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과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씀에 귀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불신에 가득 찬 유다인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요구를 채움을 뜻합니다. 죽음을 겪지 않는다(직역하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표현 방식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인들에게 이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52 “이제 우리는 당신이 정녕 마귀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예수님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 신적 권력을 자처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유다인들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 안에서 과연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에 동물의 왕국에서 아마존의 수달과 악어의 싸움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수달 모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악어를 만났습니다. 수달 모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미 수달은 용감히 악어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파충류의 특징이 시간이 지나면 몸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결국 악어는 수달에게 지고, 수달은 악어의 꼬리를 뜯어 먹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고 하니 53 그래 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아브라함과 예언자들, 이른바 하느님의 사람들도 죽음을 맛보았는데, 그들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되묻는 악의적인 거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기에 예수님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또 대들고 있습니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느님만이 영원히 사시는 분이요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인데,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자처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54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영광스럽게 한다”란 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관련된 “영광”을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 활동 가운데서도 이미 이루어진 영광을 언급한 대목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재적 의미가 강조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계속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으로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파견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신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현재적 영광은 예수님께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계속적 증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칭찬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칭찬해 주시는 분이 모든 이가 존경하는 분이라면 나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칭찬해 주는 그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할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은 하느님과 친교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기에 자신의 말을 지키도록 요구하고 구원의 약속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미래에 희망을 두었고, 예수님의 날(내 날)을 보겠기에 즐거워했으며, 또한 보고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고 증언한 셈입니다. 아브라함이 내다본 기쁨과 희망이 예수님께 와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내 날”은 예수님의 지상 출현을 가리키며, 하느님께 유보된 날(야훼의날)과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목적으로서, 또한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근원으로서 선포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따집니다.
57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맞습니다. 맞고요..”쉰 살”은 실제 나이가 아니라 남자의 원숙한 연배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의인은 나이 들어 죽기 직전에 천상계를 내다본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표현된 말로서 “예수님! 당신은 아직 그런 연배도 아닌데 천상계를 내다보았단 말이오?”하고 빈정대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몰이해와 오해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58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예수님은 시간의 지배 속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 곧 영원한 현재 속에 실재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 태어난 적이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월등하고 아브라함보다 절대적 우선권을 지녔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신적 품위와 실존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에 대한 약속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언제나 하느님께 속해 있고, 집에 머물러 있는 아들로서(35절)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를 이끌고(36절)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51절). 또한 예수님의 이 자기계시는 ‘나는 있는 자 곧 나다”라고 계시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가장 가깝고 그 맥락도 같습니다.
5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믿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적 품위를 갖춘 예수님께 감히 폭력을 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그분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몸을 숨기다”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더는 계시 말씀을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자리하는 것조차 거절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났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성역을 떠나갔다는 뜻으로서 예수님을 믿지 안는 유다인들의 비구원과 그에 대한 그들 자신의 책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가끔은 농담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실을 말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진실을 말하는데 나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또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상대방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2.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너희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혹시 내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루실라: 오늘도 이렇게 말씀의 갈증을 풀어주신 신부님 감사해요.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04/01-07:55]
흑진주: 구절마다 해석해주셔서 넘 좋은 요즘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겐요 특히.. 신부님도 많이 웃을 수 있는 4월이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0^ [04/01-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