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서적 근거
2.1. 구약성서에 나타난 죄의 용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듭 죄를 범하고 심판을 받으면서 회개와 용서가 명시적이고 절박한 주제로 등장한다. 우선 예언자들은 죄와 그로 말미암은 불행한 운명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스라엘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호화스럽게 나날을 살고, 민족의 멸망을 염려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이제 유형을 가리라”(아모 6,7). 이스라엘은 “생수가 솟는 샘”인 자신의 하느님을 저버렸고, 이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판 갈라져 새기만하는 물 웅덩이를 갖게 됐다. “너희의 못된 짓이 너희 자신을 벌한다”(예레 2,13.19).
죄와 그로 인한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했다.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구약성서는 이에 대해서 두가지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로는 말을 통한 실현이다. 즉 죄의 고백 (2 사무 12,13; 에즈라 9,6-10; 시편 51,5-6), 불행을 슬퍼하는 것 (에즈라 9,13; 느헤 9, 36-37; 요엘 1,5.8. 13-14) 그리고 자비의 간청 (요엘 1,14; 2,17), 더러움과 죄을 씻어 주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시편 51,4.9.12) 등이다. 두번째는 표징적 행동이다. 예를 들어서 공동체 전체의 모임 (에즈라 9,4; 10,1; 느헤 9,1; 요엘 1,14; 2,16-17), 단식 (느헤 9,1; 요엘 1,14), 참회의 옷을 입는 것 (느헤 9,1; 요엘 1,13), 잿 속에 앉아 있거나 그 속에서 뒹굴고, 머리 위에 재를 뿌리는 것 (예레 6,26; 에제 27,30; 요나 3,6), 번제물 (레위 16,1-19), 속죄양의 추방(레위 16,20-22), 정화수를 자신에게 끼얹게 하는 것(시편 51,9)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참회 예식이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은 않았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하느님의 안배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서 레위 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예식들이 더 이상 진정한 회개의 표시가 아니라 회개를 대신하는 수단이 될 때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아모 5,21-23; 이사 58,5). 왜냐하면 올바른 참회는 행동을 고치는 것,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분야에서 변화되는 것 (이사 58, 6-7; 아모 5,24)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예식과 이웃을 위한 행동이 서로 대치되는 경우, 두번째의 것이 우선권을 갖는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호세 6,6). 바로 이말을 예수께서는 마테오 복음서에서 안식일 계명의 준수와 자비의 실천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인용하신다 (마태 12,7; 9,13도 그와 유사함).
죄지은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하는데, 구약성서에서는 이 회개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예레 3,22).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예레 31,33).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2.2. 예수에게 나타난 죄의 용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전통 속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실질적인 회개 없는 겉치레의 예식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 서로간의 화해를 종교적 예식보다 우위에 둔다. 성전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마태 5,23-24 참조). 하지만 예수에게서 나타난 죄의 용서는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2.2.1. 용서의 구체적 실현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대제관이 화해의 날에 성전에서 하느님이 제정하신 참회 규정의 치밀한 세칙에 따라 백성 전체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직접 각 개인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가 개별적으로 사죄를 선언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행동은 마르꼬 복음이 전하듯이 당시의 경건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사죄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은 이스라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 고유의 권리에 대한 간섭과 침해로, 하느님의 이름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실상의 신성모독, 오만에서 나온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이러한 사죄권 행사는 율법에 충실한 이들의 격렬한 분개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예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2. 선행조건 없는 용서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들로 간주된 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하고(루가 19,1-10),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마태 2,13-17 병행);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아 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가 7,36-50),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 수호자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었다(요한 7,53-8,11). 이 모든 것은 예수가 도발적일 만큼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연대를 취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낸다.
예수가 당시에 경건한 이들이 멀리한 죄인들과 연대를 취하였던 것은 단지 사회적, 인도적인 차원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를 잘 표현하는 것이 죄인들과의 공동의 식사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1) 이런 맥락에서 경건한 이들에게 도외시 된 죄인들과의 함께 하는 식사는 예수에게 단지 보다 자유로운 관용과 보다 인도적인 마음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사명과 그가 선포한 복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는 죄인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이를 하느님 품안에로 모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고(참조: 마태 23,37), 이를 위해서 식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는 식탁에 죄인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그들에게 선포하고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의 종교적 통념을 뒤흔드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에게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우선 회개와 보속, 그 다음에 용서’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의문시한다. 구약에서 용서는 선업(율법 준수, 맹세, 희생, 자선)을 통해서 죄를 보속한 사람에게만, 즉 참회 규정을 완수해서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죄인은 심판과 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직 참회하지 않은 죄인에게 먼저 용서를 베푼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 있든, 회개의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간에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회개 개념, 즉 하느님이 인간을 회개하도록 이끌면서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죄스러운 과거가 선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용서는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개를 선행한다. 이는 – R. 불트만에 의거한다면 – 사실상 유다의 하느님 사상을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는 동일한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그러나 이 하느님은 예수 이전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궁극적으로, 극단적으로 행동한다”.2)
2.2.3. 용서는 회개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선행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하지만 그들에게 용서에 대한 응답, 즉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이런 점은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타난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왕으로부터 많은 빛을 탕감받은 종이 얼마 안 되는 빛을 진 자신의 동료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자 왕은 그를 꾸짖는다.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는 그가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예수의 용서는 선행조건은 없지만, 회개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미 주어진 용서마저도 무효화될 위험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준비 자세와 연결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마태 6,12; 참조: 18,25-35).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끼리의 용서가 내적인 연관을 이룬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하느님에게 용서 받는다함은 죄인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의 운동에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참여할 때에만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 감싸고 변화시킬 수 있다.
2.3. 신약성서 공동체에서의 죄사함의 실천
2.3.1. 회개를 위한 상호 협조의 장소인 교회 공동체
신약성서의 서간문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개개 구성원이 잘못을 범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對處)는 교회 공동체의 삶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채우시오.”: 영으로 가득한 사람은 조용히 “온유의 정신으로” 잘못한 형제 자매들을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갈라 6,1-2). 이들에 대한 도움은 각자의 상황에 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은 훈계하고, 소심한 이들은 격려하며 약한 이들을 돌보아 줌” (1테살 5,14)으로써 전체적으로는 현실성있게 구별을 두는 공동체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훈계, 고백, 용서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러분은…서로 타일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 15,14).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있다 해도 서로 참고 서로 은혜로이 용서하시오” (골로 3,13).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치유를 받게 하시오” (야고 5,16).
2.3.2. 마태 18,15-20에 나타난 공동체의 규칙
이미 일정한 법규를 통해서 규정된 공동체 생활을 반영해주는 마태오 복음은 18,15-18에서 여러 단계의 참회 규칙을 보여 준다: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훈계가 모든 공개적인 훈계보다는 우선한다. 그 다음 단계, 즉 작은 그룹 안에서의 대화, 경우에 따라서는 그 다음에 전체 공동체와의 대화는 그 전단계가 소용이 없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죄인을 성찬의 공동체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공동체가 행한 조치는 하느님 앞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여러분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여러분이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 18,18).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공동체와의 화해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시오”라는 말의 뜻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였다. 유다교에서는 이방인과 세리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다” 그리고 “풀다”는 유다교의 징벌 관습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유다교에서 “매다”와 “풀다”란 말은 무엇이 금지되어 있고 허락되어 있는지, 죄인을 공동체에서 파문하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선언하는 랍비의 권한을 의미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매다”는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고, “풀다”는 이를 철회하고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에 현존하신다는 데에 있다.
이 공동체의 규칙, 그 중에서도 특히 공동체에서의 추방에 대한 규칙에 어떤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 보아야 한다. 마태 18,15-20 바로 앞에는 잃었던 양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한 비유(마태 18,12-14)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용서의 한계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이 나온다 (마태 18, 21-22). 그 다음에는 용서하는 자세가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마태 18,23-35). 마태오는 공동체의 규칙을 이런 텍스트의 맥락에 둠으로써 “매다”와 “풀다”가 동등한 가능성에 속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 훈계의 최종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은 아니다. 공동체는 배척된 이들을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요한 20,23은 마태오 공동체 규칙의 마지막 단계와 유사함을 드러낸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두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용서한다”, “그대로 둔다”가 마태 18,18의 “매다”, “풀다”와 같은 의미인지에 대해는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두 텍스트가 같은 의미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요한 20,21-23은 공동체 안의 죄가 아니라, 전교의 상황, 즉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는냐에 관한 결정에 관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해석에 의하면 요한 20,21-23은 교회 내적인 참회 조처에 관한 증언이고, 두번째의 해석에 따르면 세례에 관계된 얘기이다.
2.3.3. 파문의 구체적인 사례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는 특정 신자를 교회 공동체에서 파문하도록 지시한다 (1고린 5,1-13). 거기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교적 모습이다: 나쁜 “누룩”은 공동체 전체를 망치므로 내버려야 한다 (1고린 5,6-8). 다른 하나는 죄인의 구원이다: 엄격한 조처를 통해서 그에게 회개하고 구원될 기회를 주어야 한다 (1고린 5,5). 두번째의 관점이 2고린 2,5-10에서는 강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바울로는 이전에 책망받은 신자에게 다시 성찬례를 허락해서 (8절의 “그에게 사랑을 다짐하시오”라는 표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지나친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조처하라고 권고한다. 비슷한 경고가 2테살 3,6과 14-15에서도 나타난다: 교회 공동체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지만, 그를 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형제처럼 타일러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염려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파문된 사람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2.3.4. 교회 직무자들의 역할
“매고”, “푸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공동체 전체에게, 아니면 특정한 교회 직무자에게 주어졌는가?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태 18,18 (요한 20,23도 마찬가지로)을 사제의 사죄권을 증명해주는 분명한 성서적 구절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태 18,18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마태 18장 전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얘기하고, 특별히 위탁을 받은 사람들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고린토 서간의 대목도 이와 부합한다: 바오로는 파문시키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특정한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요구하였다 (참조: 1고린 5,4-5; 2 고린 2,8).
다른 한편으로는 마태 18,18과 마태 16,19의 베드로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대목은 형태상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이는 마태 18,18도 특정한 교회 직무자를 생각한 것이라는 결론을 유도하지 않을까? 그리고 1고린 5,1-13과 2고린 2,5-10의 대목도 뒤에는 바오로의 권위가 자리하고 있는 않는가?
오늘날 성서 주석학의 관점에 따르면 요한 20,23-24의 “용서하다”와 “그대로 두다”란 말은 특별한 권한을 가진 직무를 고려한 해석은 아니다: “전권을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이나 나중의 교회 직무자들에게 제한할 생각은 복음 저자에게 없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하며, 요한 1서에는 직무자들이 교회 생활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3)
이런 것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매고 푸는 것은 분명히 전체 공동체의 사명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서 권한이 나뉘어지고 직무 구조가 형성되는 즉시 파문과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 직무자의 특별한 권한과 연관된다. 그러나 직무를 맡은 이들이 이 권한을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혹은 공동체에 반대해서 보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권한은 전체 공동체가 그들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할 권한에서 자라난 것이다.
2.3.5. 죄의 사함에 대한 성사적 표지
신약성서에서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고유한 성사적 표지는 세례이다. 또한 세례를 바탕으로 세례자의 “새로운 삶”이 형태를 갖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 (로마 6, 4.8). 여기에서부터 교회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개와 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하신 분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가 거행하던 주님의 성찬도 죄의 용서를 실현하는 표지이다. 이를 특별히 명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잔에 대한 언사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 (마태 26,28). 이것은 통상적으로 식사를 계약과 화해의 표시라고 보는 성서적 이해에 근거를 둔다. 마지막으로 병자의 도유도 죄의 사함과 관련을 이루고 있다 (야고 5,15-16). 그러나 마태 18,18에서 언급되고 1고린 5,1-13에 따라 실천된 파문이나 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예식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 볼 수 없다.

2. 성서적 근거
2.1. 구약성서에 나타난 죄의 용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듭 죄를 범하고 심판을 받으면서 회개와 용서가 명시적이고 절박한 주제로 등장한다. 우선 예언자들은 죄와 그로 말미암은 불행한 운명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스라엘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호화스럽게 나날을 살고, 민족의 멸망을 염려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이제 유형을 가리라”(아모 6,7). 이스라엘은 “생수가 솟는 샘”인 자신의 하느님을 저버렸고, 이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판 갈라져 새기만하는 물 웅덩이를 갖게 됐다. “너희의 못된 짓이 너희 자신을 벌한다”(예레 2,13.19).
죄와 그로 인한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했다.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구약성서는 이에 대해서 두가지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로는 말을 통한 실현이다. 즉 죄의 고백 (2 사무 12,13; 에즈라 9,6-10; 시편 51,5-6), 불행을 슬퍼하는 것 (에즈라 9,13; 느헤 9, 36-37; 요엘 1,5.8. 13-14) 그리고 자비의 간청 (요엘 1,14; 2,17), 더러움과 죄을 씻어 주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시편 51,4.9.12) 등이다. 두번째는 표징적 행동이다. 예를 들어서 공동체 전체의 모임 (에즈라 9,4; 10,1; 느헤 9,1; 요엘 1,14; 2,16-17), 단식 (느헤 9,1; 요엘 1,14), 참회의 옷을 입는 것 (느헤 9,1; 요엘 1,13), 잿 속에 앉아 있거나 그 속에서 뒹굴고, 머리 위에 재를 뿌리는 것 (예레 6,26; 에제 27,30; 요나 3,6), 번제물 (레위 16,1-19), 속죄양의 추방(레위 16,20-22), 정화수를 자신에게 끼얹게 하는 것(시편 51,9)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참회 예식이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은 않았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하느님의 안배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서 레위 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예식들이 더 이상 진정한 회개의 표시가 아니라 회개를 대신하는 수단이 될 때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아모 5,21-23; 이사 58,5). 왜냐하면 올바른 참회는 행동을 고치는 것,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분야에서 변화되는 것 (이사 58, 6-7; 아모 5,24)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예식과 이웃을 위한 행동이 서로 대치되는 경우, 두번째의 것이 우선권을 갖는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호세 6,6). 바로 이말을 예수께서는 마테오 복음서에서 안식일 계명의 준수와 자비의 실천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인용하신다 (마태 12,7; 9,13도 그와 유사함).
죄지은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하는데, 구약성서에서는 이 회개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 주리라”(예레 3,22).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예레 31,33).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2.2. 예수에게 나타난 죄의 용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전통 속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실질적인 회개 없는 겉치레의 예식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 서로간의 화해를 종교적 예식보다 우위에 둔다. 성전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마태 5,23-24 참조). 하지만 예수에게서 나타난 죄의 용서는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2.2.1. 용서의 구체적 실현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대제관이 화해의 날에 성전에서 하느님이 제정하신 참회 규정의 치밀한 세칙에 따라 백성 전체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직접 각 개인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가 개별적으로 사죄를 선언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행동은 마르꼬 복음이 전하듯이 당시의 경건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사죄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은 이스라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 고유의 권리에 대한 간섭과 침해로, 하느님의 이름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실상의 신성모독, 오만에서 나온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이러한 사죄권 행사는 율법에 충실한 이들의 격렬한 분개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예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2. 선행조건 없는 용서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들로 간주된 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하고(루가 19,1-10),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마태 2,13-17 병행);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아 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가 7,36-50),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 수호자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었다(요한 7,53-8,11). 이 모든 것은 예수가 도발적일 만큼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과 연대를 취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낸다.
예수가 당시에 경건한 이들이 멀리한 죄인들과 연대를 취하였던 것은 단지 사회적, 인도적인 차원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를 잘 표현하는 것이 죄인들과의 공동의 식사이다. 근동 사람들에게 식탁의 공동체란 평화, 신의, 형제애, 용서를 의미하였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이 사람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1) 이런 맥락에서 경건한 이들에게 도외시 된 죄인들과의 함께 하는 식사는 예수에게 단지 보다 자유로운 관용과 보다 인도적인 마음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사명과 그가 선포한 복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는 죄인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이를 하느님 품안에로 모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고(참조: 마태 23,37), 이를 위해서 식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는 식탁에 죄인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그들에게 선포하고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의 종교적 통념을 뒤흔드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에게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우선 회개와 보속, 그 다음에 용서’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의문시한다. 구약에서 용서는 선업(율법 준수, 맹세, 희생, 자선)을 통해서 죄를 보속한 사람에게만, 즉 참회 규정을 완수해서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죄인은 심판과 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직 참회하지 않은 죄인에게 먼저 용서를 베푼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 있든, 회개의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간에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회개 개념, 즉 하느님이 인간을 회개하도록 이끌면서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에 의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죄스러운 과거가 선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용서는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개를 선행한다. 이는 – R. 불트만에 의거한다면 – 사실상 유다의 하느님 사상을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는 동일한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그러나 이 하느님은 예수 이전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궁극적으로, 극단적으로 행동한다”.2)
2.2.3. 용서는 회개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선행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하지만 그들에게 용서에 대한 응답, 즉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이런 점은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타난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왕으로부터 많은 빛을 탕감받은 종이 얼마 안 되는 빛을 진 자신의 동료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자 왕은 그를 꾸짖는다.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는 그가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예수의 용서는 선행조건은 없지만, 회개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미 주어진 용서마저도 무효화될 위험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준비 자세와 연결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마태 6,12; 참조: 18,25-35).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끼리의 용서가 내적인 연관을 이룬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하느님에게 용서 받는다함은 죄인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용서의 운동에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참여할 때에만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 감싸고 변화시킬 수 있다.
2.3. 신약성서 공동체에서의 죄사함의 실천
2.3.1. 회개를 위한 상호 협조의 장소인 교회 공동체
신약성서의 서간문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개개 구성원이 잘못을 범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對處)는 교회 공동체의 삶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채우시오.”: 영으로 가득한 사람은 조용히 “온유의 정신으로” 잘못한 형제 자매들을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갈라 6,1-2). 이들에 대한 도움은 각자의 상황에 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은 훈계하고, 소심한 이들은 격려하며 약한 이들을 돌보아 줌” (1테살 5,14)으로써 전체적으로는 현실성있게 구별을 두는 공동체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훈계, 고백, 용서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러분은…서로 타일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 15,14).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있다 해도 서로 참고 서로 은혜로이 용서하시오” (골로 3,13).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치유를 받게 하시오” (야고 5,16).
2.3.2. 마태 18,15-20에 나타난 공동체의 규칙
이미 일정한 법규를 통해서 규정된 공동체 생활을 반영해주는 마태오 복음은 18,15-18에서 여러 단계의 참회 규칙을 보여 준다: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훈계가 모든 공개적인 훈계보다는 우선한다. 그 다음 단계, 즉 작은 그룹 안에서의 대화, 경우에 따라서는 그 다음에 전체 공동체와의 대화는 그 전단계가 소용이 없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죄인을 성찬의 공동체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공동체가 행한 조치는 하느님 앞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여러분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여러분이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 18,18).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공동체와의 화해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시오”라는 말의 뜻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였다. 유다교에서는 이방인과 세리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다” 그리고 “풀다”는 유다교의 징벌 관습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유다교에서 “매다”와 “풀다”란 말은 무엇이 금지되어 있고 허락되어 있는지, 죄인을 공동체에서 파문하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선언하는 랍비의 권한을 의미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매다”는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고, “풀다”는 이를 철회하고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에 현존하신다는 데에 있다.
이 공동체의 규칙, 그 중에서도 특히 공동체에서의 추방에 대한 규칙에 어떤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 보아야 한다. 마태 18,15-20 바로 앞에는 잃었던 양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한 비유(마태 18,12-14)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용서의 한계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이 나온다 (마태 18, 21-22). 그 다음에는 용서하는 자세가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마태 18,23-35). 마태오는 공동체의 규칙을 이런 텍스트의 맥락에 둠으로써 “매다”와 “풀다”가 동등한 가능성에 속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 훈계의 최종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은 아니다. 공동체는 배척된 이들을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요한 20,23은 마태오 공동체 규칙의 마지막 단계와 유사함을 드러낸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두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용서한다”, “그대로 둔다”가 마태 18,18의 “매다”, “풀다”와 같은 의미인지에 대해는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두 텍스트가 같은 의미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요한 20,21-23은 공동체 안의 죄가 아니라, 전교의 상황, 즉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는냐에 관한 결정에 관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해석에 의하면 요한 20,21-23은 교회 내적인 참회 조처에 관한 증언이고, 두번째의 해석에 따르면 세례에 관계된 얘기이다.
2.3.3. 파문의 구체적인 사례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는 특정 신자를 교회 공동체에서 파문하도록 지시한다 (1고린 5,1-13). 거기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교적 모습이다: 나쁜 “누룩”은 공동체 전체를 망치므로 내버려야 한다 (1고린 5,6-8). 다른 하나는 죄인의 구원이다: 엄격한 조처를 통해서 그에게 회개하고 구원될 기회를 주어야 한다 (1고린 5,5). 두번째의 관점이 2고린 2,5-10에서는 강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바울로는 이전에 책망받은 신자에게 다시 성찬례를 허락해서 (8절의 “그에게 사랑을 다짐하시오”라는 표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지나친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조처하라고 권고한다. 비슷한 경고가 2테살 3,6과 14-15에서도 나타난다: 교회 공동체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지만, 그를 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형제처럼 타일러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염려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파문된 사람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2.3.4. 교회 직무자들의 역할
“매고”, “푸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공동체 전체에게, 아니면 특정한 교회 직무자에게 주어졌는가?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태 18,18 (요한 20,23도 마찬가지로)을 사제의 사죄권을 증명해주는 분명한 성서적 구절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태 18,18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마태 18장 전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얘기하고, 특별히 위탁을 받은 사람들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고린토 서간의 대목도 이와 부합한다: 바오로는 파문시키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특정한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요구하였다 (참조: 1고린 5,4-5; 2 고린 2,8).
다른 한편으로는 마태 18,18과 마태 16,19의 베드로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대목은 형태상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이는 마태 18,18도 특정한 교회 직무자를 생각한 것이라는 결론을 유도하지 않을까? 그리고 1고린 5,1-13과 2고린 2,5-10의 대목도 뒤에는 바오로의 권위가 자리하고 있는 않는가?
오늘날 성서 주석학의 관점에 따르면 요한 20,23-24의 “용서하다”와 “그대로 두다”란 말은 특별한 권한을 가진 직무를 고려한 해석은 아니다: “전권을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이나 나중의 교회 직무자들에게 제한할 생각은 복음 저자에게 없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하며, 요한 1서에는 직무자들이 교회 생활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3)
이런 것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매고 푸는 것은 분명히 전체 공동체의 사명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서 권한이 나뉘어지고 직무 구조가 형성되는 즉시 파문과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 직무자의 특별한 권한과 연관된다. 그러나 직무를 맡은 이들이 이 권한을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혹은 공동체에 반대해서 보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권한은 전체 공동체가 그들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할 권한에서 자라난 것이다.
2.3.5. 죄의 사함에 대한 성사적 표지
신약성서에서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고유한 성사적 표지는 세례이다. 또한 세례를 바탕으로 세례자의 “새로운 삶”이 형태를 갖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 (로마 6, 4.8). 여기에서부터 교회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개와 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하신 분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가 거행하던 주님의 성찬도 죄의 용서를 실현하는 표지이다. 이를 특별히 명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잔에 대한 언사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 (마태 26,28). 이것은 통상적으로 식사를 계약과 화해의 표시라고 보는 성서적 이해에 근거를 둔다. 마지막으로 병자의 도유도 죄의 사함과 관련을 이루고 있다 (야고 5,15-16). 그러나 마태 18,18에서 언급되고 1고린 5,1-13에 따라 실천된 파문이나 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예식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