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은 동정 마리아에 관한 교의적인 두 소재로 구성된다. 이 두 소재는, 비록 성서에서 분명히 증명되지는 않더라도, 가톨릭 교회 안에서 1854년과 1950년의 두 정의에 이르기까지 교부 시대 말기 이후 교회 안에서 발전해 왔다.


    동정녀에 대한 이 두 신비는 자주 ‘특전’으로 불리었다. 우리 인간성의 차원을 넘어서 구원이 마리아에게 이르는 방법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이 두 신비는 ‘특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특전’이라는 두 개념이 교의적인 분야에서 그것들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본다. 그것은 사실 동정 마리아의 신적 모성의 두 결과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마리아의 성성을 탐색하고 그 원천에까지 그 성성을 설정하고 마리아의 지상 생활 마감 후 그녀의 죽음과 그녀의 육체의 운명에 대해서도 질문하도록 하는 것은, 이 신적 모성에 대한 고찰의 토대에서 이루어진다. 한 측면에서는 개인적인 성성에서 원천적인 시초의 성성 즉 무염시태에까지 갔던 과정이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죽음을 승천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마리아의 죽음을 ‘하나의 수면’(dormition)으로 생각했던 과정이 있었다.




    I. 잉태에 있어서 거룩한 동정이시고 죄 없으신 마리아




    1. 마리아의 성성(聖性)에 대한 교부들의 견해(3-4세기)




    3세기의 교부들은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대조적인 생각들을 가졌었다. 떼르뚤리아누스는 예수를 만나려 찾아가는 마리아의 장면과 예수의 형제들에 관해 살펴보면서 마리아는 자기 아들에 대한 신앙이 부족해서 아들로부터 ‘거부당했다’고 생각한다1). 오리게네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훨씬 더 적극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데 그 성성에서 경륜적 원칙을 밝힌다 : 이 성성은 그녀 안에 현존하는 말씀을 그녀에게 통교하는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때 성성은 성숙되어야 하며 마리아는 모든 허물에서 면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수난 앞에서 그 스캔들에 예속되지 않았다면 그때 예수는 그녀의 죄를 위해 죽지 않았을 것이지만, ‘모두가 죄를 범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했고 모두가 의롭게되고 그분의 은총으로 속량되었다면’(로마 3,23) 마리아도 역시 이 순간에 그 스캔들에 예속되었다2). 오리게네스는 이처럼 구원 보편성의 원칙을 설정하고 마리아를 거기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입장은 4세기 동방 교부들의 입장이 될 것이다 : 한편으로는, 마리아는 그녀의 신적 모성이라는 사실에서 거룩하며 신적 모성을 위해서 그녀가 성령에 의해 먼저 정화된 것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마리아에게서 어떤 ‘결함들’을 본다. 이와 같이 4세기 말에도 아직 요한 크리소스또무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 그녀는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를 믿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즈가리아처럼 그녀는 의문을 제기했다) ; 그녀는 가나에서 ‘스스로 뽐내고’ 싶어했고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그녀는 자기 아들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다 ; 그녀는 헛된 영광과 신앙의 부족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컬어 ‘장면이 아주 어둡다’고 쥬아싸르(G. Jouassard)는 결론지었다3). 에페소 공의회 이전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는 마리아가 자기 신앙 안에서 균형을 잃었으며 그녀는 죄를 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수난의 순간에 요한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4).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이 이 교부들로 하여금 마리아를 전적으로 거룩하다고 부르면서 그녀를 동정녀들의 모범으로 소개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정교회는 이러한 전체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과에 비추어 무염시태에 대한 모든 확신은 거부한다. 트램벨라스(P.N. Trembelas)가 저술한 정교회의 상징적인 저서 안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하느님의 모친(Theotokos)도 역시 모든 사람들처럼 원초적인 잘못과 조상의 잘못의 죄를 범할 수 있었고, 교부들이 ‘너에게 성령이 임하리라 […]’는 천사가 동정녀에게 한 말씀을 해석할 때 그들은 마리아를 정화하고 말씀의 거처에 합당한 거룩한 장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령이 미리 그녀에게 내렸다고 말한다. 결국 마리아는 정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다.5)” 마리아는 ‘원죄의 정화’에 대한 보편적인 필요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2. 4세기말에서 8세기까지




    서방의 힐라리우스는 많은 희랍 교부들의 예를 따라 육화의 순간에 있어서 마리아의 성화에 대해 말한다6). 그는 마리아가 죄를 범할 수 있었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으시기7)’ 때문이다. 베로나(Verona)의 제논(Zenon)은 마리아가 육화 전에 정화되어야 했던 마리아 안의 ‘악덕의 수’를 밝히기도 한다8). 반대로, 밀라노의 암브로시오에게 있어서는 마리아의 성성을 그린 화폭에 어둠의 그림자가 없다. 암브로시오의 주장이 4세기 말에 가서 서방에서 인정을 받는다9).


    마리아의 성성에 대한 문제는 뺄라지아니즘의 위기와 함께 새로운 전개를 보인다10). 뺄라지우스는 마리아의 절대 성성을 확신한다. 그는 마리아가 죄를 거부하면서 인간 본성이 할 수 있는 것의 한 표본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띠누스는 그것은 하느님의 모친 신분에 어울리는 하나의 특전에 관한 것이라고 그에게 대답한다. 그는 동정녀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때 개인적인 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며 그녀의 전적인 성성을 고백할 뿐이다11). 그러나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은총이라는 사실이다. 에클라눔(Eclanum)의 율리아누스(Julianus)와 함께 벌인 아우구스띠누스의 논쟁은 순수 원죄에 대한 문제였다. 마리아가 원죄의 존재를 거부하도록 허용하는 첫 모델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탄생으로부터 오는 성성 안에는 그녀를 위해서 마련된 아무런 특전이 없다. 아우구스띠누스는 다소 애매한 방법으로 이에 대답한다 :




    우리는 마리아의 탄생 조건에 근거해서 그녀를 악마의 세력에 관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이 때문에 이 조건이 그녀가 다시 태어나도록 도움을 주었던 은총 안에서 마리아를 위한 그 해답을 발견하도록 한다.12)




    마리아는 그녀의 좋은 탄생 때문에 악마의 세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새 탄생의 은총을 보유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를 엄습하는 죄 때문에 그렇다. 아우구스띠누스는 마리아의 성성을 인정하지만, 그는 그녀가 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은 거부한다.


    에페소 공의회 이전에, 서방은 마리아의 성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동방보다 앞섰다. 그러나 아우구스띠누스의 입장은 라틴 교회로 하여금 여러 세기 동안 동방에서는 달리 생각했던 무염시태 문제에 대한 발전을 느리게 한다.


    동방은 에페소 공의회의 결과로 마리아에 대한 경신례의 발전 분위기 안에서 진행되어 나간다. 에페소 공의회의 구성원인 안키라(Ancyra)의 테오도투스(Theodotus)는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예전에 흠 없이 동정녀 [하와]를 창조하셨던 분이 두 번째 동정녀를 죄 없이 탄생하게 하셨다.13)” 설교 안에는 마리아에 대한 칭송이 아주 풍부하다. 이미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크리소스토무스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같은 태도를 테오도레투스(Theodoretus)와 다른 동방 교부들에게서 다시 발견한다. 발전의 과정은 6세기와 7세기까지 지속되지만 항상 어떤 주저함이 함께 했었다.


    8세기에 상황은 더욱 분명해진다. 크레테(Crete)의 안드레아(+740)는 마리아의 전 생애가 흠 없고 죄 없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14). 그는 마리아를 하느님이 아담을 빚었던 순결하고 순수한 흙에 비교하며 마리아의 탄생을 범죄하기 전의 첫 여인 창조에 비교한다15). 아담과 새 하와는 모든 죄에서 순결하다. 마리아는 구원과 신화(divinisatio)의 첫 수확을 실현하고 다시 찾은 평화의 첫 수확을 이루었다16). 크레테의 안드레아와 함께 이러한 확신은 동시적인 발전을 통해 마리아의 최초 성성에서 그녀의 원천적인 성성에로 넘어간다17). 그는 마리아를 ‘원죄가 없다’고 하며 그녀의 ‘거룩한 잉태’를 높이 평가한다. 아직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러한 생각은 그 다음 비잔틴 신학에서 인정받게 된다. 교리적인 이러한 발전은 마리아의 잉태 축일 전례와 관련이 있다. 희랍교부들의 마리아 신학을 수렴하는 요한 다마스쿠스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그녀의 신적 모성에서 오며 특히 전적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그녀의 잉태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18).


    서방에서는 반대로 문제가 아우구스띠누스의 견해에 의해 주도되어 존속한다. 대(大) 레오 교황, 아를르(Arles)의 체사리우스(Caesarius), 까씨오도루스(Cassiodorus) 그리고 대(大) 그레고리오는 틀림없이 기원에 있어서 마리아의 죄에 대해 아우구스띠누스보다는 더 삼가는 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죄를 면한 분이라고 한다. 그분의 잉태가 순결했기(따라서 사욕이 없는) 때문이다. 반대로 룹스(Rupse)의 풀젠씨우스(Fulgentius), 프로스페르 아퀴따누스(Prosper Aquitanus), 그리고 까씨아누스(Cassianus)는 분명히 아우구스띠누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19).




    3. 서방의 중세시기와 무염시태에 대한 논쟁




    무염시태는 서방 신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의 대상으로 남는다. 까롤링거 왕조의 탄생시기에, 꼬르비(Corbie)의 빠스카시우스 랕베르뚜스(Paschasius Radbertus, 790-860)는 마리아가 ‘첫 번째 기원으로부터 오는 모든 오염과는 관련이 없었다20)’ 고 선언한 첫째 증인이다. 희랍의 마리아 잉태 축일이 11세기 중엽 서방으로 전해져서 12세기에는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21). 또한 하나의 전설이 동정에서 비롯되는 기적적인 잉태를 마리아에게 적용하는데, 그 내용은 마리아가 모든 성적인 관계를 동반하는 사욕에 연대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원죄 전수에서 보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의 입장은 대조적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는 무염시태를 거부한다. 이 이론이 원죄의 보편성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마리아가 모태에서부터 은총으로 원죄에서 정화되었다고 생각하며 – 세례자 요한과 비교 -,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구세주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22). 이것이 당시 신학자들에게 지배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칸 학파 내의 더욱 호의적인 흐름을 반향한다. 마리아가 정화 양식이 아니라 죄에서의 보호라는 양식 하에서 속량되었다는 생각이 이미 13세기에 표명되었다. 14세기에는 자유로운 신학적 견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영국의 프란치스칸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서방신학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같은 생각을 정식화한다. 마리아는 자기 아들의 공로를 예측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속량되었다는 것이다23). 한 세기 반이 지나서 교리적인 상황은 무염시태 교리로 반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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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몽소승천


        무염시태와 몽소승천은 동정 마리아에 관한 교의적인 두 소재로 구성된다. 이 두 소재는, 비록 성서에서 분명히 증명되지는 않더라도, 가톨릭 교회 안에서 1854년과 1950년의 두 정의에 이르기까지 교부 시대 말기 이후 교회 안에서 발전해 왔다.

        동정녀에 대한 이 두 신비는 자주 ‘특전’으로 불리었다. 우리 인간성의 차원을 넘어서 구원이 마리아에게 이르는 방법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이 두 신비는 ‘특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특전’이라는 두 개념이 교의적인 분야에서 그것들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본다. 그것은 사실 동정 마리아의 신적 모성의 두 결과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마리아의 성성을 탐색하고 그 원천에까지 그 성성을 설정하고 마리아의 지상 생활 마감 후 그녀의 죽음과 그녀의 육체의 운명에 대해서도 질문하도록 하는 것은, 이 신적 모성에 대한 고찰의 토대에서 이루어진다. 한 측면에서는 개인적인 성성에서 원천적인 시초의 성성 즉 무염시태에까지 갔던 과정이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죽음을 승천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마리아의 죽음을 ‘하나의 수면’(dormition)으로 생각했던 과정이 있었다.


        I. 잉태에 있어서 거룩한 동정이시고 죄 없으신 마리아


        1. 마리아의 성성(聖性)에 대한 교부들의 견해(3-4세기)


        3세기의 교부들은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대조적인 생각들을 가졌었다. 떼르뚤리아누스는 예수를 만나려 찾아가는 마리아의 장면과 예수의 형제들에 관해 살펴보면서 마리아는 자기 아들에 대한 신앙이 부족해서 아들로부터 ‘거부당했다’고 생각한다1). 오리게네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훨씬 더 적극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데 그 성성에서 경륜적 원칙을 밝힌다 : 이 성성은 그녀 안에 현존하는 말씀을 그녀에게 통교하는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때 성성은 성숙되어야 하며 마리아는 모든 허물에서 면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수난 앞에서 그 스캔들에 예속되지 않았다면 그때 예수는 그녀의 죄를 위해 죽지 않았을 것이지만, ‘모두가 죄를 범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했고 모두가 의롭게되고 그분의 은총으로 속량되었다면’(로마 3,23) 마리아도 역시 이 순간에 그 스캔들에 예속되었다2). 오리게네스는 이처럼 구원 보편성의 원칙을 설정하고 마리아를 거기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입장은 4세기 동방 교부들의 입장이 될 것이다 : 한편으로는, 마리아는 그녀의 신적 모성이라는 사실에서 거룩하며 신적 모성을 위해서 그녀가 성령에 의해 먼저 정화된 것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마리아에게서 어떤 ‘결함들’을 본다. 이와 같이 4세기 말에도 아직 요한 크리소스또무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 그녀는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를 믿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즈가리아처럼 그녀는 의문을 제기했다) ; 그녀는 가나에서 ‘스스로 뽐내고’ 싶어했고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그녀는 자기 아들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다 ; 그녀는 헛된 영광과 신앙의 부족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컬어 ‘장면이 아주 어둡다’고 쥬아싸르(G. Jouassard)는 결론지었다3). 에페소 공의회 이전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는 마리아가 자기 신앙 안에서 균형을 잃었으며 그녀는 죄를 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수난의 순간에 요한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4).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이 이 교부들로 하여금 마리아를 전적으로 거룩하다고 부르면서 그녀를 동정녀들의 모범으로 소개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정교회는 이러한 전체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과에 비추어 무염시태에 대한 모든 확신은 거부한다. 트램벨라스(P.N. Trembelas)가 저술한 정교회의 상징적인 저서 안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하느님의 모친(Theotokos)도 역시 모든 사람들처럼 원초적인 잘못과 조상의 잘못의 죄를 범할 수 있었고, 교부들이 ‘너에게 성령이 임하리라 […]’는 천사가 동정녀에게 한 말씀을 해석할 때 그들은 마리아를 정화하고 말씀의 거처에 합당한 거룩한 장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령이 미리 그녀에게 내렸다고 말한다. 결국 마리아는 정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다.5)” 마리아는 ‘원죄의 정화’에 대한 보편적인 필요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2. 4세기말에서 8세기까지


        서방의 힐라리우스는 많은 희랍 교부들의 예를 따라 육화의 순간에 있어서 마리아의 성화에 대해 말한다6). 그는 마리아가 죄를 범할 수 있었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으시기7)’ 때문이다. 베로나(Verona)의 제논(Zenon)은 마리아가 육화 전에 정화되어야 했던 마리아 안의 ‘악덕의 수’를 밝히기도 한다8). 반대로, 밀라노의 암브로시오에게 있어서는 마리아의 성성을 그린 화폭에 어둠의 그림자가 없다. 암브로시오의 주장이 4세기 말에 가서 서방에서 인정을 받는다9).

        마리아의 성성에 대한 문제는 뺄라지아니즘의 위기와 함께 새로운 전개를 보인다10). 뺄라지우스는 마리아의 절대 성성을 확신한다. 그는 마리아가 죄를 거부하면서 인간 본성이 할 수 있는 것의 한 표본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띠누스는 그것은 하느님의 모친 신분에 어울리는 하나의 특전에 관한 것이라고 그에게 대답한다. 그는 동정녀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때 개인적인 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며 그녀의 전적인 성성을 고백할 뿐이다11). 그러나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은총이라는 사실이다. 에클라눔(Eclanum)의 율리아누스(Julianus)와 함께 벌인 아우구스띠누스의 논쟁은 순수 원죄에 대한 문제였다. 마리아가 원죄의 존재를 거부하도록 허용하는 첫 모델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탄생으로부터 오는 성성 안에는 그녀를 위해서 마련된 아무런 특전이 없다. 아우구스띠누스는 다소 애매한 방법으로 이에 대답한다 :


        우리는 마리아의 탄생 조건에 근거해서 그녀를 악마의 세력에 관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이 때문에 이 조건이 그녀가 다시 태어나도록 도움을 주었던 은총 안에서 마리아를 위한 그 해답을 발견하도록 한다.12)


        마리아는 그녀의 좋은 탄생 때문에 악마의 세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새 탄생의 은총을 보유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를 엄습하는 죄 때문에 그렇다. 아우구스띠누스는 마리아의 성성을 인정하지만, 그는 그녀가 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은 거부한다.

        에페소 공의회 이전에, 서방은 마리아의 성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동방보다 앞섰다. 그러나 아우구스띠누스의 입장은 라틴 교회로 하여금 여러 세기 동안 동방에서는 달리 생각했던 무염시태 문제에 대한 발전을 느리게 한다.

        동방은 에페소 공의회의 결과로 마리아에 대한 경신례의 발전 분위기 안에서 진행되어 나간다. 에페소 공의회의 구성원인 안키라(Ancyra)의 테오도투스(Theodotus)는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예전에 흠 없이 동정녀 [하와]를 창조하셨던 분이 두 번째 동정녀를 죄 없이 탄생하게 하셨다.13)” 설교 안에는 마리아에 대한 칭송이 아주 풍부하다. 이미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대해 크리소스토무스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같은 태도를 테오도레투스(Theodoretus)와 다른 동방 교부들에게서 다시 발견한다. 발전의 과정은 6세기와 7세기까지 지속되지만 항상 어떤 주저함이 함께 했었다.

        8세기에 상황은 더욱 분명해진다. 크레테(Crete)의 안드레아(+740)는 마리아의 전 생애가 흠 없고 죄 없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14). 그는 마리아를 하느님이 아담을 빚었던 순결하고 순수한 흙에 비교하며 마리아의 탄생을 범죄하기 전의 첫 여인 창조에 비교한다15). 아담과 새 하와는 모든 죄에서 순결하다. 마리아는 구원과 신화(divinisatio)의 첫 수확을 실현하고 다시 찾은 평화의 첫 수확을 이루었다16). 크레테의 안드레아와 함께 이러한 확신은 동시적인 발전을 통해 마리아의 최초 성성에서 그녀의 원천적인 성성에로 넘어간다17). 그는 마리아를 ‘원죄가 없다’고 하며 그녀의 ‘거룩한 잉태’를 높이 평가한다. 아직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러한 생각은 그 다음 비잔틴 신학에서 인정받게 된다. 교리적인 이러한 발전은 마리아의 잉태 축일 전례와 관련이 있다. 희랍교부들의 마리아 신학을 수렴하는 요한 다마스쿠스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그녀의 신적 모성에서 오며 특히 전적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그녀의 잉태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18).

        서방에서는 반대로 문제가 아우구스띠누스의 견해에 의해 주도되어 존속한다. 대(大) 레오 교황, 아를르(Arles)의 체사리우스(Caesarius), 까씨오도루스(Cassiodorus) 그리고 대(大) 그레고리오는 틀림없이 기원에 있어서 마리아의 죄에 대해 아우구스띠누스보다는 더 삼가는 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죄를 면한 분이라고 한다. 그분의 잉태가 순결했기(따라서 사욕이 없는) 때문이다. 반대로 룹스(Rupse)의 풀젠씨우스(Fulgentius), 프로스페르 아퀴따누스(Prosper Aquitanus), 그리고 까씨아누스(Cassianus)는 분명히 아우구스띠누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19).


        3. 서방의 중세시기와 무염시태에 대한 논쟁


        무염시태는 서방 신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의 대상으로 남는다. 까롤링거 왕조의 탄생시기에, 꼬르비(Corbie)의 빠스카시우스 랕베르뚜스(Paschasius Radbertus, 790-860)는 마리아가 ‘첫 번째 기원으로부터 오는 모든 오염과는 관련이 없었다20)’ 고 선언한 첫째 증인이다. 희랍의 마리아 잉태 축일이 11세기 중엽 서방으로 전해져서 12세기에는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21). 또한 하나의 전설이 동정에서 비롯되는 기적적인 잉태를 마리아에게 적용하는데, 그 내용은 마리아가 모든 성적인 관계를 동반하는 사욕에 연대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원죄 전수에서 보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의 입장은 대조적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는 무염시태를 거부한다. 이 이론이 원죄의 보편성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마리아가 모태에서부터 은총으로 원죄에서 정화되었다고 생각하며 – 세례자 요한과 비교 -,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구세주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22). 이것이 당시 신학자들에게 지배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칸 학파 내의 더욱 호의적인 흐름을 반향한다. 마리아가 정화 양식이 아니라 죄에서의 보호라는 양식 하에서 속량되었다는 생각이 이미 13세기에 표명되었다. 14세기에는 자유로운 신학적 견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영국의 프란치스칸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서방신학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같은 생각을 정식화한다. 마리아는 자기 아들의 공로를 예측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속량되었다는 것이다23). 한 세기 반이 지나서 교리적인 상황은 무염시태 교리로 반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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