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중에 복음 십자가여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 수없이 많은 죄들로 얼룩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감히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는데에 익숙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런 자신의 모습과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데 더욱 익숙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떤 모습을 보는데에 익숙하십니까?

첫 번째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을때 우리의 영성생활은 황폐해집니다. 은총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번째의 모습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살게 됩니다. 은총을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와 가리옷 사람 유다를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새롭게 태어나 사도가 됩니다. 죄의 관점에서 그는 대죄 중에서도 대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는 확신 속에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신의 죄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던 똑같은 죄를 지었지만 누구에게 시선을 고정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달라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시선을 지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오셨지만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 헛된 이론에 빠져 진정하고 유일한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되어 윤리적, 사상적, 종교적으로 죄에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지경 세상이지만 하느님께서 가장 소중한 외아들, 아니 하느님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실 정도로 한없는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결국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은 바로 ‘우리’입니다.

생활하다보면 때때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런 시간이 점차 길어지면서 그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름대로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간구책을 마련해 실천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합리화를, 어떤 사람은 하느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참된 진리와 정의와 사랑, 해방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답이 되지 못함을 뒤늦게 깨닫고야 맙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시선을 자꾸만 자신의 부족함으로만 향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의 핵심은 우리의 주요 시선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를 극도로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 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잊은 채 인간의 상식으로 하느님을 속단하려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인간이 잘하면 복을 주시고 잘 못하면 벌을 주시는 분 정도로 여깁니다. 결국 그 관점에서는 잘못을 많이 범한 나는 하느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사람,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기도생활 잘하고 계명 잘 지키면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자랑하려 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는 죄이며 우리의 영성생활에 가장 큰 적은 교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고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존재이며, 그런 우리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을 전환해야 합니다. 부족한 나에게가 아니라 그 모두를 포용해주시는 예수님께로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이 피조물을 위해 십자가를 집니까? 세상의 어떤 신이 죄인을 위해서 한없는 사랑의 시선을 보내십니까?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사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았으니 이제 더 이상 십자가 앞에서 고개 숙이지 말고,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지 맙시다. 오히려 자신이 부족한 만큼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한없는 사랑을 체험합시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는데 익숙해지지 말고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며 은총을 체험하는데 익숙해집시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죄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는 고백을 합시다.

그 옛날 광야에서 구리 뱀을 바라보고도 죽을 운명에 처했던 이들이 살아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매일 매일 죽을 운명에 처한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며 선물입니다.

211.58.144.163 이 헬레나: 추석명절은 잘 지내셨는지요 오랫만에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바쁘셨어요?많은생각을 하게하는오늘 묵상하신글을 읽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나눌수있는 이곳에 저도함께 있다는 사실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묵상으로 깨우침으르 주신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자주 오셔서 좋은묵상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좋은하루 되세요 [09/14-07:37]
211.194.124.5 루실라: 은총을 수용할줄 아는,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저 이고 싶습니다.좋은묵상 나눠 주심에 감사드리며 자주뵙기를 청해봅니다 [09/14-08:10]
61.81.3.155 루까: 안녕하세요, 이번주에는 제 강론을 올렸습니다. 간단한 글을 올려야 하는데….죄송합니다. 즐거운 주일되세요. [09/1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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