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론 강의-교의사적인 전개(2)

 

3.2.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


교부시대의 마리아론의 특징은 하느님의 제2위격의 육화라는 핵심적 신비의 테두리 안에서 마리아가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서서히 발견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시대의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과 관련하여 구원역사적으로 정향되어 있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구원사업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점점 더 많이 주목하게 된다. 마리아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친에서 그리스도의 협조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마리아의 인격과 생애에 대하여 더 많이 알려고 애를 썼다. 또한 마리아의 특별한 기능과 결부된 은총의 탁월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 구령을 열렬히 추구하던 중세인들은 마리아를 전구자(傳求者)로, 모친이며 조력자로 대하였다. 따라서 마리아 신심이 광범위하게 일깨워졌다. 마리아 신심은 중세의 신앙의식 일반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즉 신앙을 개인화하고 정감적으로 내면화하며 윤리화하였다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마리아에 대해서 담담하고 간략하게 언급하는 신약성서에 만족하지 않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서 마리아에 대해서 묘사하게 되었다.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200-1280)를 저자로 내세우는 미지의 저자는 예수 탄생 예고 복음을 확대해서 천사의 성(性)과 같은 물음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한다. 즉 복되신 동정녀의 계시가 보다 품위있는 성 소유자에 의해 일어났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그 천사는 남성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또 마리아의 몸무게,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눈의 빗깔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이 저자는 마리아가 흑색의 머리카락과 눈빛을 지니고, 피부는 백적색이었으며, 완전한 아름다움의 소유자로서 확신하면서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한다: 육신은 영혼을 향하여 정립되어 있고, 육신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좌우된다. 따라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있는 곳에는 가장 아름다운 육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




그러나 중세에는 이렇게 마리아 신심이 과도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에 그치지 않고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는 계속되었다. 고대 교회에서 전래된 마리아에 대한 두 가지 신앙 고백, 즉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다는 의미로서의) 동정녀라는 신앙 고백은 이른바 “처음 5백년간의 의견 일치(Consensus quinquesaecularis)”의 한 부분으로서 중세에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신학적 가르침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근세에 이르러 교리로 명문화된 마리아의 몽소(蒙召)승천(Assumpta)과 원죄 없으신 잉태(Immaculata)는 신학자들간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3.2.1. 성모 몽소승천과 원죄 없으신 잉태에 관한 학파들간의 논쟁


마리아가 지상의 삶을 마친 다음에 육신과 영혼과 함께 하늘에 불러올려졌다는 가르침이 형성된 데에 기여한 것은 동방 지역에 넓게 유포된 “Assumptio”, 즉 현양된 예수 그리스도가 주도해서 숨을 거둔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려서 거기서 육신과 영혼이 재결합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마리아의 빈 무덤”에 얽힌 전설이 이 가르침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 지역의 전례에서 이미 6세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의 임종(koimesis) 축일”을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방에서는 이 축일을 “dormitio Mariae”(마리아의 잠듦)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불렀는데, 8세기에 8월 15일로 날짜가 확정되고 명칭도 dormitio에서 마리아의 승천(assumptio)으로 변화되었다. 서방에서는 이 전례적 전통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데에 있어 우선은 소극적이었다. 예를 들어서 파스카시우스 라트베르두스(Paschasius Radbertus, +860경)는 이 축일에 상응하는 성서의 증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 축일의 내용은 하늘에서 완성에 이르른 마리아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신학적 토론을 거치면서 점차로 마리아가 육신과 함께 하늘에 불러올림을 받았다는 신앙고백에 반대될 것이 없다는 의견이 관철되었다.


이에 비해서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어머니 안나에게 잉태되었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이 신학적 관념은 그리스도론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미 마리아의 성령잉태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의 무죄함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동방에서 전례와 기도중에 점차로 확신하게된 마리아의 “극도의 순결함”에서, 그리고 점점 더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무죄함으로 파악된 “극도의 순결함”에서 전개되어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근거로 만만치 않은데, 우선 성서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이 가르침은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에서 열렬히 변호하는 원죄의 일반성과 그로 인한 모든 인간의 구원 필요성과도 합치되지 않는다. 마리아를 원죄에서 제외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적 신앙 진리를 의문에 처하게 한다. 또한 원죄는 부부행위를 통해서 전수된다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 일반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즉 일반적으로 마리아는 정상적인 부부행위를 통해서 잉태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신학적 문제를 본다면 예를 들어서 토마스 아퀴나스(STh III q.27 a.2 참조)와 그 후에 도미니꼬회의 신학이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 머물렀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었으나 탄생 전에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


프란치스코회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1308)의 입장은 후대에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옹호하는 이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의 구원론적 문제점을 선행구속(先行救贖, praeredemptio)라는 개념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의당히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은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로의 구원 공로를 미리 앞당겨서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보호해 주셨다(praeservatio)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탈출구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의 가르침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논쟁에 개의치 않고 11세기 이래로 12월 8일에 거행되는 전례적 축일은 점점 더 일반 백성의 신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3.2.2. 종교개혁자들의 입장


마르틴 루터(+1546)는 그 시대에 통용되던 일반적인 마리아의 상을 물려 받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엄한 심판자로 군림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와 달리 마리아는 “자비의 어머니(mater misericordiae)”로서 자신의 자녀들을 심판자 그리스도가 내리려는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지켜주면서 배려해준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하느님만이 죄인에 대한 사랑으로서 구원과 자비와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확신할수록 전래된 마리아 상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방해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오직 성서에 기반을 두고자하는 자신의 의도와 부합해서 마리아를 스스로 활약하는 은총의 중재자로서가 아니라 의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신앙의 모범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고대교회의 공의회들이 성서에 근거해서 선언한 교의적 가르침,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동정녀라는 가르침을 의문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가르침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 당시에도 논의되었던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와 ‘승천’ 가르침에 대해서는 성서에 그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 의구심을 표시하였다.


전체적으로 루터는 마리아 공경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役事)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마리아에게서 신뢰하고 신앙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마리아 신심의 인간적-모범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의 ‘마니피캇’ 주석은 진정한 마리아 신심의 뛰어난 증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루터는 마리아의 이름으로 자행된 남용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를 본질적인 것, 즉 그리스도에로 되돌려 이끌고자 하였다. 이런 취지에서 오직 성서로만, 은총으로만, 신앙으로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1530년에 제정된 루터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서인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에서도 루터의 노선이 분명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교회를 위해서 전구를 한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물리쳐야 하고, 사탄의 어마어마한 힘과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다. 마리아가 이를 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마리아는 온갖 최고의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기는 하나 그리스도와 똑같이 간주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신앙과 겸손의 모범을 따를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마리아에 대한 과장된 가르침으로 말이암아 그리스도가 서야 할 자리에 마리아가 대신 들어서게 된다”(CA 21).


개혁자들의 마리아에 대한 신앙고백의 전통은 전체적으로 볼 때 쮜리히의 개혁자 쯔빙글리(H.Zwingli, +1531)를 따르지 않고,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J.Calvin, +1564)을 따르고 있다. 쯔빙글리는 그의 저서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열렬한 마리아 공경자였지만, 칼빈은 마리아에 대해서 담담하고 윤리적으로 고백할 다름이다. 칼빈은 모든 형태의 성인 공경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와 연관해서 마리아의 무죄성에 대한 가르침을 신학적인 이유에서 반대하였다. 루터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혁자들의 전통도 성서의 증언을 “정통적” 마리아론의 기준으로 보았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그리스도론적 기능을 지닌 로고스의 성령에 의한 잉태와 고대 교회의 마리아 교리를 견지한다. 




3.3. 근세


종교개혁 이후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쟁론을 벌리는 가운데 점점 더 반(反) 마리아적 입장으로 경직되어 갔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 측에서는 마리아 신심이 점차로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17,18세기, 즉 계몽주의 시대에는 개신교만이 아니라 가톨릭의 사상가들도 마리아론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잇단 마리아의 발현보도2)로 인해서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과 공경이 새롭게 소생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미 고대교회에 등장하여 중세에 토론의 대상이 되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마리아론의 주제들, 즉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성모 몽소 승천에 대해 신학적으로 더 깊이 논의하려는 관심이 일깨워졌다.


트리엔트 공희회의 교부들은 (원죄론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한 가르침의 신학적 의미에 관한 물음에 의식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DS 1516). 17세기에 이르러 이를 믿을 교리로 규정해 달라는 신자들의 거센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황은 거절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30)는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성령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고”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 문제가 새롭게 다루어지고,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교서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DS 2800-2804)를 통해서 교도권적으로 이 가르침을 수용하였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은(特恩)과 특대(特待)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는 확고한 가르침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되었고,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이 굳건하고 지속적으로 믿어야 한다”(DS 2803).


이 교서는 신학적으로 둔스 스코투스의 논거를 수용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공로를 미리 앞당기는 “선행구속”이란 신학적 개념은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가 모든 인간의 구원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의 보편성과 합치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영혼과 육신 모두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신앙적 확신은 이미 중세에도 그렇게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적으로 결정한 사건은 이제 곧 성모 승천도 믿을 교리로 선포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이미 반 종교개혁 시대에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았기에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 (assumpta quia immaculata)”는 논거가 형성되었는데, 이 논거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를 전후로 신학적 관심이 다른 데로 쏠렸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 성모 승천 교의는 1950년에 이르러서야 교의적으로 교황 비오 12세의 교서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DS 3900-3904)를 통해서 반포되었다. 그 구조와 논리 전개에 있어서 1854년의 교서와 흡사한 점이 많은 이 교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원죄가 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 생활을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 계시된 믿을 교리이다”(DS 3903).


교황들은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와 성모 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신학서적과 특히 전례적 실천에 기록된 오랜 교회의 전통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이 교리 선포에 이어서 계속된 논의에서 제기된 질문,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corredemptrix)”라고 교의적 선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근거로 들 수가 없었다. 벨기에의 추기경 메르씨에(Mercier)는 1913년 하느님의 모친의 중재성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라는 요청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이러한 착상의 근원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가져오는 중재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성부의 활동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재자와 그 중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류의 활동도 아울러 필요하다는 데에 있다. 마리아는 대표적으로 하느님께 “예”라고 수락함으로써 이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로써 본질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포괄적으로 구속자를 위하여 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중재자이며, 공동 구속자라고 지칭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쉽사리 오해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고, 그래서 구속자, 중보자라는 명칭은 완전한 의미로는 오로지 그분에게만 해당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적 교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중심적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손상할 위험이 있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일치 11)가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황 비오 12세의 재위기간(1939-1958)은 마리아론을 위해서는 특별하고도 풍요한 시기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렬한 마리아 공경자였으며 마리아 교리와 마리아 공경을 강력하게 촉진시키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비오 12세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세계를 원죄에 물들지 않는 마리아의 성심께 봉헌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는 마리아 여왕 축일을 정하였다. 1953년에는 마리아 성년이 선포되었으며 교황의 주재하에 마리아 아카데미 기관과 학부가 생겼다. 그렇게 되자 마리아 연구를 위한 연합기구가 결성되고, 마리아에 관한 저서가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의 절정은 1950년 11월 1일에 선포된 성모승천의 교의화였다.


그러나 50년대 말엽에는 마리아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과열된 마리아 공경을 힘자라는 한 조절하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서 파티마 성모상이 이탈리아 일주를 통해 이탈리아를 마리아께 봉헌하려고 운동을 벌리던 ‘기적의 순례단’을 맞이하여, 교황은 신자들이 생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명백하게 강조하면서도 계획된 봉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신학적으로는 20세가 초반의 교부학의 부흥에 영향을 받아서 교부들의 유형론적 사고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마리아와 교회가 유형론적으로 일치한다는 데에 점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렇게 마리아론을 교회론과 연결지어서 고찰하는 태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수용되었다. 1950년에 성모 몽소승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 것은 이른바 “특권 마리아론”의 정점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해서 20세기의 마리아론의 경향은 마리아의 유형론적 의미와 그녀의 모범적인 신앙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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