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말씀연구>
보통 만화 영화의 주인공은 변신을 합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나 특별한 때 변신을 하여 평화를 지킵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자신들의 본 모습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확고한 힘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가이사리아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고백했습니다. 변모에서는 하느님이신 아버지께서 세 사도들 앞에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선언하고 예수님께 순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낙담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들어 높이기 위하여 변모는 몹시 시기적절했습니다.
가끔은 우리도 변신합니다. 화가 나면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마귀의 모습으로, 마음이 편해지면 그 누구보다도 순진한 양으로. 어떤 것이 진짜 내 모습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변신했을 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는…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 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고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결코 이러한 메시아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변모는 사람의 아들에 의한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알려주셨던 그 영광을, 한 순간이나마 보여줌으로써 사도들의 마음에 신뢰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가이사리아에서 주신 계시를 보충하고 완성하고 또 예수님이 완전히 영적 메시아이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광스러운 변모의 장소로 숭배된 갈릴래아의 다볼 산은 확실히 오늘날까지도 선뜻 신현 사건, 즉 현세적 실 상황에서 하느님 세계의 현시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장엄한 자리입니다.
어느 성서 학자는 이 산이 헤르몬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산 높이는 2,793미터로 쉽게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산이라는 설도 있지만 다볼산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다볼산은 높이가 562미터이며 나자렛 동남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세 명 뿐입니다. 교회의 으뜸인 베드로, 열 두 사람 중 최초로 예수님을 위하여 피를 흘리게 될(44년)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이 세사도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4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사도들은 잠시 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그들의 눈앞에는 엘리야와 모세, 그리고 너무도 눈부신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대표하고 있는 율법과 예언자, 곧 구약 시대가 예수님 옆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 모세의 권위 이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메시아의 길을 개척하고 이것을 이스라엘에 알릴 역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이음, 또 율법과 예언이 그리스도께 종속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이 복음으로 구약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완성하고 옛 예언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5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6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모세와 엘리야가 머물고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자기 나라를 넓히리라는 상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에 너무 매료되어 이 빛나는 인물들에게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는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그는 이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세 개의 초막은 초막절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대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축제 주간은 구원의 시기를 미리 기뻐하는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과 다른 두 제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천상적 인물들을 위해서 초막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은 그 초막 앞에서 노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신(8,31)이후에 그가 보인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때 그는 그러한 과정과 목적을 단념하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여기서는 그 빛나는 인물들이 머물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맛을 찾아서 헤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가니까 좋더라 하면 우르르 몰려가고, 저기 가니까 기도가 효험이 있더라 하면 그쪽으로 몰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가 주는 맛에만 중점을 두면 안됩니다. 그 맛을 통해서 그분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 기쁨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난과 죽음 앞에서 힘을 내라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떤 맛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손과 발이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7 바로 그 때에 구름이 일며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8 제자들은 곧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예수와 자기들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때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율법을 주셨을 때 구름이 시나이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출애24,15). 모세가 장막에 들어 갈 때 구름이 내려와 머물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지도자와 말씀을 하셨습니다(출애33,9-11). 옛날 시나이산에서와 같이 다볼산에서 하느님께서는 구름을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도 세례자요한의 귀에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마르1,11).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 간에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수난예고를 하실 때 안 된다고 펄쩍 뛰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것만을 찾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9 산에서 내려 오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10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서로 물어 보았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마음 깊이 이것을 간직하고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메시아께서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아직 그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아하! 그 말씀이었는데 내가 못 알아들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변모를 말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영광에 찬 변모를 말하면 수난의 괴로움을 믿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중들에게 그릇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부활 후에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입니다.
11 예수께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말라기(3,23-24)에 따른 율법학자의 가르침으로는, 엘리야가 메시아의 선구자, 그의 길을 준비하는 이, 메시아에게 기름을 붓는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보다 앞서 온다고 믿은 그 엘리야는 한 순간 예수님 옆에 그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아무런 길도 마련하지 않고, 유다인의 마음을 개심시키지도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제자들은 궁금해 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1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놓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너희에게 말해 두거니와 사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는 벌써 왔었고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성서에는 엘리야도 예언되어 있고, 예수님의 고통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글자의 노예가 되어버려서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보고도 그가 엘리야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막에서 옛 예언자들의 고행을 하였고, 엘리야와 같은 힘과 솔직함을 가지고 당시의 악덕을 채찍질했습니다. 그 세례자는 메시아에게 기름을 붓지는 않았으나 세례를 베풀었고,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하고 또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완전한 겸손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그 자취를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이것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학자들이 엘리야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모두 이행했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이미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아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세상 끝나기 전에 올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벌써 오신 것과 같이 엘리야도 세례자서 벌써 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야를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요한은 엘리야와 같이 정의를 위하여 모욕받던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께 대한 참된 숭배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교만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박해했던 것처럼, 음란한 헤로디아가 요한을 박해하였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베드로 사도처럼 그 맛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힘을 얻어서 그분의 뜻을 더욱 잘 실천하려 합니까?
2.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그분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듣기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