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사람들


<말씀연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지 말고, 첫인상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지 말고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를 대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21  그 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 성경 (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구세주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예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였습니다. 이것은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며 이 믿음은 들음으로써 옵니다. 믿음은 도전에 대한 응답입니다.


성서 낭독 후에는 가르침이 뒤따랐습니다. 그 가르침이 강렬한 만큼 인상적인 단어들로 된 한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때를 선포하시고 그 때가 도래하였음을 알리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순간에 있어서 새롭고도 기묘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서 말씀이 이제 실현된 것입니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에 대해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온 은총의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였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의 총애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청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모두들 예수님을 칭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디도서2,11). “하느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사도10,38). 이러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직접 체험한 첫인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영화 벤허에서 보면 요셉의 목공소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아들은 어디 갔냐고? 게으름뱅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요셉은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일을 한다고…


예수님의 말씀은 도전이었고 문제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구세주는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다름없었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걸림돌은 예수님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러했듯이 사도들에게도 화를 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필경 여러분은 비유를 들어 나에게 ‘의사여, 네 자신부터 고쳐라. 가파르나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우리가 들었소. (그런 일을) 여기 당신 고향에서도 해 보시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설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13,46).




24  이어서 그분은 말씀하셨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이시라는 표징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그들이 규정하는 바대로 입증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정하신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동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25  진실로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삼년 육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습니다. 26  그런데 엘리야는 그들 중 아무에게도 보내어지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어졌습니다. 27  그리고 엘리사 예언자 때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임의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파견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적이 이웃 주민들에게가 아니라 낯선 이들과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구세주의 고향 사람들이었고 같은 혈통을 지닌 친척들이었다는 것이 구원의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온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나셨다는 이유로 구원에 대한 권리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셨고 또 그 다스림을 확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기쁨이 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구원은 은총입니다.




28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말씀을 듣고 분통을 터뜨렸다.29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고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들의 고을은 산 위에 있었는데 예수를 그 벼랑에까지 데리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하였다.


예언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반드시 표징과 놀라운 일들로 자신이 예언자임을 증명해야 했습니다(신명 13,2-3).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불경한 자를 처벌하는 첫 조치는 핵심 증인이 그 죄인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심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즉시 형에 처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명이 좌절되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불경한 자로 낙인찍히고 배척당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셨습니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 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의 모습을 잘못 알고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그리고 나의 모습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럴 경우 어떻게 하십니까?




2.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상처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됩니다. 마치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혹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박해한 적이나, 박해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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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훌륭한 설교를 하시어
    고향사람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거룩하게 변모된 모습과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칭찬을 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며 예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편견과 완고함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는
    성서귀절 역시
    나의 그러한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편견이나 완고함외에 질투심의 발로가 아닌가?
    나라고 그 대열에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성서에는 또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도 고향사람들이 기적을 행하기를 강요하고
    또 그렇게 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도 있을 터인데도 ….

    나의 마음이 완고하여 닫혀 있을때,
    아주 단편적인 어떤 것을 보고
    마치 그것을 다 아는야양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때,
    다른이가 잘되고 성숙해 나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때,
    아무리 사랑으로 가득한 하느님께서도
    나에게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을 정화하고
    나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가슴을 비우고 활짝 열었을 대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순수하고 열려있는 마음을 지닐수 있도록 힘쓰기로 다짐하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211.202.234.59 이 헬레나: 요셉피나자매님!
    어제 복음믁상을 하려고 컴퓨터에 5시간동안 매달려 있다가 올렸는데
    아뿔사! 글이 날라갔답니다 황당하고 약오르고 시간은 새벽세시가
    넘었고 중간에 적은글이 어디로 숨었는지 다시 적으려하니 생각이 나지
    않아 아직도 헤매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격려해주심에 엄청 힘이 납니
    다 좋은하루 되세요
    [02/01-09:46]

  2. user#0 님의 말: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훌륭한 설교를 하시어
    고향사람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거룩하게 변모된 모습과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칭찬을 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며 예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편견과 완고함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는
    성서귀절 역시
    나의 그러한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편견이나 완고함외에 질투심의 발로가 아닌가?
    나라고 그 대열에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성서에는 또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도 고향사람들이 기적을 행하기를 강요하고
    또 그렇게 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도 있을 터인데도 ….

    나의 마음이 완고하여 닫혀 있을때,
    아주 단편적인 어떤 것을 보고
    마치 그것을 다 아는야양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때,
    다른이가 잘되고 성숙해 나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때,
    아무리 사랑으로 가득한 하느님께서도
    나에게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을 정화하고
    나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가슴을 비우고 활짝 열었을 대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순수하고 열려있는 마음을 지닐수 있도록 힘쓰기로 다짐하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211.202.234.59 이 헬레나: 요셉피나자매님!
    어제 복음믁상을 하려고 컴퓨터에 5시간동안 매달려 있다가 올렸는데
    아뿔사! 글이 날라갔답니다 황당하고 약오르고 시간은 새벽세시가
    넘었고 중간에 적은글이 어디로 숨었는지 다시 적으려하니 생각이 나지
    않아 아직도 헤매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격려해주심에 엄청 힘이 납니
    다 좋은하루 되세요
    [02/01-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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