올라 갈 수 없고, 구약의 모세오경에도 없는 것이었지만 후에 율법의 해석으로서 또 실생활에 대한 율법의 응용으로서 율법학자들에 의해 결정되고, 그리고 그들 학파에게 전해진 규칙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 15절에는 율법상의 깨끗함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손을 씻는 일에 대한 규정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며, 그들의 사생활을 규제하는 규정은 아니었습니다. 이 규정을 사제 아닌 일반 신자의 의무라고 규정한 것은 힛레루와 샹마이라는 두 유명한 랍비의 영향인 듯 합니다. 그런데 만지는 음식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모든 식사에 앞서서 손을 씻어 깨끗이 한다는 규정은 모든 유다인이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거의는 이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규정은 지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레위기가 말하는 성덕에 대한 이상을 일반인들에게 씌우려고, 사제들에게만 명령된 행위를 모든 유다인에게 지키게 하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각에 크게 반발하고 대립하였습니다.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더 엄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는 죄인이나 이방인의 상인과 접촉하게 됩니다. 따라서 몹시 크게 더러워질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큰 그릇에다 팔을 팔꿈치까지 담궈야 했습니다. 팔레스틴과 같이 물이 귀한 지방에서는 이런 씻음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씻음을 실천하기 위해 가령 4마일(6.4키로)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쓰는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다른 특별한 규정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나무 또는 쇠붙이 잔, 접시에 한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질그릇은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입술로만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코를 납작하게 만드십니다.
6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7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성당에 있다고 해서 다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고 또 더럽게 하는 것은 물질이나 음식이 아닙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마음이 행실로 드러나 깨끗하게도 하고, 더럽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형식적인 종교와 그들의 윤리관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 자체도 공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먹기보다는 죽음을 택한 늙은 엘르아잘의 영웅적인 정신이나 일곱 아이를 둔 어머니의 순교 이야기(마카베오)를 군중들과 제자들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세대에 걸친 그들의 교육과 사고방식이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카베오서에서 돼지고기를 부정하는 것은 박해자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을 없애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즉 돼지고기를 먹어서 몸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음을 통해서 신앙을 부정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해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돼지고기가 신앙을 위협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요빠에서 베드로 앞에 여러 가지 짐승을 담은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베드로는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는 더러운 것을 먹은 일이 없다고 외칩니다(사도10,14). 보통 유다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깨끗함과 더러움은 사물에 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고방식을 배격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먹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잠깐. 개고기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개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못 먹는다고. 그런데 개고기를 잘게 썰어서 육개장이라고 하면 맛있다고 먹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음식의 맛도 선입견이 좌우하는 듯 합니다. 또한 남이 먹는 음식을 가지고 뭐라 해도 안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성서의 이 말씀을 한번쯤 묵상해 본다면 그런 말을 삼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15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더러움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를 위한 마음에서 행하는 것들은 악한 것이 될 수 있지만, 남을 배려하면서 하는 것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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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를 진정으로 위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위해주는가?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주고, 그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배려하고 있는가? 나를 더럽히는 것들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나온다…..아주 많이…
23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띠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띠로지역은 남으로는 갈릴래아, 동으로는 필립보 분봉왕의 땅과 접한 시리아라는 로마 남쪽입니다. 겐네사렛 호수에서 국경까지는 50키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띠로와 시돈이라는 두 도읍이 내륙에 큰 면적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 도읍이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이 띠로시 부근까지 갔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을 피하려고 여기에 오셨으나, 남몰래 숨어서 지내려는 예수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도 레위기의 금기 곧 더러워질까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깨끗함과 더러움은 예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증명해 주고 계십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하느님을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공경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못마땅한 것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